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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희 Jun 01. 2018

선의를 믿게 하는, 김한나

그녀는 어떤 선의를 품으며 살고 있을까

언니와 이야기하다 보면 이상하게 선의라는 걸 믿게 된다. 해맑게 웃는 얼굴로 작은 행복을 논하는 것부터 국제 이슈들에 대한 책을 읽고 사람들과 논하는 것, 해외와 국내 봉사를 다니는 것, 나아가 그쪽 일을 하고 대학원을 가는 것까지. 지난 8년간 봐온 언니는 천천히, 하지만 꾸준히 본인만의 방법으로 좀 더 나은 세상을 꿈꿨다. 

자주 만나진 못했지만 따뜻한 말 한마디가 절실히 필요한 순간이면 꼭 언니가 떠오르곤 했다. 그리고 나에게 내어줄 마음의 여유는 언제나 마음 한 켠에 품고 있는 언니였다. 그런 마음으로 나는 요 몇 달간 언니를 참 많이도 찾았다. 그러다 문득, 내가 아닌 언니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그동안 언니는 어떤 선의를 품으며 살아왔을까.


<사소한인터뷰> 226번째 주인공, 김한나




Q. 안녕! 먼저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해.

지금의 나는 소소한 행복을 애정하는 사람이야. 거기에 더해, 국제개발학을 전공하고 있는 박사과정생이라고 소개하고 싶어.

Q. 본인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소소한 행복러.

Q. 어떤 게 소소한 행복이야?

사람들이 행복이라고 하면 멀리 있는 거라고 생각하잖아. 근데 나에게 행복은 되게 가까운 것들이야. 예를 들어 아침 햇살이 좋다거나, 학교 가려고 집에서 나왔는데 하늘이 예쁘다거나, 공부를 열심히 하고 마시는 커피가 너무 맛있는 것과 같이 일상 속에서 누릴 수 있는 것들 말이야. 이런 작은 행복들이 돈 많이 벌고 성공하는 식의 큰 행복보다 더 좋아.

- 큰 행복도 애정..하지?

그럼 당연하지. 나도 돈 많이 벌고 싶고 50평대 집에서 살고 싶고 외제차도 몰아보고 싶어.^^^^

- 언니는 스스로 어떤 포인트에서 행복을 느끼는지 알고 있는 것 같아.

응 알아. 나는 날씨와 음악의 영향을 많이 받는 사람이야. 
특히 햇살을 좋아해. 밝은 기운을 좋아하거든. 가장 행복한 순간은 햇살 좋은 날, 음악 들으면서 여유롭게 걸을 때!




Part 1. '이타주의자'라고 불리기 싫은 이타주의자


Q. 페이스북 프로필을 보니 '공부해서 남 주고픈' 사람이라고 본인을 소개하더라고. 그렇게 적은 이유가 뭐야?

사실 아까 나를 한마디로 표현할 때 '공부해서 남 주고픈 소소행복러'라고 하고 싶었는데, 너무 오글거려서 못했어.(웃음) 

보통 부모님들이 "공부해서 남 주냐, 공부하면 다 네 거다"라는 말씀을 하시잖아. 근데 어렸을 때 읽은 책에서 "공부해서 남주면 어떠냐"는 거야. "공부한 걸 소외되거나 전문성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쓴다는 것이, 내가 공부한 걸 남한테 준다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이냐"는 내용을 봤는데, 뒤통수 맞은 느낌이었어.

- 그때부터 언니를 소개할 때 저 표현을 쓴 거야?

응. 국제개발학이라는 내 전공이랑 맞물리기도 해서 보통 그렇게 소개해. 국제개발학이 쉽게 말하면 개발도상국의 빈곤 문제, 사회 문제 또는 이를 둘러싼 인권, 젠더, 환경과 같은 이슈들을 다루는 학문이잖아. 내가 공부한 걸 필요한 사람을 위해 쓸 수 있다면 그게 진짜 공부의 참의미라고 생각해. 

