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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에디트 Apr 25. 2019

이런 날엔 하이볼을 마셔야 한다

여름이 왔다

안녕, 여러분 술 이야기해주는 여자 에디터M이다. 지금 난 사무실에서 반팔을 입고 맥북 키보드를 뚱땅거리고 있다. 열어둔 창문 사이로 기분 좋은 바람이 하얀 커튼의 치맛자락을 나부끼게 만드는 오후. 아, 이렇게 여름이 왔다. 이런 날엔 하이볼을 마셔야 한다.



이번 기사는 반응이 뜨거웠던 내가 진짜 하이볼을 말해줄게의 후속작이다. 그때 스크롤 관계상 미처 다하지 못한 산토리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지금은 많이 대중화되었지만, 주머니가 가벼웠던 시절 하이볼은 성공한 대학 선배가 고급 이자카야에 데려가 주어야 맛볼 수 있는 고오급 술이었다. 탄산수 대신 토닉 워터를 넣어 지독하게 달고, 탄산도 약했지만 그래도 바삭한 치킨 가라아게와 함께 마시는 하이볼은 성공한 어른의 맛이 났다.



산토리의 시작은 최근 없어서 못 판다는 재패니즈 위스키의 성공과 맞닿아 있다.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사람의 이름을 기억해야 한다. 산토리의 창업주인 토리이 신지로와 니카 위스키를 설립한 타케츠루 마사타카다.


타케츠루는 일본에서 제대로 된 위스키를 만들어보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위스키의 본고장 스코틀랜드까지 유학길을 떠난다. 그런데 기껏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일본은 출발할 때와 달리 상황이 별로 좋지 않았다. 방황하던 그를 부른 게 바로 일본에서 와인 사업을 하고 있던 산토리의 창업주 토리이 신지로다.



그들을 물맛 좋은 야마자키에 증류소를 만들고 토리이 신지로의 이름에 SUN을 붙여 태양의 아들, 산토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15년의 연구와 몇 번의 실패를 거듭한 끝에 동양인에 입맛에 맞춘 위스키를 출시하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익숙한 가쿠빈이다.


[1937년부터 소나무처럼 한결같은 가쿠빈의 디자인. 거의 변하지 않았다]


산토리 가쿠빈의 시작은 193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앞서 말한 것처럼 15년 동안 일본인에 입맛에 맞춰 연구한 결과였다. 700mL 용량에 각지고 거북이 등껍질처럼 보이는 병은 가쿠빈의 상징이다. 레트로한 감성이 가득 느껴지는 이 디자인은 무려 8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대로 유지되어 왔다.



각진 디자인과 거북이 등껍질처럼 생긴 디자인은 일본의 유리공예인 사츠마 키리코에서 영감을 받았다.


[사츠마 키리코의 예시]


게다가 제품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라벨엔 정작 가쿠빈의 ㄱ도 쓰여있지 않다. 그저 SUNTORY WHISKY라고 쓰여있을 뿐. 브랜드명을 라벨에 적지 않는다니, 무모한 자신감이다. 가쿠빈은 각이진이란 뜻의 일본어에서 왔다. 처음엔 별명이 지금은 이름이 된 셈이다. 하지만 일관된 보틀 디자인 덕분에 이젠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역시 한 우물을 깊게 파는 것이 중요하다.



일본의 버블경제 시기는 위스키가 가장 잘 팔리던 시기기도 했다. 경제에 거품이 끼면 술은 독하고 맑아진다. 사람들은 거품 낀 맥주 대신 고급 진 위스키를 마셨다. 흥청망청 마시던 1980년대 절정을 맞이한 위스키 소비량은 점차 하향곡선을 그리기 시작한다.


당시 일본 젊은이들에게 위스키는 아버지가 마시는 술이란 이미지가 강했다. 40도가 넘는 위스키는 비싸고, 독하고, 또 비쌌다. 산토리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다양한 전술을 펼친다.



그 첫 번째가 바로 산토리의 오리지널리티를 살린 산토리 올드. 영상의 화질은 별로지만 이때의 광고는 다시 봐도 멋지다. 외동딸이 데려온 약혼자를 처음 소개받는 아버지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그리고 예비사위와 산토리 올드를 나눠마신다. 이천 년대 초반의 심야 식당스러운 일본 정서가 잘 묻어난 잘 만든 광고다. 곡성에서 날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던 쿠니무라 준이 츤데레 아버지로 분한다.



