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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희 Jan 20. 2024

다정한 마음이 중요한, ASMR 유튜버 이혜랑

“네 인생이라는 영화의 주인공은 너야. 주인공 자리를 너무 쉽게 남에게 내어주지 마.”

때로 말을 할 때마다 주어 자리에 '나'보다 다른 사람을 더 많이 둘 때가 있다.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쓰며 내 존재를 지우는 줄도 모른 채 지우고 있을 때, 누군가 나에게 이 말을 해주었다.

주변에 삶의 주인공으로 오롯이 서있는 사람이 누가 있는지 생각해 보다가, 문득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낸 오늘의 인터뷰이가 떠올랐다. 타인의 시선보다는 나의 관점을, 누군가의 인정보다 스스로에게 다정한 마음을 더 중요시하는 사람. 나와는 다른 결로 시간을 쌓아 온 인터뷰이가 보고 싶어서, 8년 만에 다시 인터뷰를 청했다.


<사소한인터뷰> 414번째 주인공, 이혜랑




8년 만에 다시 <사소한인터뷰>로 만나게 되어 반가워. 오랜만에 <사소한인터뷰> 독자들에게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해.


안녕하세요. <Rang ASMR> 유튜버이자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고 있는 이혜랑입니다. 저를 이렇게 각 잡고 소개해 본 적이 없어서 너무 어색하네요.(웃음)


<사소한인터뷰>의 공식 질문이 자신을 한 문장이나 한 단어로 표현하는 거야. 근데 일러스트레이터이기도 한 너에게는 특별하게, 자신을 가장 잘 표현하는 색이 무엇인지 물어보고 싶어.


오, 나 얼마 전에 비슷한 질문을 받았어! 동생이 색 명상을 공부하는데, 자신을 떠올렸을 때 생각나는 색을 말해보라고 했거든. 그때 내가 핑크색, 보라색, 파란색을 꼽았어. 핑크색은 발랄하고 산뜻해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색이고, 파란색은 평화롭고 안정된 느낌, 보라색은 오묘한 느낌이라 좋아. 은연중에 내 그림이나 영상에도 이 색들이 많이 녹아 있는 것 같아.


스물여섯 랑이가 직접 그린 그림. 우리가 대화를 나눈 날의 분위기처럼 따뜻하다.



나다운 길을 선택해 온, 스물여섯부터의 시간들


그동안 정말 많은 이야기들이 쌓여 있을 것 같아. 지난 인터뷰를 오랜만에 읽어보니 어땠어?


“다시 10대로 돌아간다면?”에 대한 내 답을 보고 가장 놀랐어. “아예 일찍부터 미국에 가서 애니메이션 만들 수 있는 3D 기술을 배우고 공부할 것 같아. 그래서 내가 상상하는 바가 움직이는 형태로 재현되는 기술을 터득하고 싶어. 나중엔 디즈니, 픽사에 들어갔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라고 답했거든. 근데 그때 내가 하고 싶다고 했던 일을 요즘 영상 작업을 하며 실제로 시작했어. 앞으로도 3D 모델링 기술에 대해 더 많이 배우고 역량을 키우고 싶어.


나는 그때 사소한 것에 잘 감동하고 엉뚱한 상상을 많이 하던, 너의 맑은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지금도 나는 그냥 파란 하늘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너무 좋고, 여전히 사소한 것에 감동을 잘 받아.


너의 이야기를 듣고 생각난 건데, 컨셉추얼한 영상을 만들면서 늘 '분위기가 따뜻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내가 크리스마스를 엄청 좋아하거든. 계절과 상관없이 크리스마스 관련 콘텐츠를 맨날 봐. 크리스마스 생각했을 때 머릿속에 딱 떠오르는 따스한 색의 조명, 트리, 난로, 큰 창문, 포근한 눈 등이 정말 좋아. 궁극적으로는 그런 따스한 분위기의 영상을 만들고 싶어. 꼭 크리스마스가 아니더라도 ‘평온한 따스함’을 녹이고 싶다는 마음이 큰 것 같아.


지금도 "내가 상상하는 크리스마스 마을에 가고 싶다"라는 말을 맨날 해. 내년 겨울에는 내가 꿈꾸는 분위기와 닮은 유럽의 어느 마을에서 크리스마스를 꼭 보낼 거야.(웃음)


랑이의 행복 버튼, 푸른 하늘과 새하얀 함박눈 그리고 아늑한 크리스마스 ;)


의류 벤더사를 다니다가 유튜버가 되기까지의 긴 과정을 들어볼 수 있을까?