Q. 현재 국제학 대학원에서 박사과정 중인데, 국제개발학이라는 세부 전공을 선택한 이유가 뭐야?

고등학교 때부터 늘 이쪽 전공을 하고 싶었어. 고2 때 국제학을 우연히 알게 된 후로 지금까지 10년 넘게 한 우물을 판 거지. 가슴이 뛰는 일이 정말 소중한데, 이 공부를 하면 그렇게 재밌고 가슴이 뛰었어. 다른 대안도 생각해보지 않았을 정도로.

그리고 10대 때부터 12년째 월드비전을 통해서 후원하는 아이가 있거든. 그 영향을 받은 것 같기도 해. 어렸을 땐 그 아이가 살고 있는 잠비아라는 나라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어. 지금은 현실에 찌들어서 그 순수함이 많이 퇴색됐지만.(웃음)


카파타(후원하는 아이)가 보내준 그림, 그리고 그의 꿈. 의사가 되고 싶은 꿈이 꼭 이루어지길.


Q. 요즘 관심 있는 국제 이슈가 있어?

박사 논문 연구 주제가 요즘 가장 관심 있는 이슈야. 사실 나는 젠더, 빈곤, 보건 등 굉장히 다양한 이슈에 대해 조금씩 다 아는 편이야. 그래서인지 뭐 하나 확 끌리는 게 없어서 연구 주제 잡기가 정말 어려웠어.  

아무튼 지금 연구를 하고 있는 건 '국제 이슈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인데 세계시민의식이라고도 해. 우리가 세계시민으로서 다른 나라에도 어떻게 하면 관심을 갖고 행동할지에 대한 거야. 특히 한국 사람들은 왜 다른 나라(특히 개발도상국) 이슈에 덜 관심을 가지는지 궁금해. 다들 정치나 경제처럼 힘 있는 것들에는 관심이 많지만 그 외 재난, 젠더 이슈처럼 비교적 말랑말랑한 것들에 대해선 관심이 없는지에 대해 요즘 많이 고민해. 

Q. 국제 이슈에 대한 독서모임을 운영하는 것도 그 관심사와 연관되어 있는 거야?

응. 나는 요즘 젊은 사람들이 국제 이슈에 관심은 있지만 약간 어렵게 느낀다고 생각했어. 예전부터 국제 이슈를 쉽고 재밌게 나눌 수 있는 채널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와서 독서모임을 운영하게 됐어. 독서모임에서 제3세계에 대해 공부하는 것뿐만 아니라 '미국 대선에서 왜 트럼프가 이길 수밖에 없었는지', '왜 난민 이슈가 문제가 되는 건지' 등 비교적 가벼운 이야기부터 시작하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한 거지.

그런 맥락에서 비정상회담이라는 프로그램도 좋아했어. 난민, 기후변화, 빈곤 등 뉴스에 나오면 보기 싫은 이슈들을 쉽고 재밌게 풀어줘서.


월드이슈 독서모임을 운영한지도 벌써 1년 반이 넘었다.


Q. 조금 막연한 질문일 수 있지만, 세상이 변한다면 어떻게 변했으면 좋겠어?

어렵다. 나는 교육의 힘을 매우 믿는 사람이야. 왜냐면 나도 교육이라는 것을 통해 자아를 많이 찾았고 꿈을 꿨던 사람들 중 하나이기 때문에. 특히 어려운 환경 속에 있는 경우, 교육을 못 받아서 꿈을 포기하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해. 부모가 못해준다면 정부가 해주거나 우리처럼 개발협력 일을 하는 사람들 통해서라도. 물론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는 건 알아. 그래도 최소한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교육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어. 모든 아이들이 꿈을 꿀 수 있는 데 방해가 되지 않는 세상. 굉장히 유토피아적이지.

Q. 박사 전에는 한 원조 기관에서 일했다고 들었는데, 왜 그곳을 선택했어?

"왜?"라는 질문이 신선할 정도로, 나에겐 이 기관에 들어가는 게 너무 당연했던 것 같아. 예를 들어 PD가 된다고 하면 당연히 방송 3사를 먼저 생각하듯이. 이 분야에서 가장 큰 기관이기도 하고 대학 때 인턴을 하며 좋은 인상을 받기도 했어. 가끔씩 사람이 다음 행보에 대해 너무 당연시 여기는 게 있잖아. 그런 행보들 중 하나였던 것 같아.

