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인터뷰 '멋'
취향이 자본인 시대,
각자 가진 고유한 매력으로 승부수를 띄우는 시대에
나의 모서리는 무엇인지 고민해 보게 됩니다.
이번 기획에서는 자유로움에서 오는 멋, 치열함에서 오는 멋 등
다양한 종류의 ‘멋’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개해 드릴게요.
저희의 대화를 편안하게 보시며 내 안에 있는 멋을 발견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소한인터뷰> 독자들에게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안녕하세요. 저는 단단히 삶을 헤매는 중인 한국 국적 20대 여성입니다. 요즘의 자칭 닉네임은 ‘소화(小火)’라서 그렇게 불러주시면 될 것 같네요. 2년 전부터 필름 현상소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사소한인터뷰> 공식 질문이 자신을 한 마디로 표현해달라는 건데, 이미 소화했네요.(웃음) 왜 자칭 닉네임이 ‘소화’예요?
사주 공부하는 친구가 있는데 연습할 겸 제 사주를 봐줬어요. 되게 많이 알려줬는데 딱 두 가지만 기억이 나요. 제가 ‘작은 불’이라는 것, 또 하나는 회사에 오래 붙어 있을 사람이 아니라는 거요. 사주를 빙자한 친구의 위로였을 수 있지만, 마음에 들었어요. 딱히 큰 불까지 바라지 않고, 관계에 깊게 빠지는 등 습도가 높은 사람도 아니어서 ‘작은 불’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죠.
필름 현상소에서 일하게 된 계기도 궁금해요.
필름 사진 찍기를 취미로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주 가는 현상소가 하나쯤 생기기 마련인데요. 저는 지금 일하고 있는 현상소였어요. 친한 언니가 일하고 있었거든요. 손님으로 꾸준히 이용하다가 친한 언니가 일을 그만둘 때 제가 꿰차고 들어왔습니다.(웃음) 현상소에서 일하는 게 흔하지 않은 일이라 좋기도 했어요.
지난번에 만났을 때 “서울에 사는 것이 싫다”라고 했는데, 그 말이 마음에 깊이 남았어요. 왜 싫은지, 그럼 어디서 살고 싶은지 궁금해요.
제가 점점 괴팍한 사람이 되어가더라고요. 이 도시의 속도를 이제 못 따라가겠어요. 제가 느끼는 이런 텁텁한 감정과 현상을 가장 극대화해서 보여줄 수 있는 게 ‘지하철’이에요. 그저 도시 어딘가의 짐짝이 되어 빠르게 실려 다니게만 되는 게 싫어졌어요.
제가 제주, 경주, 전주, 청주 등 ‘주’자 돌림 도시들이랑 잘 맞거든요. 그 도시들의 속도와 풍경이 마음에 들어서, 기회가 된다면 살아보고 싶어요. 그런데 왠지 제일 가까운 선택지는 영국이 될 것 같네요. 놀라운 결말이죠?(웃음)
갑작스러운 전개이긴 하네요.(웃음) 얼마 전 런던 여행을 다녀온 걸로 아는데, 어떤 매력에 꽂혔나요?
최근 짧은 기간에 런던으로 여행을 두 번이나 다녀왔는데요. ‘여기 나랑 왠지 잘 맞을 것 같다’는 느낌이 왔어요. 예를 들어 대중교통을 타면 가까이 들리는 언어가 4~5개는 되는 거예요. 영어는 물론, 스페인어, 프랑스어, 중국어 등 정말 다양한 언어를 쓰는데 여기는 내가 한국어를 써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도시라는 게 확 느껴졌어요. 런던에 살고 있는 지인과 얘기를 많이 나누었는데 그분도 그런 점에서는 정말 편하게 살 수 있는 도시 중 하나인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고향은 어디고, 서울에는 어떻게 오게 되었어요?
전라남도 순천에서 나고 자랐어요. 스무 살 때 대학 때문에 서울로 올라왔죠.
사실 스무 살부터 나라는 사람이 ‘나로서 자라기 시작했다’고 생각해요. 성장했다는 거창한 표현보다, 진짜 ‘자랐다’는 날것의 표현이 더 적절해요. 그전에는 제가 무언가를 선택해서 직접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았으니까요. 애초에 선택지가 있는지도 몰랐기 때문에, 제가 할 수 있는 건 그냥 공부밖에 없는 줄 알았거든요.