의상디자인을 전공했고 해외 사람들과 얘기하는 일이 재밌을 것 같아서 의류 벤더사 해외 영업 일을 선택했었어. 막상 해보니 그 일을 잘하려면 성격이 굉장히 강인해야 하더라고.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종류의 일이 아니었고, 그렇다고 내 본질적인 성격을 완전히 바꿀 수도 없다 보니 빠르게 지쳐갔어.


그만두고 나서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그냥 해보자’라는 마음으로 일러스트레이터로 자유롭게 일했어. 워낙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니까 시작한 일이었는데 프리랜서로도 내 생활을 유지할 수 있겠더라고. 회사 월급만큼은 아니더라도 좋아하는 일을 하며 밥벌이를 할 수 있게 되니 굳이 다시 회사에 들어갈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 같아.


ASMR 유튜브도 좋아하는 걸 해보자는 마음의 연장선이었어. 워낙 ASMR을 많이 보고 좋아하다 보니 '나도 한번 해볼까'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해본 거지. 거창한 계획이나 큰 꿈이 있어서 마음먹고 시작했던 건 아니야.


벌써 채널을 열고 운영한지 5년이 넘었어. 가벼운 마음으로 이어가기엔 유튜브 운영이 생각보다 인풋이 많이 드는 일이잖아. 언제부터 이 일을 본격적으로 해봐야겠다고 생각했어? 


처음에는 조회 수 100회만 넘어도 신기하고 좋았어. 조회 수가 많이 나오면 당연히 좋지만, 그것보다 그냥 재밌으니까 계속 하게 되더라고. 재밌으니까 영상 작업에 자연스럽게 시간을 더 쓰게 되고, 시간을 쓰는 만큼 나의 수입의 비중도 유튜브에 더 쏠리는 거지. 이왕 하는 거 제대로 공을 들여 만들고 싶은 마음이 들면서부터 일주일에 한 번씩 업로드 주기를 지키며 운영하게 된 것 같아. 


처음엔 너의 얼굴이 나오는 영상이다 보니 부담스럽진 않았어?


당연히 쑥스럽긴 했지. 근데 또 가만히 생각해 보면 쑥스럽다고 못하겠는 일은 아닌 거야. 집에 숨어 있는 수줍은 관종이랄까.(웃음) 내 콘텐츠를 알리고 싶고 돈도 많이 벌고 싶은데 사람들이 다 나를 몰랐으면 좋겠는 마음이야. 그런 나에게 유튜브가 딱 좋은 게 사람들을 일일이 대면하지 않아도 되고, 마치 소꿉놀이처럼 내가 하고 싶은 걸 찍어서 보여주면 되잖아. ‘I 성향’인 나에게 최적화된 일이지.


"소꿉놀이" 하듯이 한다기엔 너무 고퀄이지만, 이 작업이 그만큼 순수한 재미의 영역.


영상 기획부터 촬영, 편집까지 혼자 다 하잖아. 이 일이 또 어렵게 생각하면 한없이 어려운 일이거든. 새로운 일을 빠르게 배우는 편이야?


아니, 난 진짜 느리게 배우는 편이야. 영상의 모든 것을 마스터하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당장 필요한 기술을 익혀 가는 거라 무리 없이 할 수 있는 것 같아. 예를 들어 잡음을 없애는 방법을 알고 싶다면 그것만 유튜브 등을 통해 검색해서 배우는 거지.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영상을 만들 때마다 필요한 기술 위주로 배우며 하고 있어.


그래도 내 머릿속에는 더 많은 상상들이 있는데, 기술이 부족해서 구현하지 못할 때 엄청 답답해. 예를 들어 내가 원하는 크리스마스 마을의 이미지가 있는데 머릿속에 있는 그림만큼 만들어내지 못할 때 답답함이 크지. 그걸 해소하려고 버추얼 디자이너인 친구의 도움도 받고, 3D 모델링도 열심히 배우고 있어. 나중에 유튜버 외에 어떤 일을 하게 될지 모르겠지만, 툴 하나를 확실히 배워 두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해.