Q. 이 원조 기관에서 일하며 가장 뿌듯했던 순간은 언제야?

2년 동안 일하면서 많이 배웠어. 처음부터 능력에 비해 어려운 업무들을 맡으며 성장도 많이 했고. 맡았던 일이 나중엔 남자친구처럼 느껴질 정도로 애착이 커지기도 했지.(웃음) 그리고 회사에선 그 사업에 관심이 많이 없었지만 개인적으로 큰 가능성을 가진 사업이라고 봤어. 그래서 굉장히 열심히 서포팅했고, 그 사업이 잘 됐을 때 굉장히 뿌듯했어.

또 하나, 내가 가끔씩 강의를 하는데 이게 가능했던 건 이 회사에서, 특히 교육을 담당하는 부서에서 일한 덕분이야. 교육하기 위해 관련 학문에 대해 계속 공부할 수밖에 없었던 게 정말 좋았어. 실무와 더불어 전공을 계속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이었던 거지. 팀장님께서 기회도 많이 주시기도 했고. 그런 경험들이 좋았어서 회사에 대해 좋은 기억이 많아.


강의하는 언니의 모습은 처음 본다. 멋짐 뿜뿜 중.


Q. 스스로 이타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해?

'이타적'이라는 표현은 너무 낯부끄러운 것 같아. 이타적이라는 단어가 고귀한 뉘앙스를 풍기잖아. 근데 나는 그 정도가 아닌 걸 알거든. 그냥 남에 대한 배려가 자연스러운 사람 정도인 것 같아.

Q. '공부해서 남 주고 싶은' 사람이면 이타적인 사람 아니야?

그러네. 지금 생각해보니 이타주의적인 성향이 있는 건 맞는 것 같아.(웃음) 근데 내 입으로 '이타적인 사람'이라고 하는 건 너무 오글거린다. 내가 멋있는 사람처럼 그려지는 게 싫은 것 같아.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

Q. 만약에 이타적인 행동이 사회적으로 쿨하고 멋져 보이지 않아도 그렇게 할 거야?

응. 일단 난 쿨한 것과 거리가 멀어. 대다수가 생각하는 멋짐, 힙함과도 거리가 좀 있는 것 같아. 옷도 유행하는 것보다 클래식한 걸 좋아하고. 세상이 참 빠르게 변해가고 있지만, 난 그냥 내 속도로 걷는 게 좋아. 맞지 않는 옷을 입으면 나답지 않은 것처럼, 내 속도로 가지 않으면 나답지 않잖아. 만약에 다른 사람들 눈에 찌질해 보여도, 이타적인 게 내가 추구하는 가치라면 그렇게 할 것 같아. 왜냐면 스스로가 보기에 멋있으니까. 인생,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거 아니겠어?(웃음)

- 이타적이라는 말이 지금은 멋있는 느낌이 있긴 하지.

사실 이타주의적 성향은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100%의 선과 100%의 악이 없듯이, 100%의 이기주의와 100%의 이타주의는 없어. 정도의 차이지. 언제 어떤 성향이 발현되느냐의 차이기도 하고. 근데 요즘 사회가 이타주의를 너무 아름답게 포장하고 있으니까, 괜히 나도 스스로 포장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싫어. 난 내가 때론 얼마나 이기적이고 찌질한지 알고 있거든.

- 이기적이면서도 이타적인 거구나.

나보다 남을 더 사랑해서 이타주의가 아니라, 그걸 하면 내가 행복해지니까 하는 것 같아. 남을 위하면서 나를 위한 거지. 그리고 개인주의적 성향의 이기주의가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아. 그게 도를 지나치면 문제일 뿐이야.

- 어느 정도면 도가 지나친 걸까?

음 그러게. 되게 추상적으로 이야기해보면, 예를 들어 한 사람에게 100이라는 노력이 있을 때 70은 나를 위한 거고 30은 남을 위한 거라고 치자. 이때 남을 위한 30의 노력을 할 수 있음에도 안 하는 것 아닐까.




Part 2. 과학적 사고와 종교적 사고


Q. 본인이 석사 때는 '공부'를 했는데, 박사를 하는 지금은 '연구'를 하고 있다고 했던 기억이 나. 공부와 연구는 뭐가 달라?

연구를 1년밖에 안 해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부끄럽지만(웃음) 이건 그저 내가 생각하는 정의일 뿐이라는 말을 먼저 하고 싶어.