몸만 성체가 됐을 뿐, 저는 그냥 씨앗 상태였죠. 스무 살부터 직접 많은 것들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책임지게 되면서 나라는 사람이 크기 시작했어요. 하루하루를 온전히 내 선택으로 꾸려갈 수 있다는 것이 좋아서 정말 혼자 신나게, 바쁘게 돌아다녔어요. 서울에서 나고 자란 친구들보다 서울의 곳곳을 더 잘 알게 될 정도였죠. 지금 인터뷰하는 카페도 주신 링크 따라 와보니 예전에 혼자 와봤던 곳이더라고요.(웃음)
어쩌면 많이 헤매고 돌아다니며 서울이라는 도시를 잘 알게 된 덕분에 ‘이 도시는 나랑 맞지 않는다’라고 판단 내릴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이제는 나에게 더 잘 맞는 도시를 찾아야겠다는 용기가 생겼어요.
예전부터 소화 님은 자신의 환경을 바꾸는 것에 대한 불안이 별로 없는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그 마음에 대해 더 자세히 듣고 싶어요.
저는 삶의 핸들을 휙휙 돌리는 것에 대한 부담이 별로 없어요.
예전에 세희 님과 같은 직장을 다니던 시절에 함께 산책을 하며 제가 했던 말이 있어요.
“아니 제가 내일 트럼펫을 시작했는데 진짜 숨겨진 재능이 있을 수도 있는 거니까 좀 다양한 것들을 해보고 싶어요.”
아직도 동일한 생각을 하며 살아갑니다. 원체 욕심도 많고, 쉽게 질리는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도 한몫하지만 닿는 대로 좀 더 배우고, 경험해 보고 싶어요.
기억나요. 같이 산책하며 커리어에 대해 나름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죠. 소화 님이 갑자기 길가에 있는 동물병원을 보고는 “근데 저는 여기 동물병원에서도 일해보고 싶어요. 알고 보면 제가 동물병원에 딱 맞는 체질일 수도 있잖아요.”라고 되게 설레하며 얘기하는 거예요. 나의 수많은 가능성들을 긍정하는 모습이 멋있었어요. 그때 고민의 무게가 갑자기 확 가벼워지기도 했고요.
그리고 저는 커리어에서 탑을 찍고 싶고 그런 마음이 아예 없어요. 그 이유가 뭘까 혼자 생각해 본 적이 있는데 자꾸 ‘난 그냥 이렇게 태어났다’, ‘이렇게 살 운명이다’라고 정리되더라고요.
이 점도 신기해요. 내가 가진 많은 면을 금방 받아들이는 거요. 쉽게 받아들이지 못해 괴로워하는 사람들도 많거든요.
선택을 할 때 돈이나 커리어 등이 중요한 기준처럼 보이진 않아요. 어떤 기준이 가장 중요한가요?
저를 정말 잘 알고 계시네요.(웃음) 진지하게 저는.. 사이비는 아니지만 ‘감’이 옵니다. ‘이거 하면 내가 좀 좋아하겠다’, ‘좀 재미있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당장 하고 싶다’ 이런 N차원적, 설득이 안되는 사고로 보통 선택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혼자 돌아다니고, 생각하고, 취미 생활을 하면서 무의식 속에 불호 필터들이 생겨서 자연스럽게 제가 좋아하는 것만 남게 되더라고요. 남한테 피해끼치지 않는 선이라면 저런 과정을 거쳐 내 감이 좋아하는 걸 하는 편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점, ‘그걸 하는 나 자신이 좀 멋있는가?’라는 마지막 관문을 꼭 통과해야 합니다.(웃음)
소화 님이 생각하는 멋이 궁금해졌어요. 어떤 것을 보면 멋있다고 느껴요?
저에게는 장엄한 자연의 멋짐이 1순위예요. 이와 관련된 일화가 하나 있어요. 작년에 건축 비엔날레를 혼자 보러 갔었는데, 정말 멋있어서 벅찬 마음으로 나왔죠. 그날 날씨가 엄청 좋아서 산책할 겸 근처 산에 놀러 갔는데, 그 산에서 보는 햇빛이 수많은 작품보다 훨씬 멋있더라고요.
인간의 세계로 들어와 인공물의 범주에서는 ‘진심이 담긴 꾸준함’이라는 가치관이 전달될 때인 것 같아요. 좀 재미없어도 진지하고 섬세하고 성실한, 선비 바이브를 좋아하거든요. 또 다른 기준이 있다면 ‘자기가 좋아하는 걸 실현해 내는 능력’요. 저도 ‘내 것’을 해나가면서 행복을 느끼는 성실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어떤 개념은 반대가 존재함으로써 선명해지는 것 같아요. ‘멋이 없다’는 건 어떤 모습일까요?
사람들이 다 한다고 따라하는 거요. 뛰어난 선구자들을 따라가게 되는 것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래도 무비판적으로 따라가는 건 멋이 없어요.
결국 멋있으려면 내 것을 해야 되네요. 근데 ‘내 것’이라는 게 진짜 어려워요. 온전한 내 것이 존재하는지도 잘 모르겠고요.
