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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에디트 Oct 05. 2018

내가 지금 이 전시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게 맞나

라는 생각은 가질 필요 없다

안녕. 디에디트 독자 여러분! 여러분에게 소개해야한다는 핑계로 더한 문화 덕질을 하고 있는, 라이프스타일 덕후 신동윤이다.



여러분 모두 이 그림들을 한 번쯤은 보셨을 테다. 그래, 여러분이 사랑하는 혁오밴드의 앨범 커버다. 꾸준히 이 그림들을 앨범 커버로 써온 덕에 이제는 혁오밴드를 상징하는 하나의 이미지가 됐다. 오혁 씨가 홍익대학교 미대를 나온 탓인지, 앨범 커버를 그가 직접 그렸다고 생각들 하시더라. 하지만 여러분, 오혁 씨는 예술학과를 나왔다. 내가 예술학과를 나온 건 아니라서 뭐를 배우는 학과라고 딱 말하진 못하지만, 아무튼 흔히 아는 그런 ‘그림 그리는 미대’는 아니다.


[노상호 작가]

그럼 저 그림은 누가 그렸을까. 바로 일러스트레이터 ‘네모난’이라고도 불리는 노상호 작가다. ‘혁오밴드로 유명해진 작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 모양인데 나는 이 커버가 되려 혁오밴드의 ‘힙한’ 이미지에 일조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솔직히 노래는 듣기 전에는 모르지만, 커버는 바로 눈에 보이니까. 또한 일러스트레이터 네모난이 혁오밴드의 덕을 보았을지언정 작가 노상호의 예술적 성취는 사실 혁오밴드 앨범 커버와는 크게 상관이 없다. 무슨 말이냐고? 후후. 여러분과 이 이야기를 하려고 전시회를 다녀왔다. 물론 때마침 초대장을 받기도 했고.


‘아라리오’라는 이름을 가진 전시장은 두 개다. 아라리오 갤러리와 아라리오 뮤지엄. 둘 다 안국역 근처에 있어서 가는 길이 헷갈리기 쉬운데, 정리하자면 옆에 경복궁이 있으면 아라리오 갤러리, 창덕궁이 있으면 아라리오 뮤지엄이다. 둘 다 궁이라서 그래도 헷갈린다고? 어쩔 수 없다. 그럼 나처럼 아라리오 갤러리로 갔다가 아라리오 뮤지엄으로 걸어가면 된다. 땀을 뻘뻘 흘리며 15분 정도를 걸었다. 원래 머리가 나쁘면 몸이 힘든 법이다.


[15분쯤 걸으며 스스로의 멍청함을 한탄하기 시작할 때쯤 보이기 시작하는 아라리오 뮤지엄]

멀리서부터 공간空間이라는 한자가 보이기 시작했다면, 제대로 찾아왔다는 뜻이다. 우리는 아라리오 뮤지엄을 찾아왔건만, 어쩐지 우리를 가장 멀리서부터 반기는 건 공간空間이라는 로고다. 정작 아라리오 뮤지엄이라는 이름은 정문 앞에 당도해야지만 수줍게 나타난다. 이러한 괴리도 우리를 헷갈리게 하는 요소 중 하나지만, 이유는 있다.



아라리오 뮤지엄은 한국 건축에 큰 영향을 미친 건축가 김수근 씨의 대표작이자, 자택이면서, 그의 건축사무소인 ‘공간’의 사무실이었다. 그리고 아라리오 뮤지엄은 건물의 역사적, 예술적 가치를 위해 여전히 ‘공간’의 로고를 남겨두기로 한다. 하긴 예술을 전시하는 전시장이 편의를 위해서 예술적 가치를 훼손한다는 건 조금 말이 이상하긴 하다.



이런 정보를 듣고 온 탓일까. 담쟁이덩굴로 뒤덮힌 붉은 벽돌 건물에서 진한 아우라가 퍼져나오는 것 같다. 아, 왠지 막 동선도 무척이나 좋을 것 같고 생각하지 못한 건축적 장치들도 많을 거 같고, 아무튼 뭔가 건물 자체에 대해서도 기대가 커진다. 전시회를 보러와서 한국 건축의 한 축을 볼 수 있다는 점도 분명 아라리오 뮤지엄의 큰 장점 중 하나다.



