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난 디에디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책 얘기를 하게 된 객원필자 기명균이다. 평일엔 퍼블리를 위해 남이 쓴 글을 읽고, 주말엔 디에디트를 위해 내가 읽은 것에 대해 쓰고 있다. 이번엔 제목이 흥미로운 다섯 권을 골랐는데 장르는 자기계발, 경영, 예술, 글쓰기, SF 등 제각각이다.
만약 비관론자가 다섯 권을 요약하면 ‘XX하는 법, 그딴 건 없다’일 것이다. 하지만 낙관론자가 요약하면면 좀 길어지겠다. ‘우리 각자의 XXX만 찾아도 추하게 늙지 않고 늦깎이 천재로 성공할 수 있을 거야.’ 아, 어쩌면 비관론자의 삶이 더 행복할지도 모르겠다.
“깊게 팔 우물 하나를 찾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여러 우물을 파게 된 당신에게”
이 책의 띠지는 잘못됐다. 흥미를 끌어 구매를 유도하기는커녕 오히려 훼방을 놓는다. ‘늦깎이 천재들의 비밀’이라는 제목을 보고 ‘혹시 나도?’ 하는 희망을 품었다가 띠지에 큼지막하게 붙어 있는 두 개의 이름을 보고 팍 김이 샜다. ‘에이, 페더러가 무슨 늦깎이야…’
실제로 서문에서는 골프 선수 타이거 우즈와 테니스 선수 로저 페더러를 각각 ‘조기 전문화’와 ‘늦깎이 전문화’ 사례로 소개한다. 우즈는 걸음마를 배우면서 동시에 골프채를 휘두르기 시작했는데 페더러는 10대 중반이 되어서야(?) 테니스를 집중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래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 알겠는데, 우리가 기대한 ‘비밀’은 그런 게 아니란 말이다. 스물 혹은 서른을 훌쩍 넘어버린 우리에게 희망적인 얘기를 들려달란 말이다. ‘전문화된 세상에서 늦깎이 제너럴리스트가 성공하는 이유’라는 부제처럼.
다행히 서문을 지나면 기대했던 내용이 등장한다. ‘늦깎이’보다는 ‘제너럴리스트’가 이 책의 핵심에 더 가깝다. 우리는 대부분 ‘스페셜’한 뭔가를 찾지 못해 원치 않는 제너럴리스트가 된 케이스다. 이젠 뭘 시작해도 ‘늦깎이’ 취급을 받는 제너럴리스트. 그래서 일찍부터 자기 길을 찾아 한 우물만 파온 사람을 보며 부러워하고, 그러지 못한 스스로를 자책하는 데 익숙하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면 그럴 필요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풍부한 사례와 연구 결과 덕에 ‘이것저것 손대다 늦깎이가 되어버린 제너럴리스트가 일찍이 한 우물만 판 사람보다 성공할 확률이 높다’라는 파격적인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박명수의 개그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이미 너무 늦었다’는 그의 말은 틀렸다. ‘너무 늦은 때’ 같은 건 없다.
<늦깎이 천재들의 비밀> 데이비드 엡스타인 | 열린책들 펴냄 | 20,000원
“날카롭고 예민해서 사람 피 말리는
천재 CEO 이야기에 질렸다면”
넷플릭스는 요 몇 년간 가장 성공한 기업 중 하나다. 그런 넷플릭스의 창업자 마크 랜돌프가 회고록을 냈는데 책 제목이 <절대 성공하지 못할 거야>라면, 살짝 식상한 스토리 라인이 그려진다. 주인공 M은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갖고 있다(발단). 그러나 너무 시대를 앞서가다 보니, 사람들은 대부분 ‘실패는 불 보듯 뻔하다’며 M을 무시한다(전개). 오기가 생긴 M은 탁월한 재능을 발휘해(절정),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크게 성공한다(결말).
그런데 책을 펴자마자 보이는 ‘작가의 말’에서부터, 스토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절대 성공하지 못할 거라고 말했던 아내 로레인에게. 내 사업 구상은 믿지 않았지만, 나를 항상 믿어줬다는 사실은 알아. 사랑해.” 넷플릭스 창업 이야기가 이렇게 로맨틱할 일인가?