왠지 네가 민망해할 것 같긴 한데, 나도 너의 ASMR을 틀어 두고 잠을 청하는 날들이 정말 많아. 어떤 피드백이 너를 힘나게 해?


“나도 너무 힘들었는데 잠 오는 데 도움이 됐다”라며 고마운 마음을 전하는 댓글을 보면 뿌듯하고 힘이 많이 나. ASMR 자체가 누군가의 행복하고 편안한 숙면을 바라는 마음으로 만드는 영상이다 보니, 그 과정 자체로도 나에게 위로와 힘이 돼.


오늘 너의 이야기를 들으며 여유롭게, 하고 싶은 일들을 차분히 해나간다는 느낌을 받았어.


그런가?(웃음) 나한테 일이라는 건 대단한 성취 이전에 내가 좋아하는 걸 하는 것에 가깝긴 해.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일이기 때문에 진짜 잘 하고 싶은 욕심은 꽤 있어. 다만 그 일로 큰 업적을 쌓고 업계에 한 획을 그어보겠다는 비장한 마음은 없지. 내가 머릿속으로 기획한 일을 실제로 완성도 높게 구현해낼 수 있으면 좋겠어.


얼마 전 ‘퍼스트 클래스 밤 비행기’ 영상을 만드는 과정이 되게 힘들었는데 나왔을 때 너무 뿌듯했고 성취감이 엄청 높았어. 한동안 달렸으니까 잠깐 쉬고, 다음에 또 내 상상을 구현해 봐야지 하고 기대 중이야.



나만의 페이스에 맞춰 모든 걸 차분히 하나씩 해나가는 중




이전 인터뷰이가 남긴 질문이 하나 있어. “본인이 구름 속에서 1시간 동안 있을 수 있으면 뭐를 볼 것 같나요?"


질문이 너무 귀엽다.(웃음) 뭉실뭉실한 구름 속에 푹신푹신하게 누워있을 수 있다면.. 그럼 하늘을 가만히 내내 바라보다가 날아오는 새들이 어떤 종류인가 구경도 하고 지나가는 비행기도 보고 그냥 하늘 위에 날아오는 모든 걸 가만히 지켜볼 것 같아.


다음 인터뷰에게도 자유롭게 질문 하나 남겨줘 


오늘 다정함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으니 “요즘 스스로에게 다정한가요?”라는 질문을 남길게!


그 질문에 대한 너의 대답은?


살면서 점점 더 스스로에게 다정해지는 법을 터득하고 있는 것 같아.


어렸을 때는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밝고 긍정적이라고 말하고, 나도 그렇게만 생각했어. 나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면서 ‘나는 생각보다 세심하고 감수성이 높아서 좋은 면도 많지만 깨지기 쉬운 면도 있구나’라는 것을 알게 된 것 같아. 


동시에 내 안에 있는 단단함 덕분에 잘 깨져도 혼자 잘 일어나. 예전에는 ‘나는 왜 이렇게 여릴까’, ‘왜 이렇게 단단하지 못할까’라고 생각했다면 지금은 그 모든 면이 나라고 받아들였어. 대신 나의 좋은 점을 스스로에게 상기시키고 나의 부족한 점을 발견하면 다듬으려고 해.


요즘은 다정한 게 왜 이렇게 좋은지 모르겠어.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고 환대해 주는 시간이 참 소중한 것 같아.


그치. 다정함은 그냥 좋아. 이왕 말할 거면 따스하게 말을 주고받고 싶어.


마지막으로 <사소한인터뷰>의 공식 질문인데, 1년 뒤 너의 모습은 어떨 것 같아?


나도 정말 궁금한데(웃음) 지금보다 마음의 여유는 한 겹 더 쌓이고 몸은 바빠지는 나? 그렇지만 좀 더 일찍 자서 좀 더 건강하게 생활하는 나를 기대해 봅니다.



오롯이 주인공으로 서 있는 삶에는 어쩌면 대단한 비밀이 있다기보다,
내가 필요로 하는 일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허용해 준
다정한 마음이 있을지 모른다.

내 모습을 비추는 거울을 남이 아닌 나의 손으로 꼭 쥐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다정하게 바라보는 마음.

그 다정한 마음을 토대로 자기만의 내러티브를 써 내려갈 때
우리는 인생의 주인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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