외관은 신촌에 있는 모 대학이 떠오르는 고전적인 모습이지만, 내부는 완전히 다르다. 거의 중세 서양의 성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을 주는데, 웅장하면서도 난해하다. 여기가 몇 층이라고 말하기 어렵게 설계되어있는 데다, 동선도 툭툭 끊긴다. 대개 처음부터 끝까지 흐름을 끊지 않도록 동선이 쭉 연결되는 일반적인 갤러리와의 큰 차이다. 다만, 아라리오 뮤지엄에 전시된 작품들은 다소 섬찟하거나 추상적인 작품들이 제법 많아 관람에 피로도가 높은 편이다. 그래서 동선이 끊기는 것이 되려 숨돌릴 시간을 주어서, 관람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이정도는 귀여운 편. 꿈에 나올 것 같은 그로테스크한 작품도 있다]


아라리오 뮤지엄은 상설 전시를 개관 때부터 하고 있다. 노상호 작가의 전시를 보러왔더라도 상설 전시장을 지나쳐야만 도착할 수 있다. 혹시라도 친구를 아라리오 뮤지엄에서 만나기로 하였다면, 반드시 밖에서 만나서 같이 들어가도록 하자. 내부 구조상 친구와 엇갈릴지도 모른다.


[내가 높게 찍은 게 아니라, 성인 남성이 머리가 닿을 정도의 높이의 중층 구조로 되어있다]

여러분께는 정말 죄송하지만, 나는 도저히 이 전시장이 몇 층이고 어떻게 가야 한다고 설명할 자신이 없다. 건물 자체가 중층이 정말 많은데다가, 중간에는 층 구성이 애매한 공간이 워낙에 많다. 어떻게든 설명해보라고 한다면, 4층에서 0.5층을 올라간 다음, 가장 안쪽에 숨겨져 있는 원형 계단을 통해 2층까지 내려오고, 0.5층을 또 내려온 다음, 한번 더 1층을 내려오면 된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믿어도 좋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설명이다. 실제로 노상호 작가도 ‘몇 층에 있다’가 아니라, ‘동선상 마지막에 있다’라고 설명했을 정도다. 다른 전시를 지나쳐서 바로 노상호 작가의 전시에 오고 싶다면, 반드시 지킴이분들께 도움을 청하자.



자, 그렇게 헤매이다 보면 어찌어찌 노상호 작가의 전시장에 도착할 수 있다. 참고로 나는 1층부터 5층까지를 5번이나 왕복하고 결국 지킴이분들께 도움을 받아서 간신히 갈 수 있었다. 도착했을 때 나는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힘들게 전시장에 들어선 여러분을 가장 먼저 반기는 건, 압도적인 크기를 자랑하는 그림이다. 폭 2.2m, 높이 2.7m의 캔버스 천에 유화로 그린 이 작품은 노상호 작가가 빼곡히 채워 넣은 수많은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다.


이 거대한 작품을 천천히 감상하다 보면, ‘어 이거 어디서 본 거 같은데’라는 기시감을 느끼거나 정말로 본 적 있는 이미지가 나타날 수 있다. 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라. 데자뷰가 아니다. 아마 정말로 본 적이 있는 이미지일 가능성이 제법 크다. 노상호 작가는 인터넷의 이미지에서 소재를 찾는다.



노상호 작가에게 인터넷과 SNS는 큰 의미를 갖는다. 그는 매일 인터넷에서 떠도는 하루 치 이미지를 수집하고, 해당 이미지를 재생산해내는 것으로 작품활동을 한다. 그게 어떻게 작품 활동이냐고? 후후, 그럼 더 놀라게 해볼까. 그는 심지어 정확히 9시부터 6시까지만 그림을 그린다. 가끔씩은 야근도 한다. 점점 작가가 아니라 그냥 직장인 같다고? 노상호 작가는 영감이 아니라 시스템을 구축해가는 작가다. 그렇게 ‘시스템’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은 다시 작가의 인스타그램에 업로드되어 사람들에게 소비된다. 그는 이미지를 재생산하는 2차 창작자면서, 그 이미지를 조합해 하나의 예술품을 만드는 1차 창작자인 셈이다.



