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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희 Aug 02. 2018

상대를 그답게 만드는, 임다운

나는 나답게, 너는 너답게

2년 전 이맘때쯤 다운이와 처음 인사를 나눴다. 아마도 그 자리는 그가 입사를 결정하기 전, 유일한 직원인 나를 만나 이것저것 물어보는 자리였던 것 같다. 더운 날 시원한 카페에 앉아 나는 어떤 사람인지, 그동안 어떤 일을 해왔는지 조잘조잘 신나서 얘기했던 기억이 난다. 시간이 꽤 지난 후에 그는 그때 내가 본인과 비슷한 구석이 많다고 느꼈다고 했다. 사실 나도 그랬다. 대학교도, 진로를 결정하는 스타일도, 재미에 집착하는 성향도 우리는 이상하게 비슷했다.

가장 최근에 우리가 비슷하게 선택한 것이 있다면 스타트업을 나와 또다시 스타트업 초기 멤버로 합류했다는 것. 다만 나는 또 다른 커뮤니티를 꾸리는 스타트업으로, 그는 자전거 업계 스타트업으로 들어갔다. 이 선택은 또 우리를 얼마나 비슷하고도 달라지게 만들까. 이제는 '친구'라고 소개하고 싶은 그의 이야기들을 사소하게 담아보려 한다.


<사소한인터뷰> 238번째 주인공, 임다운




Q. <사소한인터뷰> 독자들을 위해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해.

안녕하세요 저는 임다운입니다. 인터뷰어의 전 직장동료이자 지금은 자전거 인증 중고거래 플랫폼, 라이트브라더스에서 전략기획, 마케팅.. 을 비롯해 다양한 업무를 맡고 있는 사람이고요. 재밌고 멋진 것들을 아주 많이 좋아해요.

- 넌 어떤 걸 재밌어해?

나로 하여금 얘기하고 싶게 만드는 것. 난 뭔가가 재밌으면 사람들을 붙잡고 얘기하는 스타일이거든. 그게 사람이든 물건이든 음식이든 뭐든. 회사도 마찬가지.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즐겁게 말할 수 있는 곳이길 바라고, 그렇게 만들고 싶어 해.
 
Q. 스스로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예전에 아는 사람이 손금을 봐준 적이 있는데 나보고 ‘두리번두리번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고. 그 표현이 나랑 꽤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어. 난 어디서든 내가 재밌어할 만한 구석들을 찾으려고 노력하거든. 깜깜한 동굴에서도 두리번두리번거릴걸.(웃음)

내가 눈을 똥그랗게 뜨고 다니는데, 가끔은 눈을 가늘게 떠보라는 말도 들었어. 내가 눈에 너무 많은 것을 담으려고 하고, 욕심도 많다고. 그 얘기를 듣고 나서 장난처럼 손으로 눈 주변을 가려봤는데, 진짜 차분해지는 것 같더라. 그 뒤로 나만의 명상법이 됐어. 동굴을 만드는 거지. 이렇게.


이렇게 하는 거라며 시범을 보여줬다. 자주 보던 저 포즈가 집중을 위한 거였다니..!



Part 1. 큰 눈에 담고 싶은 많은 것들


Q. 커리어를 브랜딩 회사로 시작해서, 독서모임 스타트업을 거쳐 자전거 업계 스타트업으로 왔어. 각 회사는 어떤 곳이었고 어떤 기준으로 선택했어?

첫 직장은 브랜딩 회사였어. 대학교 다닐 때부터 브랜딩, 마케팅에 관심 많고 좋아하는 브랜드들도 많았어서 기업 취직도 생각해보고, 광고, 홍보대행사 취직도 생각했었는데 다양한 분야의 클라이언트들과 바로 실무를 경험하기에는 작은 규모의 브랜딩 회사도 좋겠더라고. 기대했던 대로 화장품, 식음료.. 엄청 다양한 회사들과 일하면서 그야말로 두리번두리번했지. 그 회사에서는 '컨셉'을 엄청 중요하게 생각해서 브랜드마다 메인 컨셉을 잡고, 그 컨셉이 상품기획, 마케팅, 매장 등 브랜드의 모든 활동에 녹아나야 한다고 말했었거든. 근데 우리 컨설팅을 받고 실제로 구현하는 건 클라이언트들이잖아. 일하다 보니 아이디어를 실체로 만드는 사람들이 궁금해지더라고.

