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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에디트 Oct 07. 2019

‘시칠리아 세끼’를 위한 플레이리스트

이탈리아 여행자를 위한 플레이리스트(feat.음악평론가)

안녕, 디에디트 필자의 평균 연령 상승에 크게 기여하는 차우진이다. 디에디트가 갔다. 농담인 줄 알았는데, 정말로 갔다… 시칠리아라니… 디에디트… 정말로! 시칠리아로! 한 달이나! 일하러! 가버리다니!


TMI 필자답게 이야깃거리를 풀어내 보자. 시칠리아 말고 로마라면 나도 얘깃거리가 있기는 하다.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인 2009년 어느 날, 영어로 된 메일을 한 통 받았다. 스팸인가? 라기엔 제목도 꽤 정중해서 열어봤더니 그 메일의 주인은 자신을 로마에서 일하는 50대 변호사라고 소개하고 있었다. 두 명의 딸을 둔 이 중년 아저씨는 10대 초반의 둘째 덕분에 K-POP을 접했다고 했다. 처음엔 그저 자신의 딸들이 동양의 가수를 좋아한다는 게 신기방기해서 뮤직비디오를 몇 번 함께 봤다고 했다.


그러다가 이 어르신이 그만 입덕해버린 것이다. 특히 소녀시대와 2NE1을 좋아한다며, 그리 정확하지 않은 10년 전의 구글 번역기를 돌려가며 커뮤니티도 들어가고, 한국의 연예 뉴스도 읽어보다가 문득, 걸그룹 멤버들이 사실상 자신의 딸들과 같은 또래라는 점에 직업적 전문성이 더해져서 그들의 노동환경이 과연 얼마나 적법한지 등이 무척 궁금하고 걱정스러워진 것이다. 그래서 당시 한창 아이돌, K-POP, 걸그룹, 미디어에 대한 글을 자판기처럼 뽑아내던 내 이름을 우연히 발견하고는 굳이 그렇게 구구절절한 메일을 보낸 것. “어떻게 생각합니까? 당신은, 노동환경에 대해서, 한국 걸그룹 대다수의” 같은 제목 아래로 이어지던 꽤 길고 자세한 질문들.


구글 번역기를 써가며 이렇게 저렇게 답장을 보낸 기억이 난다. 사실 무척이나 신기한 일이었다. 어쩌다가 그에게 내 이름이 들어왔을까 싶다가 문득, 로마에는 얼만큼의 K-POP 팬덤이 형성되었을까, 왜 유럽에서 불현듯 K-POP이 인기를 끌까 하는 생각을 했으니까. 그런데 몇 년 뒤, 거짓말처럼 SM엔터테인먼트가 파리에서 콘서트를 열고, KBS의 <뮤직뱅크>는 도쿄돔 공연을 진행했다. 사람들은 이것을 ‘신한류’라고 불렀다. 지나 보니 나로서는 이미 2009년에 ‘신한류’의 어떤 징후를 접하게 된 셈이었다.


이것이 바로 조만간 시칠리아로 떠난다는 에디터 M에게 내가 해준 이야기다. “음, 그런데 우진 님도 뭔가, 이탈리아와 접점이 있을까요?”라고 묻던 그의 어투는 어째서인지 “느 집엔 이거 없지?”라고 묻는 점순이 같기도 했다. 감자, 아니 이탈리아라면 나도 있다 뭐, 라는 심정으로 해준 말이었지만, 그래요, 기분 탓이겠지요.

아무튼, 그렇게 시칠리아로 떠난 디에디트 멤버들을 위해 특별히 엄선한 플레이리스트를 공유한다. 시칠리아에 간 세끼, 아니 어머머, 발음에 주의하시고, 앞으로 한 달 동안 시칠리아에서 매일 세 끼를 먹게 될 디에디트 멤버들을 위한 음악들. 세 끼라서 당연히 세 개의 플레이리스트, 이왕이면 각 30곡씩, 사실은 매일 야근하는 와중에 질투심 아니, 영혼을 갈아 넣은 선곡.