여러분이 알아서 보시겠지만, 사실 나는 워낙에 작품이 커서 ‘이걸 어디서부터 봐야 하지….’라는 생각을 했다.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한 팁을 주자면, 우선 전체를 보자. 워낙에 많은 이미지가 있다 보니 자꾸 작은 단위로 보게 되는데, 수많은 이미지가 섞여 들어갔음에도 ‘노상호 스타일로 재구성’되어 위화감이 적은 것이 이 작품의 놀라운 점이다. 그리고는 세부적으로 뜯어보면서 ‘어, 나 이거 알아’를 찾아내 보자. ‘월리를 찾아라’같아서 재밌다.



거대한 작품에 익숙해졌을 무렵에야 작품이라는 티를 내지 않아 작품인지도 몰랐던, 벽에 걸린 수백 점의 작품들이 눈에 들어온다. 노상호 작가는 마치 여러분이 옷을 고르는 것처럼 인스턴트하게 작품을 소비할 수 있도록 구성해뒀다. 열심히 준비한 노상호 작가에게는 미안할 따름이지만, 수백 점에 달하는 모든 작품을 하나하나 뜯어볼 수는 없다. 인스타그램 피드에 올라오는 모든 게시물을 다 소비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술술술 넘어가다가 어쩐지 구미가 당기는 작품을 보는 모양새는 마치 SNS를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으로 구현한 것과 같다.


[어디서 많이 본…. 오혁 씨?]


이 ‘옷걸이 형태의 작품’을 보는 방법은 정말로 옷을 쇼핑하는 것과 같다. 마음에 드는 옷걸이를 여럿 들고 비교하며 보다가, 어디고 다시 걸어두면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큐레이션은 무의미해진다. 작가가 준비한 큐레이션에 따라 작품을 관람하게 되는 일반적인 전시와는 달리, 작가가 준비한 온전한 큐레이션을 볼 수 있는 건 이 전시장에 처음으로 들어왔던 관람객뿐이다. 관람객은 자기 마음에 드는 작품들만 들었다 내리다를 반복하면서 수백 점의 작품의 위치를 수시로 바꾸게 된다. 마음에 안드는 작품을 골라들었을리는 없으니, 전시가 진행될 수록 작품은 점차 관람객 각각의 입맛에 따라 뭉쳐있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이 전시는 수많은 취향이 혼재되는 참여형 전시다.



이런 ‘참여형 전시’의 또 다른 예시가 롤러에 연결되어있는 작품이다. 실제로는 2m나 되는 긴 작품이지만, 우리 눈에 보이는 부분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본인 마음에 드는 부분이 나올 때까지 돌려서 관람하게 된다.



이는 ‘작품을 사람들 제멋대로 해석하고, 오해하도록 이야기의 소스(source)들을 준비한다’는 노상호 작가의 철학과도 걸맞는 전시방법이다. 제멋대로 바뀌는 큐레이션에 따라 관람객은 나름의 스토리를 만들기도 하고, 오해를 하기도 하다. ‘내가 지금 이 전시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게 맞나?’라는 생각 따위는 가질 필요도 없다. 여러분이 작품을 어떻게 보건, 그 해석이 바로 정답이다.


[운만 좋으면 노상호 작가를 만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까꿍.]

전시는 800여 점의 크고 작은 액자가 3면을 가득 채우는 공간으로 끝난다. 노상호 작가가 ‘인증샷의 방’이라고 부르는 이 공간을 통해 작품은 또다시 SNS에 올라가고 소비된다. 소재를 인스타그램에서 가져와서 작품을 만들고, 만들어진 작품과 함께 인스타그램에 인증함으로 끝이 난다니. 정말로 인스타그램으로 시작해서 인스타그램으로 끝나는 셈이다.



노상호 작가는 SNS에 기반한, 현대형 작가다. 인스타도 꾸준히 하고, 스토리도 많이 올린다. 인스턴트로 사라질 이미지를 재생산하고, 전시하고, 다시 그 이미지가 SNS에 올라가는 과정을 통해 인스턴트 이미지에 생명력을 불어 넣는다. 자, 초대장을 잘 보면 알겠지만, 전시는 2월에 끝난다. 이제 추석이 지난 마당에 설날도 지나야 끝난다는 뜻이다. 끝나려면 한참 남았으니, 지금이라도 빨리 가보는 건 어떨까.



참, BGM은 혁오밴드의 것이 참 잘 어울리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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