이와 관련해서 제가 진짜 좋아하는 사회적 개념이 ‘아비투스(Habitus)’예요. ‘피에르 부르디외’라는 프랑스 사회학자가 한 말인데요. 개인이 가지는 취향이 사회, 국가 환경에 따라 만들어진다고 해요. 그래서 저는 좋아하는 게 생기면 ‘이거 진짜 내가 좋아하는 거 맞나?’라고 한 번씩 의심해 봐요. 지금 사회적으로 다들 좋아하니까 그냥 휩쓸려 좋아하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보는 거죠.
사람마다 내가 원하는 나의 아이덴티티가 있잖아요. 그 아이덴티티를 지켜나가는 데 유리한 방향으로 일, 주변 사람 등 환경을 세팅하는 게 중요해요. 긍정적인 상호작용을 주고받을 수 있는 곳에 자꾸 나를 데려다 놓는 거죠. 내 성향과 취향을 내가 온전히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인간의 의지를 너무 믿는 거니까요. ‘어떤 도시에서 살 것인가’까지는 생각 못 해봤는데, 같은 맥락인 것 같아요.
만수: 제가 알기로 브루디외가 ‘아비투스’라는 개념을 생각하게 된 계기는, 본인은 유복한 집안에서 자라지 않았고 축구를 좋아하는데 막상 대학원에 가보니 유복한 집안에서 자란 친구들은 축구를 별로 좋아하지 않더라는 거예요. 지적 수준은 높은데 취향은 노동계층인 데에서 괴리를 느끼고 ‘그렇다면 나의 취향은 어디서 온 걸까’ 탐구하기 시작했지요.
방금 이 대화 좀 멋있었다. 우리 누가 찍어줘야 되는데, 이거 거의 <알쓸신잡> 아니에요?(웃음) 저는 진짜 맨날 이런 생각을 해요. 사람들과 대화하다가 재밌거나 유익한 이야기가 나오면 제발 누가 이거 좀 녹화해 주면 좋겠다는 생각요.
어떤 삶을 살아가고 싶어요?
SNS에서 본 문구인데, 삶을 꼼꼼하게 누리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꼼꼼히 누린다는 건, 제 선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많이 선택하는 거예요. 다양한 책, 영화도 많이 보고요. 얼마 전에는 금속공예를 시작했어요. 욕심이 많다 보니 앞으로도 경험해 보고 싶은 게 정말 많아요. 제 마음이 가는 새롭고 다양한 것들을 계속 배우며 살고 싶어요.
앞으로 대책 없이 도전해 보고 싶은 것이 있다면?
새로운 학교 가기! 한국 학교에서밖에 안 배워봤으니까 다른 환경에서도 한번 배워보고 싶어요. 새로운 무언가를 배우는 건 늘 재밌어요. 4년 내내 교양 수업만 듣고 싶은 느낌 아시나요.(웃음)
이전 인터뷰이가 남긴 릴레이 질문이 하나 있어요. “당신이 생각하는 성공의 모습은 무엇인가요?”
가파른 상향 곡선을 바라며 사는 것이 아니라 완만한 균형을 이루며 사는 삶요.
아직 누구일지는 모르지만 다음 인터뷰이에게도 릴레이 질문을 하나 남겨 주세요.
텍스트로 적으면 어떻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왜 사세요?”라는 질문을 남기고 싶어요. 사람들에게 항상 물어보고 다니는 질문 중 하나예요. 저는 아직 딱 마음에 드는 답을 못 찾았거든요.
<대화의 희열>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봤는데, 질문의 답을 잘 못 찾을 때는 어쩌면 질문이 잘못된 것일 수 있대요. ‘인생의 의미가 뭘까?’가 아니라 ‘내 인생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까?’라는 질문이 더 적절할 수 있는 거죠. 둘은 완전히 다른 질문이거든요.
“그렇게 느낀다고밖에 말을 못 하겠어요. 더 좋은 표현이 생각나질 않네요.”라고 말했을 때
‘느낀다’는 것만큼 정확한 표현은 없다는 답을 들었어요.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무언가를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된 것이 더 문제라고요.
나의 감각을 무디게 만드는 방향이 아니라,
더 깨끗하고 맑게 느끼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오늘의 인터뷰이가 멋있었어요.
‘내 것’은 내가 무언가를 느낄 수 있는 상태일 때 만들어집니다.
내가 느끼는 것을 자꾸만 뒤로 하고, 지금 그럴 때가 아니라고 말하고,
꺼내보지 않을 때 우리는 ‘내 것’과 멀어지죠.
사실 많은 일들은 어떤 느낌에서 출발하잖아요.
내가 가진 모서리를 그저 느끼고, 긍정하고, 보여줄 때
나의 멋과 가까워질 거예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