일단 공부는 기존의 지식을 습득해서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라 생각해. 소비하는 느낌이랄까. 근데 연구는 질문이 있는 것 같아. 어떤 결론을 도출하기 위한 질문. 어떤 현상에 대해 '왜? 어떻게? 정말 그런가?'와 같은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인 것 같아. 그리고 연구는 무언가의 산출물을 내야 해.

Q. 요즘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가장 많이 하는 고민이 뭐야?

'내가 중립적인 사고를 하고 있는가'에 대한 고민이 있어.

- 중립적이라는 게 정확히 뭐야?

미리 규정하지 않는 것. 사실 연구에서 도덕적 신념이 완전히 배제될 순 없지만, 최대한 배제하려고 노력해야 해. 즉 결말을 미리 예상하고 연구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하는 거지. 연구에 대한 결론은 늘 열려있어야 하거든. 예를 들어 시작부터 'A는 B다'라고 가정하는 게 아니라 'A는 뭐가 될지 모른다' 또는 '현상의 원인이 뭔지 모른다'라고 생각하는 거지. 근데 예전엔 현상의 원인을 미리 규정하곤 했어. 이제는 원인을 넓게 보려고 연습하는 중이야.

Q. 회사에서 일하는 것에 비해, 연구가 성향에 더 맞아?

안 그래도 며칠 전에 교수님께서 다시 공부하니까 좋은지 물어보시더라고. 그래서 "공부는 잘 못하지만 공부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요."라고 대답했어. 어쩌면 연구를 엄청 잘하지 못할지도 몰라. 이 세계엔 나보다 똑똑한 사람이 정말 많으니까. 근데 나는 끌리는 것, 즐길 수 있는 것을 해야 하는 사람이라 이 일을 계속할 것 같아.

그리고 연구자라고 골방에 틀어박혀서 연구만 하진 않아. 필드의 일도 되게 많이 해. 그래서 더 좋아.


학교 도서관, 가장 좋아하는 자리.


Q. 개인적으로 과학적인 사고를 위해선 합리적인 의심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언니는 의심이 많은 편이야?

그치, 과학적 사고에서 합리적 의심과 순수한 호기심이 중요하지. 의심이 없다고는 못하겠어. 기본적으로 '정말 그럴까?'라는 생각을 자주 해.

Q. 갑자기 궁금해진 건데, 종교에 대해서도 의심이 많은가? 성경에서 '의심하지 말라'고 하는데 그럼에도 의심이 될 때가 있어?

당연히 있지.

- 그럴 땐 어떻게 극복해?

극복했다고 말할 순 없을 것 같고, 믿는 것 같아. 합리적 의심이 들 때가 분명 있거든. 예를 들어 '이렇게 열심히 믿었는데 신이 없는 거면 어떻게 하지?'하는 고민이나,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목사님들은 희대의 사기꾼이잖아'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어. 근데 그렇다고 신이라는 존재가 없다고 부정할 수도 없는 것 같아.

대부분의 사람이 경험에 의거해서 판단을 할 때가 많잖아. 때론 질문도 생기지만 '그렇다고 신이 없다고 하기엔 내 인생에서 경험해온 종교적인 게 너무 많다'는 결론이 나곤 해. 

- 예를 들면 어떤 경험들이 있어?

간증인가요?(웃음) 나는 내 능력을 알잖아. 근데 가끔 정말 운이 좋았거나, 신이 도왔다고 설명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있어. 그런 경험을 할 때 신은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 

Q. 언니의 삶에 종교가 없었다면, 삶이 많이 달라졌을까?

그런 상상을 종종 하긴 해. 난 흔히 말하는 '모태신앙'이거든. 만약에 어렸을 때부터 신을 믿은 게 아니었다면, 난 정말 신의 존재를 부정했을 거야. 왜냐면 근거가 없다면 믿지 않는 스타일이거든. 의심도 많고. 근데 태어났을 때부터 교회에 다녔으니 이 모든 게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여진 거야. 성인이 되고 종교를 접했다면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했을 거야. 사실 머리로는 이해가 안 가. 경험을 통해 믿고 인정할 뿐이지.