[*편집자주: 그렇게 디에디트는 시칠리아에서 차우진 님의 리스트를 들으며 행복하고 아주 풍요롭게 지내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저희와 함께 차우진 님의 플레이리스트를 즐겨주세요]

시칠리아 한 끼


자, 이제 이분들은 시칠리아에서 한 달간 아침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물론 기상 시간이 언제인지가 중요하겠지만, 부디 이들이 거기에 놀러 간 게 아니라 일하러 갔다는 점을 잊지 않길 바랄 뿐. 그래, 아무리 시칠리아면 뭐하나, 눈뜨면 집이 아니라 직장인데. (풉)


왠지 여러모로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디에디트의 에디터들에게 이 음악들이 아편 같은 플레이리스트가 되면 좋겠다. 여기가 휴양지인지 일터인지 헷갈린 채로 시칠리아 황소처럼 걱실걱실 일할 수 있게. 그래서 Monsune, Lizzo, Black Pumas, The Teskey Brothers, Kevin Morby 같은 레트로하고 마일드한 무드의 알앤비, 소울과 훵크 위주로 골라봤다. 물론 시칠리아니까 이탈리아의 국민 가수인 Fabrizio De Andrè의 곡도 하나 넣었다. 이외에 Yumi Zouma나 Peggy Gou 같은 캐치한 팝과 SYML처럼 어쿠스틱한 인디 팝도 슬쩍 꽂아놨으니 그냥 소처럼 즐겨주시길.




시칠리아 두 끼


시칠리아의 낮은 길다. 확인해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뭐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한다. 휴양지니까? 그러니 디에디트 식구들은 시칠리아에서 느즈막이 일어나 아침 겸 점심, 그러니까 브런치 같은 걸 먹고 티타임을 가지기는 개뿔, 허둥지둥 일어나서 대충 씻고 마감이나 하겠지. 그 와중에 점심 설거지를 누가 하느냐 눈치 싸움이 치열할 것만 같다. 그때 들으면 좋을 음악이라고 장담한다. 오후 1시부터 틀어두면 특히 좋지 않을까. 이역만리 고국 땅이 그리워질 만큼 나른하고 몽환적인 보사노바, 사이키델릭, 드림팝으로 엄선했으니까.


Bon Iver, London Grammar, Chet Faker, Agnes Obel, Ólafur Arnalds, Angus & Julia Stone 같은 익숙한 이름들 틈에 Maye, Tusks, Ben Howard, Mansionair, Brahny, Bahamas, Current Joys, Wolf Alice, Arab Strap처럼 조금 낯선 이름들도 놓치지 마시길. 특별히 마지막 곡은 민수로 마침표를 찍었다. 아, 그런데 하긴 시칠리아까지 갔는데 그 좋은 동네에서 오후 내내 집구석에 눌러앉아 있을 리가…



시칠리아 세 끼


자, 이제 저녁이다. 해가 지기도 전에 모든 가게가 문을 닫아 밥을 먹을 곳도, 술을 마실 곳도 없는 도시에서 술 좋아하는 걸로 유명한(?) 디에디트 멤버들은 에어비앤비 숙소 거실에서 술판을 벌일 거라는 데 나의 원고료 1%를 건다. 집에도 못 가고, 아니 정확히는 돌아갈 집도 없이 대표님과 밤새 술 마시다 잠들어야 할 에디터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담은 선곡이다. 그렇게 취해서 잠도 못자고 커피나 들이마시며 마감이나 하겠지. 그러다 문득 내 인생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 것이다. 아암, 그렇고말고. 그럴 줄 알고 무시무시한 현실을 잊게 해 줄 음악을 골랐다. 사실 회사 대표와 24시간을,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 달이나 보낸다는 건… (읍읍)


Miles Davis, Charles Mingus, Yaron Herman Trio, Bill Evans, Chet Baker 같은 재즈 아티스트들 외에 Sasha Sloan, Kool & The Gang, Bobby Caldwell, Novo Amor, Aurora처럼 팝, 포크 싱어들도 골랐다. 만취를 유도하는 Jeff Buckley, Tracy Chapman, Don McLean도 잊지 않았지만, 특히 고국에 대한 향수를 자극할 만한 가요도 일부러 많이 골랐다. 카더가든, 백예린, 도시, 프롬, 검정치마, 그리고 인순이. 캬, 인순이라니…! 부디 즐거운 밤을 보내시길.



+부록


만약 내가 시칠리아 같은 곳에서 한 달을 머무른다면 도착하자마자 곧장 이걸 들었을 거다. 내 10대의 어떤 날들을 통째로 훔쳐간 피비 캐츠의 “Paradise”. 친구들이 브룩 쉴즈 좋아할 때 나 홀로 연모했던 그녀… 네? 그래요. 저는 빼박캔트 옛.날.사.람.입니다.


Phoebe Cates – Paradise (Discoring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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