책을 읽다 보면 이 로맨틱한 몇 줄에 사업가 마크 랜돌프의 탁월함이 숨어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의 탁월함은 피드백을 받아들이는 자세에 있다. 작가의 말을 다시 보자. 그는 ‘사업 구상’에 대한 피드백과 ‘나’에 대한 믿음을 구분할 줄 안다. 그래야 피드백에 초연할 수 있고, 불필요한 감정 소모 없이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다. 이러한 태도 덕분에 그는 공동 창업자이자 합리적인 조언자 리드 헤이스팅스로부터 받는 피드백을 매번 꼼꼼히 검토하고, 문제점을 찾아 개선할 수 있었다.
리드 헤이스팅스가 우리의 주인공 마크 랜돌프를 앉혀놓고 ‘왜 당신이 CEO로 적합하지 않은가’에 대한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결국 직급을 강등시켰다는 이야기는 가혹하다. 하지만 그때도 마크 랜돌프는 ‘듣고 보니 맞는 얘기 같아서’ 그냥 받아들였다고 한다. 넷플릭스를 그만둔 그가 앞으로 늘 성공 가도를 달릴지는 모르겠으나, 절대 불행하지는 못할 것 같다.
<절대 성공하지 못할 거야> 마크 랜돌프 | 덴스토리 | 18,000원
“심너울 작가의 첫 번째 책 제목은
<땡스 갓, 잇츠 프라이데이>입니다.”
신예 소설가의 두 번째 책이 나왔다. 알라딘의 메인, 그것도 ‘편집장의 선택’ 코너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 소설깨나 읽는다는 트위터에서는 이미 베스트셀러다. 제목도 후킹하다. 저 제목을 보고 책을 안 사면 ‘나도 왠지 저렇게 추하게 늙고 말 것만’ 같다. 사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될 때, 당신의 선택은?
1)그냥 산다: 그냥 사자니 집에 쌓여 있는 읽다 만 책들이 눈에 밟히는데?
2)그냥 안 산다: 그냥 안 사자니 다들 좋다고 난리인데 왠지 뒤처지는 느낌이 들어서 찝찝한데?
3)작가의 첫 번째 책을 사서 읽어본다: 나도 좋고 작가도 좋고 아무튼 이래저래 좋았던 거야.
그래서 심너울 작가의 첫 번째 책을 읽었다. 올해 1월 출간된 단편집으로, 짧은 분량의 단편 5편을 모았다. 얇고 가벼워서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후루룩 다 읽어버렸다. 지금부터 스포주의. 마포구 일대의 ‘소리’가 없어지고, 경의중앙선에 정체 모를 좀비가 등장하고, ‘월화수목금금금’이 현실이 된다. 그리고 빨간 용과 보라색 용이 막 불 뿜으며 싸우고, 용과 인간 사이에 우정이 싹트고, 용이 유튜브에 중독된다. 이렇게 요약해 놓으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심너울 작가는 진짜처럼 들려준다. 마치 작년 여름에, 지난 주말에 자기 동네에서 일어난 일처럼. 뻥을 뻥 같지 않게 치는 게 소설가의 일이라면, 그는 충분히 자기 일을 잘 해냈다.
신예 소설가의 두 번째 책을 샀다. 수록된 단편 수가 9편으로 늘어서인지 좀 더 두껍다. 추하게 늙지 않을 것을 다짐하는 제목이나 굿즈로 딸려온 부채에 적힌 문구 ‘진짜 퇴근하고 싶다’나 여전히 리얼한데, 여전히 SF다. 다 읽고 나서 드는 생각, ‘언제 나올진 모르지겠지만, 그의 세 번째 책은 고민 없이 사련다.’
<나는 절대 저렇게 추하게 늙지 말아야지> 심너울 | 아작 | 14,800원
“아는 만큼 보인다? 알아야 할 것은
미술 지식이 아니라 그림을 본 순간의 내 감정.”
미술이라면, 나는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다. 초딩 때 나의 미술 시간은 죄다 흑역사였다. 준비물을 안 챙겨와서 2시간 내내 먼 산만 쳐다보다, 결국 과제를 완성하지 못해 징벌성 ‘나머지 공부(나머지 그리기?)’를 하기 일쑤였다. 덕분에 수채화, 포스터컬러, 서예, 동판화, 찰흙과 조각칼 등 미술 시간에 주어지는 어지간한 과제에는 죄다 트라우마가 생겨버렸다. 달라져야 했다.
중학교에 입학한 후 첫 번째 미술 수업. 각오는 남달랐다. 미리 전달받은 준비물도 잊지 않고 꼼꼼히 챙겨왔다. 스케치북과 4B연필을 책상 위에 꺼내놓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성큼성큼 교실에 들어선 미술 선생님은 예상대로 ‘자기 손 그리기’ 소묘 과제를 내주셨다. 손 모양은 자유였다. 주위 친구들은 대부분 가위, 바위, 보 중 하나를 택하거나 엄지를 세우고 ‘따봉’을 그렸다. ‘저건 너무 무난하잖아. 좀 특별한 포즈 없을까?’