- 그러다가 옮긴 곳이 나랑 만났던 독서모임 스타트업이었구나.

응. 처음에는 돈 내고 멤버로 들어갔는데 생각보다 재밌는 거야. 압구정 빌딩 사무실 한 칸에서 대표님 혼자 모든 업무를 다 하다가 네가 직원으로 들어왔잖아. 그러면서 '어라? 회사네? 잘 될 것 같다.'라는 마음이 들었어. 아이디어를 실체로 만드는 일에도 갈증이 있던 때였는데, 거긴 정말 '독서모임 기반 커뮤니티 서비스'라는 좋은 아이디어를 '손에 잡히는 무언가'로 만드는 곳이었잖아. 난 사실 책을 엄청 좋아하고 많이 읽는 사람은 아니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이 너무 재밌더라고. 그 사람들의 케미스트리로 할 수 있는 일들도 궁금했어. 내 인생에 있어서 단 시간에 제일 많은 사람을 만났던 때가 아닐까 싶어. 내가 일하면서 제일 많이 했던 생각 중 하나가 'B2C 서비스 중에 이렇게 고객이 애정을 퍼부어주는 서비스가 얼마나 될까' 였는데, 정말 사랑도 넘치게 받고, 그만큼 쓴소리도 많이 들으면서 좀 성숙(?)해진 것 같아.

그렇게 새로 시작한 스타트업이 궤도를 찾아가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보면서도 사실 '스타트업'이라는 게 뭔지, 어떻게 일하는 것이 '스타트업'스러운 건지, 잘 알지는 못했던 것 같아. 그러다 라이트브라더스라는 서비스의 런칭 준비단계에 합류할 기회가 생겼는데 서비스도 매력적이었고, 스타트업이 런칭하고 성장하는 과정을 한 번 더 경험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어. 몸과 마음의 건강에 조금 더 신경 쓰면서 일할 수 있는 것도 좋았고.

Q. 근데 왜 갑자기 자전거야? 백 번 들은 질문이겠지만 독자들을 위해 한 번만 더 설명해줘.(웃음)

내가 너무 무리하지 않으면서도 기분 좋게 할 수 있는 운동이 자전거랑 요가 두 가지거든. 여행지에 가서도 무조건 자전거 빌려주는 곳 찾아보고, 특이한 요가 스튜디오 가보고.

다른 운동은 정말 못해. 체육은 언제나 독보적으로 꼴찌였고, 운동회에서 6명이 달리면 6등, 100명이 달리면 100등 하는 그런 애가 나야 나. 아직도 운동회 날 생각하면 소화불량이 생길 것 같아.(웃음)


꾸준히 하는 두 가지 운동, 요가랑 자전거


자전거를 좋아하니까 몇 년 전에 사보기도 했거든. 새것은 비싸니까 중고카페에서 샀지. 내 것 하나 먼저 사고, 남자친구 선물 준다고 똑같은 모델, 똑같은 값을 주고 어렵게 구했는데 막상 받고 나니 상태가 너무 구린 거야. 자전거도 엄청난 레몬마켓(구매자와 판매자 간 거래 대상 제품에 대한 정보가 비대칭적으로 주어진 상황에서 거래가 이루어짐으로써 우량품은 자취를 감추고 불량품만 남아도는 시장을 말함)이고, 중고가 산정 기준도 마땅히 없는 시장이구나, 생각했던 경험이 있지. 내가 산 건 비교적 싼 자전거였지만 자전거도 비싼 것들은 차 한대 값이라고.

