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스포일러를 싫어하는 에디터B다. 나에게는 한 가지 루틴이 있는데,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얘기에 공감할 거다. 연초가 되면 어떤 영화들이 올해 개봉하는지 체크하게 되는데, 세 사람은 반드시 확인한다. 봉준호, 김지운, 박찬욱. 그러니 작년에 <인랑>을 기다렸다가 무너진 내 마음을 잘 알겠지? 아무튼, 올해에는 봉준호의 작품이 개봉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연초부터 설렜다. 봉준호 감독은 3년에 한 작품씩 찾아와서 더 애틋하게 하는데, 갑자기 TV와 인터넷에 봉준호에 대한 뉴스로 도배된 거다. ‘봉준호,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
그렇다. 오늘은 영화 <기생충>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영화도 보고 왔겠다 리뷰를 하려고 했는데, 봉준호 감독이 기자들에게 편지까지 쓰면서 스포일러 하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를 했더라. ‘아, 감독님 알겠어요’ 그 당부 때문에도 스포 조심을 다짐했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니까 정말 정말 0.01도 입방정을 떨지 말아야겠더라. 잡담은 <기생충>을 이미 본 사람들만 모이는 오픈채팅방에서 하려고.
<기생충>은 자본주의 사회, 대도시 서울에 사는 두 계급의 충돌을 다룬 블랙코미디다. 반지하에 사는 기택(송강호) 가족, 대저택에 사는 박 사장(이선균) 가족이 그 주인공. 기택의 가족은 전원 백수 상태인데, 그의 아들 기우(최우식)에게 고액 과외 자리가 들어오고 고정 수입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여기까지가 포털 사이트의 영화 소개란에서 볼 수 있는 공식적인 줄거리다. 나는 찢어지게 가난한 상황에서도 해맑을 가족들을 보니 피식피식 웃음이 나오더라. 그런데 마음 한 켠에는 스멀스멀 불안감이 피어나고. 그 불안감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도 사라지지 않았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당연히 송강호 가족이 기생충이겠지?’ 생각했는데, 영화가 끝나고 나서는 ‘누가 기생충이지?’ 묻게 되더라.
나는 <기생충>이 황금종려상을 받았다고 해서 봉준호 최고의 작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영화를 보는내내 느꼈던 그 불안감을 또 다시 느껴보고 싶더라. 자, 여기까지. 나는 더 이상 얘기하지 않겠다. <기생충> 얘기는 딱 여기까지만! 대신에 봉준호에 대한 얘기를 해볼까 한다. <기생충> 보기 전에 한 번 읽으면 더 재밌게 볼 수 있거든.
내가 봉준호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건 <살인의 추억>(2003) 때문이었다. 그 전에 아파트에서 실종된 강아지를 찾는 영화 <플란다스의 개>(2000)로 데뷔를 하긴 했지만, 아쉽게도 흥행하지는 못했으니까. 그리고 2000년이면 내가 아직 초등학생 때라 알기도 힘들었고.
나는 <살인의 추억> 비디오테이프를 빌려 친구들과 집에서 봤다. 무서운 영화인 줄 알았는데, 웃겨서 어이없었다. 화성연쇄살인 사건을 모티브로 삼아서 줄거리만 읽어 보면 웃을 일이 전혀 없는데, 진지한 장면에서 계속 피식하게 만드는 거다. 송강호가 논두렁에서 날아차기를 시전하며 “여기가 강간의 왕국이냐”하는 장면이나 백광호에게 미안하다고 나이키 운동화를 선물하는데 알고 보니 나이스 운동화라는 거나. 풉.
당사자들은 한없이 진지한데 보는 관객들은 웃음이 새어 나오는 장면들. 특히, 중요한 순간에 실수를 하는 방식은 봉준호 시그니처이기도 한데, 프랑스 영화 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와 인터뷰할 때 그런 걸 ‘삑사리’라고 표현했더라. 물론, 농담처럼 쓴 단어였지. 그런데 나중에 잡지에 ‘Arts of Piksari’라는 헤드라인으로 나와서 다소 민망했다고. 삑사리의 미학이라니. 크크.
봉 감독 작품 중에 아마 제일 많이 알려진 영화는 <괴물>(2006)이겠지? <괴물>에서 박해일이 화염병을 던지려는 결정적인 순간 삐끗하고 넘어진다든지, 송강호가 괴물을 피해 도망치려는 순간 딸이 아닌 다른 여자아이의 손을 잡는 게 다 ‘삑사리의 미학’인 셈이다.
칸영화제에서 <기생충>을 보고 외신 기자들은 ‘봉준호는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라고도 평했던데, 정말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말이다. <설국열차>(2013), <괴물> 같은 영화도 그렇고 <기생충>을 생각하면 도저히 하나의 장르에 가둘 수는 없으니까.
매번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가 영화 마니아여서가 아닐까 생각했다. 예전에 봉 감독이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제가 찍고 싶은 영화는 제가 보고 싶은 영화예요”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미 수많은 영화를 본 사람이 봤던 것과 비슷한 영화를 만들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그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지. 그래서 봉준호 영화를 보면 익숙하다거나 진부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이 아닐까.