하지만 여전히 떠나간 젊은이들의 마음을 잡기엔 부족했다. 산토리 올드로 세대를 이었다면, 또 다른 시도는 하이볼이다. 시작은 50년대였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진짜 하이볼이 본격적으로 사랑받기 시작한 건 2008년부터였다. 젊은 세대들은 점점 도수가 강한 술을 멀리하고 맥주와 일본 소주에 탄산수나 과일 음료를 섞은 츄하이에도 슬슬 질려가고 있던 참이었다. 위스키에 상큼함을 더해줄 레몬과 탄산수를 더해 도수를 8도까지 떨어뜨린 하이볼을 만들기 시작했고, 그리고 본격적인 마케팅을 시작한다.



맥주나 츄하이 대신 하이볼을 마셔야 한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게 생존 전략이었다. 손잡이가 있는 두툼한 잔은 언뜻보면 맥주 500cc처럼 보인다. 하지만 하이볼 특유의 음각 장식은 잊지 않았다. 영리한 마케팅 전략이다. 심지어 서빙하는 방식도 생맥처럼 바꿨다. 덕분에 적절한 탄산과 위스키의 양을 조절하고, 더 빠르고 우리는 더 신선한 하이볼을 마실 수 있었다. 달지 않고 가벼운 맛 덕분에 기름지거나 달거나 짜도 다 잘 어울리는 맛이다. 심지어 맥주보다 칼로리도 낮다. 오예.



배부르지 않고, 달지도 않고, 쓰지도 않은, 도수도 높지 않은 술. 가볍게 이자카야를 찾으며, 싸고 맛있는 맥주와 츄하이 말고 다른 술을 원했던 사람들에게 안주와 함께 먹기 좋은 술이라는 점에서 하이볼은 완벽했다.



산토리의 전략은 성공적이었다. 덕분에 일본에서 위스키 소비량은 점차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정점에는 일본 위스키가 처음으로 출전한 세계 저명한 주류품평회에서 수상을 하면서부터였다.


동시에 2001년 산토리의 싱글몰트 위스키인 히비키, 야마자키, 하쿠슈가 상을 타면서 붐이 일었다. 당시 산토리 내부적으로는 도저히 판매가 되지 않아 판매를 잠정 중단한 상태였다. 위스키는 시간이 만드는 술이다. 싱글몰트 위스키는 숙성하는데 10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 덕분에 딱 10년이 흐른 지금, 그때 산토리가 만든 히비키, 야마자키, 하쿠슈 등의 싱글몰트 위스키는 프리미엄을 붙여야만 구할 수 있는 귀한 술이 되었다.



지금 이렇게 산토리의 프리미엄 위스키가 인기를 끈 이유를 단순히 물량의 문제만으로 설명할 순 없다. 맛있기 때문이다. 물 좋기로 소문난 곳에 위치한 증류소 덕분에 깔끔하고 향이 좋다. 일본 특유의 장인 정신이 발휘해 다양한 시도와 증류기의 모양 등 혁신을 위한 끊임없는 시도, 규정이 없는 것등 오직 최고의 맛을 위한 노력이 바로 지금의 재패니스 위스키를 만든 것이다.



산토리는 최근 미국의 짐빔. 메이커스 마스,스코틀랜드의 라프로익까지 인수해 이제 어엿한 세계 3위의 위스키 생산국이 되었다. 술에 대한 확고한 철학을 가진 브랜드가 있다는 건, 정말 부럽고 멋진 일이다. 공부하면 할수록 산토리에 점점 더 관심이 생긴다.



우리나라에서 하이볼은 이제 막 날개를 펴는 중이지만, 일본에서는 자연스럽게 마시는 술이 다. 어느 날 반짝 뜬 것처럼 보여도 산토리의 성공에는 벌써 100년이 넘은 한결같은 고집이 있기에 가능했다.



술의 기본은 맛이다. 마케팅 혹은 새로운 레시피는 모두 부가적인 것이다. 탄산을 넣어 도수를 낮추든, 한 방울까지 장인 정신을 갈아 넣은 싱글몰트 위스키든 간에 한 잔의 술에 담긴 이야기는 언제나 달콤하고 흥미롭다. 오늘 에디터M의 산토리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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