그러다가 라이트브라더스 팀 이야기를 듣게 됐는데, 엑스레이로 중고자전거를 스캔하고 외관과 성능진단까지 마쳐서 판다니까 내가 옛날에 느꼈던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솔루션이 나타난 것 같아서 반가웠어. 중고차도 인증 중고 시스템을 거쳐 사는 게 너무 당연한 것처럼 곧 새로운 상식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지.

다 떠나서 자전거 재밌어. 따릉이라도 타봐. 난 따릉이도 좋아.(웃음)

Q. 운동 신경과 별개로 원래 몸을 관리하는 것에 관심이 많았어?

응. 한 번 태어나면 몸은 계속 써서 없어지는 거잖아. 성장도 일종의 죽는 길이니까. 평생 함께 할 몸뚱어리를 건강하게, 제일 좋은 상태로 유지하고 싶어. 그게 나의 지속 가능성을 높여주는 일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몸과 마음은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받는다고 믿어. 내가 어렸을 때 아토피 때문에 1년 정도 집 밖에 못 나갈 정도로 크게 고생했던 적이 있거든. 그때 정말 온갖 생각이 다 들고 힘들었어. 아픈데도 불구하고 멀쩡한 정신을 유지한다는 것은 초인적인 힘이 있어야 하는 것 같더라. 몸이 아프면 마음이 아프고, 마음이 아프면 몸도 아픈 게 너무 자연스러운 거라고 봐.

Q. 개인적으로 지금 회사에서 어떤 걸 해보고 싶어?

지금은 하나의 직무, 이를테면 마케팅! 브랜딩! 인사! 이런 기존의 구분과 관계없이 어떤 역할로든 이 팀에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마음이 제일 커.

난 자전거를 좋아한다고 하긴 했지만 따릉이나 하이브리드 자전거를 탔지 여기서 주로 다루는 탄소섬유소재 자전거를 탔던 사람은 아니야. 그래서 여기서는 내가 모든 걸 다 아는 것처럼 마냥 잘난 척할 수가 없어. “여기 이런 서비스가 있어요.”라고 얘기하고, 서비스를 좀 더 매끄럽게 만들 방법을 고민하고, 새로운 기회를 찾는 게 지금의 내 역할일 거야.

우리 서비스에 있어서는 자전거 전문가인 미케닉(mechanic, 정비공)들의 몫이 엄청 크거든. 고객에게 어떤 자전거가 필요할지 알아보고, 사이즈 맞춰준 다음에 페달 끼워서 실제로 달릴 수 있게 만들어주는 건 내가 아니라 미케닉들이야.


온 얼굴로 환영하고 눈으로 엑스레이 찍고 설명하는 중


Q. 넌 업무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잘 맞춰주는 것 같아. 되게 스펙트럼이 넓달까.

맞아. 난 메타몽 같은 사람이야.(웃음) 너랑 있을 때는 너랑 이야기하는 걸 재밌어하는 사람이 되고, 남자친구랑 있을 때는 남자친구랑 이야기하는 걸 재밌어하는 사람이 돼. 하루 종일 말 거의 안 하고 있는 게 편한 사람도 있어.

우리 어렸을 때 '지금은~개성시대! 자기 PR 시대!' 이런 말이 유행이었잖아. 나도 자기 스타일 확실한 사람, 나랑 맞지 않으면 말도 안 섞을 것 같은 사람, 취향이 대쪽같이 확실한 사람을 동경한 적이 있었어. 뭔가 좀 있어 보이잖아. 근데 나는 나를 뭐라고 규정할 지도 잘 모르겠고, 딱히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더라고. 적당히 어디 있어도 어울리고, 좋은 거 나쁜 거 모르는 건 아니지만 딱히 고집은 없는 지금의 내가 좋아.

- 그래도 맞추기 힘든 스타일을 꼽자면?