Part 3. 예쁜 마음을 예쁜 그릇에 담는다


Q. 언니는 한 마디를 하더라도 따뜻하고 예쁘게 해주는 것 같아. 그렇게 표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유가 있을까?

'말을 예쁘게 한다'는 게 어떻게 보면 감성적으로 느껴질 수 있잖아. 하지만 난 그건 이성적인 사고가 동반되어야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해. 예를 들어 '외교적 말하기'라는 게 굉장히 화가 나더라도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고, 포인트를 분명히 전달하되 매너 있게 전달하는 거잖아. 말을 가다듬는 과정 자체도 이성적인 사고가 되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거고. 화가 난 상황에서 감정에만 치우친다면 감정을 그냥 쏟아내겠지. 근데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렇게 말하는 게 관계에 좋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에 제어하는 거지. 그래서 말을 조심하는 게 이성적인 사고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해.

Q. 감성적인 걸 부정적으로 보진 않지?

그럼그럼. 감정 말고 '감성'이 인생의 윤활유 같은 역할을 해준다고 생각해. 희로애락이 없으면 인생이 팍팍하잖아.

그리고 사실 감정과 이성의 경계가 모호해서 두 가지를 명확히 분리하긴 힘들어. 세상에 100%는 없거든. 

- 극단을 경계하는 스타일이구나.

이런 성향이 내 전공과도 관련이 있는 것 같아. 우리 전공에선 '원 사이즈 핏 올(One size fits all)' 접근법, 즉 한 가지 처방전으로 모든 병을 해결하는 걸 굉장히 조심해. 환경에 따라 원인이 다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분법적으로 사고하려는 게 거의 없는 것 같아. 세상에 단 한 가지 이유는 없어. 예를 들어 캄보디아의 빈곤과 잠비아의 빈곤의 원인이 다르듯이. 다양성을 존중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더욱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런 식의 사고가 훈련된 것 같아. 

Q. 표현방식뿐 아니라, 좋은 메시지를 전해주려고도 노력하는 것 같아. 예를 들어 사람들의 장점을 찾아내서 칭찬해준다든지 하는. 그런 말들이 오그라들진 않아?

전혀. 왜 오그라들어?(웃음)

- 아까 언니도 이타주의자라는 말을 오그라들어 했었잖아.

아 이건 앞으로 내가 고쳐야 할 부분인데, 내 칭찬엔 인색한 편이야. 나를 포장하고, 있어 보이게 하려는 걸 경계해. 나 자신을 좋아하지만 그걸 굳이 드러내고 싶어 하진 않아. 근데 남에게 칭찬하는 건 전혀 거부감이 없어.

- 왜 그럴까?

사실 겸손이 미덕이라는 한국 문화의 폐해라고 할 수 있어. 예를 들어 팀장님이 "수고했어, 잘했어."라고 하면 감사하다고 하면 되는데 "아니에요, 덕분이죠."라고 이야기하잖아. 그런 것들이 내 안에도 있었던 것 같아.

요즘은 칭찬을 칭찬으로 받아들이려고 해. 자기 자신을 제일 사랑해주고 잘 알아야 내 인생이 행복해지는 것 같거든. 어렸을 때부터 남을 사랑해주려고 노력한 적은 많은데, 나 자신을 사랑하려고 노력했던 적이 없었던 것 같아. 그래서 요즘은 나에 대해 알아가려고 노력 중이야.


햇살처럼 웃는 인터뷰이. 손에 든 건 그의 페이보릿, 아이스 카라멜 마끼아또로 추정된다.


Q. 혹시 칭찬 말고 냉정한 말도 잘하는 편이야?

잘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남들이 나 은근히 잘 한대.(웃음) 나는 좀 예민한 편이라 남이 어떤 이야기를 했을 때 기분 상하게 할 의도가 아니었음에도, 가끔 그 말의 속뜻을 곱씹을 때가 있어. 그게 얼마나 피곤한지 알기 때문에 최대한 남들에게는 그런 곱씹음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아. 그래서 최대한 명확하게 이야기하는 편이야. 그러다 보니 결과적으로 호불호가 분명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아. 물론 그 말을 하기까진 혼자 굉장히 많이 끙끙거려. 