정말 잘해보고 싶었던 나는 아무도 선택하지 않은 손 모양을 택했다. 난이도가 높으면서도, 당시 열세 살짜리에게 익숙했던. 세 번째 손가락만 펼치고 나머지 손가락은 모두 오므린, ‘설마 그거’ 맞다. 나는 최하점인 D를 받았다. 지금 생각하면 뺨 안 맞고 넘어간 게 다행이지만, 당시엔 몹시 억울했다. 미술 잔혹사는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우리 각자의 미술관>은 작품을 마주한 순간의 신체적·정신적 반응이 회화 기법이나 미술사 계보를 이해하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말한다. 실제로 특정 그림을 보여주고 무슨 감정을 왜 어떤 이유로 느꼈는지 묻는 방식으로 책이 구성되어 있다. 막막해하는 독자를 고려해 300여 가지의 다양한 감정이 제시된 ‘감정 낱말 목록’도 책에 수록되어 있다. 셋째 손가락을 본 선생님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내가 기대한 건 ‘발칙한’, ‘흠칫하는’, ‘기막힌’이었으나 선생님은 아마 ‘어이없는’, ‘괘씸한’, ‘모욕적인’ 기분을 느끼셨을 것이다. 선생님, 죄송해요.
<우리 각자의 미술관> 최혜진 | 휴머니스트 | 15,000원
“첫째, 뻔뻔하다. 둘째, 잘 쓴다.
글에 대한 글(책에 대한 책)을 쓰는 사람의 2가지 특징”
일상적인 대화에서 쓸데없이 반전 효과를 노리는 사람들이 있다. 넌 나한테 과분할 만큼 너무 좋은 사람이지만… (우리 헤어지자). 그동안 너무너무 열심히 잘해주셨지만… (내일부터는 출근 안 하셔도 됩니다). 이 책 제목도 그렇다. ‘글 잘 쓰는 법, 그딴 건 없다’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없다’가 아니라 ‘없지만’이었다. 결국 글 잘 쓰는 법 같은 건 없지만, 자기는 글을 잘 써서 책까지 냈다는 자랑이다. 짜증 나서 읽지도 않고 사무실 책상 한쪽에 처박아뒀다.
사무실 책상에 앉아 나는 주로 누군가 쓴 글을 감히 고쳐 쓰거나 고나리질을 한다. 그 ‘누군가’들은 대부분 나보다 잘난 사람들이라,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가끔 주눅이 들 때가 있다. ‘내가 손대서 글이 더 망가지면 어떡하지?’ 그럴 땐 ‘글 잘 쓰는 법, 그딴 게’ 절실해져서 짜증나 처박아둔 책도 들춰봐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들춰 보니 저자는 ‘글 잘 쓰는 법, 그딴 건 없다’ 쪽이다. 납득은 된다. 레시피대로만 하면 김치볶음밥 정도는 맛있게 만들 수 있고 정육면체 큐브 퍼즐도 공식만 달달 외우면 맞출 수 있지만, 유명 작가들의 글 잘 쓰는 법을 아무리 따라 해도 글을 잘 쓰기는 어려우니까. 그럴 바엔, 그냥 ‘내가 읽고 싶은 글’을 쓰라는 논리다. 그러다 운 좋으면 잘 쓰게 될지 모른다고…. 이런 무책임한 사람 같으니.
하지만 글 잘 쓰는 법에 대한 힌트는 얻었다. 아무리 따라 해도 남처럼 글을 잘 쓰기는 어려우니까, 그냥 자기가 가장 잘 쓸 수 있는 글을 쓰는 것이다. 내일은 이렇게 고나리질해야지. “OO님, OO님이 가장 잘 쓸 수 있는 글을 써주세요. 퍼블리 독자들은 그걸 원해요.”
나름 생산적인 독서였다 싶어 산뜻하게 책을 덮었는데, 표지 일러스트 밑에 약 올리듯 붙어 있는 문구 때문에 또 한 번 얄밉다. “저는 그냥 제가 즐거워서 쓰는데요…?” 그래, 니 잘났다.
<글 잘 쓰는 법, 그딴 건 없지만> 다나카 히로노부 | 인플루엔셜 | 14,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