무례함과 솔직함을 혼동하는 사람? 솔직함이 미덕이기는 하지만, 아무 말이나 해놓고 '내가 좀 솔직하잖아'라는 말로 방패 삼으려는 사람들은 좀 어려워. 지금 내 주위에는 없고(웃음) 옛날에 내가 얼어붙었던 기억을 되짚으면 그런 경우들이었던 것 같아.

Q.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맞춰줄 수 있는 원동력이 뭐야?

가만히 있어도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이 어딨겠어. 들여다봐야 아는 거지. 모든 사람에겐 흥미로운 구석이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어. 안 멋진 구석들도 있을 텐데 그것도 당연한 거고. 사람들 각자가 가진 면면들을 보는 게 너무너무 좋아. 근데 그 진짜 이야기를 듣기 위해선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하잖아.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 지점을 찾으려고 노력하게 되는 것 같아.
  
-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하는구나.

내가 어렸을 때 살던 동네가 일산에 있는 빌라 단지였거든. 300가구 정도 되는 작은 동네였어서 신도시인데도 진짜 '동네 사람들'처럼 살았던 기억이 나. 아줌마들 나와서 같이 풀 뽑고, 김장 같이 하고.. 어버이날만 되면 동네 아기들이 우리 할머니한테 다 양말을 들고 왔는데, 알고 보니 나 학교 가고 없을 때 할머니가 새댁들 편하게 은행일 보고, 친구 보고 오라고 아기들을 봐줬다더라고. 그 덕에 나도 동네 아줌마들한테 밥 많이 얻어먹었지. 그런 신기한 동네였어.

그리고 우리 집은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시니까 나 학교 끝나고 학원 안 가는 날에는 할머니가 나를 노인정에 데려가서 하루 종일 같이 앉아있는 거야. 할머니들 얘기가 무슨 재미가 있나 싶지만 가만히 듣다 보면 우리 할머니를 비롯해서 할머니들 삶이 그렇게 기구해. 우리 동네에 진짜 무서운 할머니가 있었어. 동네 대소사에 다 나서면서 죽이네 살리네 하는 사람. 근데 왜 그 할머니가 그렇게 까칠한지, 원래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듣고 나니까 그 뒤로는 덜 무섭고 이해가 되더라. 사람을 깊게 들여다보고, 맥락을 파악하는 법을 할머니가 알려준 게 아닌가 싶어.




Part 2. 글보다 말을 좋아하는 사람


Q. 평소에 자유로운 말과 행동을 많이 하는데, 스스로도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다고 생각해?

아니, 신경 많이 쓰지. 난 막 ‘어쩌라고’ 하면서 삐댈 수 있는 사람은 아닌 것 같고, '이렇게 생각하실 걸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하고 싶어요.'라고 소심하게 외치는 사람에 가까워. 전혀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닌 것 같아. 아까도 말했듯 그런 사람을 동경한 적도 있지만 나랑은 거리가 멀어.

- 옆에서 보니 글 쓸 땐 더 신중한 것 같더라고. 한 번 글 올리면 좋아요를 파바박 눌러주는 숨은 팬들이 많은데도 말이야.

텍스트로 남는 것들에 대해서는 아주 편하진 않아. 어렸을 때부터 일기 쓰는 것도 싫어했고,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부담이 있었어.

글 쓰는 거 좀 무섭지 않아? 말도 빚이고, 글도 빚이라고 생각해. 어떤 방식으로든 책임이 따르는. 가볍게 이것저것 올리고 싶다가도 그러다가 내가 실수할 까봐, 난 재밌다고 쓴 글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까 봐 두려운 마음도 있어.