그래서 최근에 꽂힌 게 '건설적으로 화내기'야. 화를 안 느끼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화를 잘 다루고 표현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 나의 포인트를 정확히 전달하면서, 감정적이지 않고 건설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어. 듣는 사람도 말하는 사람도 다치지 않도록.




Q. 벌써 인터뷰를 마무리해야 할 시간이야.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의 모습이 두 가지야. 하나는 '은은한 여운을 남기는 사람'이고, 또 하나는 '마음이 단단하지만 딱딱하진 않은 사람'. 지금의 나는 남의 말에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이거든. 나중엔 내 중심이 단단해서 남의 말에 휩쓸리거나 좌지우지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어. 근데 또 마음이 너무 딱딱해서 감정이 닫혀있는 사람이고 싶지는 않아. 언제나 같이 기뻐해 주고 슬퍼해주며 공감해줄 여유를 가지고 살고 싶어.

- 우리 같이 아는 지인들이 좀 있잖아. 많은 사람들이 언니를 상큼하고 맑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

진짜 고마운 일이다.(감동) 난 나이가 들어서도 눈이 반짝이는 할머니이고 싶거든. 생기 있고 살아있는 느낌! 그런 생기와 순수함을 쭉 유지했으면 좋겠어.


무려 이런 상을 받았다.


Q. 언니가 '살아있다'는 표현을 써서 생각난 질문이 하나 있어. 언니가 생각하는 진정한 죽음은 뭐야? 신체적인 죽음 말고 스스로 정의하는 죽음.

아까 말한 '생기'가 없어졌을 때, 더 이상 하고 싶은 게 없어서 눈이 반짝이지 않을 때. 나는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걸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야.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누가 "꿈이 뭐냐"고 물으면 직업으로 이야기한 적이 없어. 그걸 이루면 더 이상 하고 싶은 게 없어지잖아. 내 꿈은 늘 추상적이었어.
 
Q. 전 인터뷰이가 남긴 릴레이 질문이 있어. "<사소한인터뷰> 제안을 받았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

난 기뻤어. 네가 <사소한인터뷰>를 하고 있는 걸 오래전부터 알았고, 되게 재밌게 봐왔거든. 내가 재밌게 봤던 것의 한 화의 주인공이 될 수 있어서 좋았어.

또, 인터뷰를 받는 게 흔한 기회는 아니잖아. 내 생각을 이야기하면 누군가가 같이 고민하고 정리해준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것 같아.

Q. 다음 인터뷰이에게 릴레이 질문 하나 남긴다면?

좀 뻔하지만 진짜 궁금한 거야. "만약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 가장 하고 싶은 것은?"

- 그 질문에 대한 본인의 대답은?

나는 소소한 걸 즐긴다고 했잖아.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랑 맛있는 저녁을 먹고,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많이 사랑한다는 말과 지금까지 고마웠다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

Q. 이 타이밍에 찰떡같은, <사소한인터뷰>의 공식 질문이 하나 있어. 묘비명을 남긴다면 뭐라고 남길 거야?

이 질문이 제일 어렵다. 나는, 남들이 새겨줬으면 하는 묘비명으로 대답할게.

'웃음이 밝던 사람, 사랑하는 사람들과 있다 가다.'
내 인생에서 추구하는 바이기도 해.


'쓸데없는 것의 쓸모 있음'을 논한다는 건 굉장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자칫 누군가에겐 정신승리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나에게 언니가 자주 하던 말이 있다. "나는 내 찌질함도 좋아. 그게 나인 것 같아." 그동안 대수롭지 않게 듣던 이 말이 자주 생각나는 요즘이다. 섣불리 쓸모를 판단하지 않는 언니가, 나는 좋다. 구름 한 점, 꽃 한 송이의 쓸모를 논하지 않는 언니가. 그리고 언니 같은 친구를 둘 수 있어 다행이다. 여름의 쓸모와 겨울의 쓸모를 논하지 않고, 계절의 변화를 그저 즐겁게 느껴줘서. 그렇게 그냥 나일 수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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