봉준호에 대해서 찾아봤다. 대학생 시절에는 ‘노란문’이라는 영화 동아리에서 활동을 했더라. 같이 모여서 스터디 같은 걸 했는데, 다음 주제가 ‘살인’이면 수많은 영화들의 살인 장면을 같이 보면서 비교 분석했다고. 그의 반짝이는 영화들은 그냥 뚝딱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거다. 나는 그가 천재여서 영화를 만든 게 아니라 영화를 좋아해서 만들 수 있었다고 말하고 싶다.
봉준호는 이번에 황금종려상 수상으로 봉도르(황금종려상이 불어로 팔름도르)라는 별명을 얻기는 했지만, 사실 봉테일이라는 별명이 더 유명하다. <살인의 추억>, <괴물>, <마더>(2009)를 같이 작업한 류성희 미술감독이 지은 별명인데, 엄청나게 섬세한 디렉팅 때문에 그렇게 불렸다고 한다.
이번 <기생충>만 하더라도 조여정이 이런 일화를 공개했다. 연교 역의 조여정이 글씨를 쓰는 장면이 있었는데 “연교는 그런 방식으로 연필을 잡지 않을 것 같다”면서 펜 잡는 동작까지 디렉팅했다는 거다.
봉준호의 페르소나라 불리는 송강호는 그의 세심한 연출에 대해 이렇게 말하더라. 봉준호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정교하게 계산되어 있어서 배우가 카메라 앞에서 시공간을 메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없어진다고. 크으으. 멋진 감독과 그걸 또 멋있게 말하는 배우라니. 편하게 접근할 수 있다 보니 필요 이상의 안 좋은 연기를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더라. 배우들 얘기가 자연스럽게 나왔으니 봉준호 사단에 대해서 잠깐 얘기를 해볼까. 시작은 당연히 송강호.
이번에 뉴스를 보면서 나의 시선을 확 끄는 사진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요거. 봉준호가 송강호에게 무릎을 꿇고 트로피를 바치는 장면이다. 활짝 웃는 두 사람이 너무 멋있다. 이게 바로 우정의 아름다움이지.
송강호는 <살인의 추억>, <괴물> ,<설국열차>, <기생충>까지 네 번이나 출연했는데, 지금까지 봉 감독이 연출한 상업영화가 총 7편이니까 절반 넘게 출연을 한 셈이다. 봉준호의 페르소나라는 호칭에 “겸손한 척하는 게 아니라 진짜 내가 그런 소리를 들어도 될지 자격이 되는지 스스로 의문이 든다”고 겸손하게 말했지만…음, 정말 겸손한 말이다. 코믹함과 절박함을 몇번이나 오가는 그런 연기를 송강호 말고 누가 그렇게 맛깔나게 할 수 있을까.
봉준호 월드의 단골 손님들은 송강호 외에도 꽤 많다. <괴물>로 데뷔한 고아성은 <설국열차>에 다시 출연했고, 박해일, 배두나 역시 두 번씩 나왔다. 틸다 스윈튼도 역시 두 번. 변희봉은 네 번이나 이름을 올렸다.
봉준호 영화에 출연한 배우 중 어떤 배우는 다른 작품에서는 연기논란에 시달리기도 하는데, 신기하게도 봉준호와 함께하는 순간만큼은 레전드 연기를 하고 나온다. 이것 역시 그의 영화를 매번 기다리게 되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그게 다 캐릭터에 맞는 배우를 볼 줄 아는 감독의 능력이고, 연기를 끌어내는 연출자의 능력이니까.
봉준호는 변희봉을 몇번이나 찾아가서 <플란다스의 개> 출연 섭외를 했으니 데뷔작 때부터 이미 사람 보는 눈이 있었던 거다. 변희봉이 지금은 명품 배우로 인정을 받지만 당시에는 단역 배우를 전전하며 배우 생활을 접어야 하나 고민하던 시기였으니까.
따끈한 국물을 한 숟갈 떠먹은 뒤 고운 목소리로 “그래, 이 맛이야” 하던 김혜자가 <마더>에서 그런 역할을 맡을 줄 누가 알았을까(스포일러 때문에 더는 말 못 함). 어디 그뿐인가. “얼마면 돼, 얼마면 되겠어.”라며 잘생긴 이목구비로 가격을 문의하던 원빈의 바보연기는 또 어떻고.
<기생충>에도 새로운 배우들이 대거 출연했다. 박소담, 최우식, 조여정, 이선균, 이정은 등. 연기자 00씨의 엄청난 연기에 대해 말하고 싶은데 약간의 힌트도 스포일러가 될 거 같아서 아예 언급하지 않으려 한다. 휴. 정말이지 입이 근질거린다.
<기생충>이 개봉한 날 조조로 봤는데 관객석이 1/4 정도 차 있었다. 이번 주에는 딱히 경쟁작도 없으니 주말에는 다들 <기생충>을 보지 않을까 싶다(<고질라: 킹 오브 더 몬스터>를 무시하는 말은 결코 아니다).
혹시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영화라고 해서 너무 어렵지 않을까 주저하는 사람이라면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예전에 어떤 기자가 <괴물>을 두고 반미영화, 반자본주의영화로 해석된다고 하니까, 봉준호가 “에이, 무슨 반자본주의예요. 그냥 재미있는 괴수영환데”라고 한 적이 있다. 봉준호는 항상 재미있는 영화를 만든다. 의미는 그다음에 생각할 일이고. 자, 이제 <기생충>을 보러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