Q. 글은 자기 검열이 심한데 말은 더 자유롭게 하는 것 같아. 왜 글 쓸 때와 말할 때가 달라?

나는 말할 때는 맥락을 잘 전달하는 편인 것 같거든. 몸도 엄청 많이 쓰고 표정도 이만큼 쓰니까 비교적 수월하게 느껴져. 아직 내가 많은 사람을 대상으로 말할 일이 없어서 그럴 수도 있지. 몇 사람을 위한 말이잖아. 내가 했던 이상한 말들 다 잊어줘.(웃음)

글로는 그 모든 뉘앙스를 전달하기가 힘든 것 같아. 일단 쓰면 구구절절해지고, 짧게 쓰려다 보면 뜻을 다 담지 못하는 것 같아서 잘 안 쓰게 돼. 빨리 고치고 싶은 부분 중에 하나야. 겁내지 말고 글 쓰면서도 의도하는 바를 명확하게 전달하는 것! 글을 잘 쓰고 싶어.

Q. 어떤 글이 잘 쓰는 글이야?

문체와 형식에 대해서 뭐가 잘 썼다 못썼다를 얘기하기는 어렵고, 그냥 '내 생각이 이래'를 그때그때 올릴 수 있으면 난 잘 쓰는 거라고 생각해.

난 카톡도 바로바로 보내기보다는 좀 생각해서 보내. 남자친구가 옆에서 나 카톡 보내는 걸 보고 매번 뭘 그렇게 고치냐고 해.(웃음)


이 해괴한 가방이 엄청 비싸서 놀란 표정과 아아로 더위를 이겨먹겠다는 표정(으로 추정됨)


Q. 말할 때 진짜 자유로워 보이는데, 특히 몸에 대해 묘사하거나 표현할 때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어. 몸에 대한 표현에 어떻게 그렇게 솔직할 수 있는지 궁금해.

그냥 난 그렇게 자랐어. 몸은 다 가지고 태어난 거잖아. 나쁜 것도 아니고, 야한 것도 아니고. 누군가를 놀리거나 음담패설로 낄낄거리는 게 아니라면, 있는 거 다 알면서 돌려 말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해. 할머니가 어렸을 때 항상 신체 부위를 거기, 거시기 이렇게 표현하시지 않고 정확하게 말씀하셨어. 그래서 나에겐 정확한 표현들이 너무 자연스러워. 좀 더 컸을 때는 다들 부끄러워하니까 말 안 하고 살았던 적도 있었어. 근데 지금은 그걸 말하는 게 이상한 게 아니라는 걸 아니까 말해. 내가 그런 말을 하고 싶어서 환장한 애는 아니잖니.(웃음) 지칭할 일이 있을 때 “있잖아 거기, 알잖아 거기” 이렇게 얘기하진 않아. 그뿐이야.

-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고 받아들이는 가정 환경에서 자라서 네가 솔직한가 봐.

응. 내가 어렸을 때 엄청 통통했거든. 나는 자꾸 학교에서 친구들과 비교되니까 “엄마 나 뚱뚱한 것 같아” 그러면 엄마는 “아니야, 다운이는 지금도 예뻐.”라고 하셨어. “운동해야지, 누구처럼 날씬해져야지, 그만 먹어야지” 류의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었던 것 같아.

Q. 네가 여성의 몸으로 태어난 것에 대해 만족해?

오 되게 심오한 질문이다. 난 나름 만족해. 납작한 것보다는 좀 볼록한 내 가슴이 귀엽고, 근육은 잘 안 붙지만 말랑말랑한 내 몸도 좋고. 여자라서 만날 수 있는 사람들도 좋고. 생리는 좀 귀찮고 짜증 나지만 생리컵처럼 나은 솔루션이 계속 나오고 있으니 희망이 있지.(웃음)

옛날에 ‘내가 남자로 태어났으면 진짜 잘 살았을 텐데, 알파메일(Alpha Male)로.’라는 생각을 해본 적도 있었는데 그건 잠깐 스쳐갔던 생각이었어. 물론 지금 내 모습을 예쁘다고 해주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으니까, 내가 지금 있는 이대로의 모습으로 거부당하지 않을 거라는 자신이 있으니까 그럴 수 있는 것 같긴 해.
(*알파메일: 늑대 집단의 계층에서 최고 우두머리 수컷이라는 뜻으로, 강한 이미지의 남성을 이르는 말.)

- 그냥 너라면 한 번은 이런 생각을 해봤을 것 같아서 물어봤어. 예전에 네가 “사춘기 때 다들 한 번씩 자기 성 지향성 및 정체성을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라고 했던 적도 있고.

성 지향성, 정체성 이런 용어들에 대해 정확히는 알지 못해도 일단 가능성을 열어놓고 생각해보는 건 재밌는 일이잖아. ‘나에겐 분명 다른 길이 있을 거야’라고 답을 정해놓을 필요도 없는 거고. 네가 남자의 몸으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궁금하지 않아?

근데 내가 상상의 폭은 넓지만 그렇다고 <섹스 앤 더 시티>에 나오는 사만다처럼 어마어마한 라이프를 즐기고 그런 건 아니야. 별것도 안 하면서 말만 많아.(웃음)




Q.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커리어를 쌓아 나가고 싶어?

사실 내 직무에 있어서 ‘PR의 신이 되겠어’, ‘마케팅의 달인이 되겠어’ 이런 욕심은 없어. 그저 같이 일하고 싶은 멋진 사람들이 있는 팀에서 필요한 존재가 될 수 있으면 그게 어떤 형태든 좋아. 내가 같이 일하고 싶은 곳에 빨리 적응해서 내가 필요한 파트가 뭔지 빨리 파악하고 꼭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게 중요한 것 같아.

Q. 일에 국한시키지 않고 물어보고 싶은 건데, 넌 어떤 사람으로 살고 싶어?

굳이 이야기를 하자면, 내 리듬을 잃지 않는 사람. 앞으로 나한테 계속 이런저런 기회가 오고, 많은 선택의 순간들도 오겠지. 그때 누군가와 비교하면서 나랑 맞지 않는 옷을 입으려 하거나 평소의 나라면 선택하지 않았을 선택을 하는 일이 적었으면 좋겠어. 없을 거라는 말은 못 하겠다.(웃음)

Q. 전 인터뷰이가 너에게 남긴 질문이 하나 있어. 당신이 생각하는 당신의 가장 좋은 습관은?

나는 진짜 잘 자. 머리 대면 머릿속 싹 비우고 3분 안에 잠들 수 있어.

뭔가 좀 더 노력이 필요한 습관이라면.. 아침을 든든히 챙겨 먹는 것.

Q. 다음 인터뷰이에게 릴레이 질문 하나 남겨줘.

살면서 들었던 가장 사랑스러운 말은?

- 그 질문에 대한 너의 답은 뭐야?

할머니가 한 말인데, 내가 "할머니"라고 부를 때 '할~'에서 리을을 발음하면서 혀가 꼬부라지는 소리가 좋다고 했어. 너무 귀여운 말 아니니.

Q. 마지막 질문이야. 묘비명을 남긴다면 뭐라고 남기고 싶어?

‘다 듣고 있다.’ 근데 나 시신 기증할 건데?



직장을 다니고 최근엔 결혼까지 하며, 내가 나다운 것도 쉽지 않지만 상대방이 그다울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러다 '내가 누구와 있을 때 가장 나다운가' 묻게 되었고 문득 오늘의 인터뷰이가 떠올랐다. 유독 다운이와 있으면 술술 속 이야기를 꺼내놓는 나를 자주 발견하곤 한다. 그의 앞에선 정말로 어떤 모습이어도 될 것 같고, 어떤 이야기든 해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서 이 얘기 저 얘기하다 보면 '나에게 이런 매력이 있었나', '내가 이런 사람이었구나' 싶을 때가 많다. 그간 그저 내가 그와 닮았기 때문에 잘 맞는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인터뷰를 통해 어쩌면 그가 항상 나에게 맞춰주고 있었기 때문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나다울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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