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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희 Mar 08. 2017

맑고 따뜻한 꿈을 그리는, 이혜랑

2015년 9월 20일의 기록

어느 순간부터 SNS에 따뜻한 느낌의 그림들이 하나 둘 올라오곤 했다. 평소 그림에 깊은 관심이 없던 나였기에 대수롭지 않게 스윽 넘겼다. 그렇게 또 무심히 넘기던 어느 날 문득, 그림 하나가 시선을 잡았다. 그림 속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작은 새싹이 있었고 남자는 물을 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손에 든 물통에는 'trust'라는 글자가 적혀있었다. 화려한 그림은 아니었다. 손편지 같은 느낌의 손그림 하나. 많은 서툰 말들을 차분히 그려낸 그 느낌이 좋았다. 어렸을 때도 끄적끄적 기분 좋게 그림을 그려 선물해 주던 친구는 이제 따뜻한 그림들로 나의 SNS를 채워주었다. 그 소박한 따뜻함을 함께 나누고자 그녀의 그림들과 이야기를 독자 여러분께도 선물해보려 한다.  




Q. 요즘 뭐하고 지내?


이렇게 사람들 만나고, 맛있는 거 먹고, 그림 그리고, 혼자 놀러 다니면서 지내.(웃음) 전공이 의상디자인 학과라서 벤더 해외영업 쪽 자소서도 쓰고.


- 벤더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있어?


나도 아직 실무를 해본 적은 없어서 아주 세밀하고 정확히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우선 미국이나 유럽 등의 바이어(브랜드)들을 상대하는 회사라고 보면 돼. 바이어에게 주문받은 제품을 총괄 생산하고 납품하는 곳이 벤더야. 바이어 측에서 주문을 할 때는 보통 원하는 스타일의 초안만을 주고, 이후 벤더에서 그 요구에 맞게 제품을 생산하는 거지. 사실 벤더마다 조금씩 하는 일이 달라서, 내가 얘기한 건 전반적으로 벤더에서 하는 일이라고 보면 될 것 같아.


Q. 요즘 친척들이나 주변 사람들이 취업관련 질문을 자주 해서 좀 불편하지 않아?


일단 그런 거 잘 안 물어보시는 것 같아. 그래서 나는 친척들 만나러 가도 불편한 게 하나도 없어. 그리고 만약 누가 나한테 요즘 뭐 하는지 물어본다고 해도 별로 불편하지 않고 그냥 밝게 취업 준비한다고 말해.


Q. 그럼 인터뷰를 시작하기에 앞서, 본인을 한 마디로 소개해본다면?


(어색한 걸 참지 못하는 인터뷰이는 아아아악 비명을 질렀다..)

음.. 친구인 네가 더 잘 알지 않을까?(웃음)


- 그럼 너를 색으로 표현해보면 어떤 색에 가까워?


여러 가지 다?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어서 무지개 아니면 알록달록.



PART 1. 그녀가 그리는 그림


Q. 그림은 언제부터 그렸어?


그림을 따로 배운 적은 없지만, 어렸을 때부터 되게 좋아했던 것 같아. 초등학생 때 친구들에게 세일러문이나 웨딩피치를 그려주는 것도 좋아했고, 미술시간을 제일 좋아하기도 했고. 미술시간에 칭찬받으면 엄청 기뻐서 엄마한테 가서 자랑하고 그랬어. 그냥.. 미술을 좋아하게 태어난 것 같아.(웃음) 미술이나 인테리어, 클래식 같은 걸 좋아하시는 엄마의 영향을 받은 것 같기도 해.


Q. 한희: 의상디자인을 하면 기본적으로 그림을 그리지 않나요?


제가 비실기로 들어갔거든요. 그래도 인체 스케치나 크로키라고 모델 포즈를 보고 그 자세를 빠른 시간 안에 표현하는 걸 잘 했어요. 어려서부터 워낙 사람 그리는 것을 좋아했던 게 입학할 때 많은 도움이 됐던 것 같아요. 아무래도 실기를 하고 들어온 사람들은 딱 눈에 띄긴 하지만, 의상디자인 학과라고 해서 그림을 다 잘 그리진 않아요. 그림은 부족하지만 옷을 정말 좋아해서 온 사람들도 있고요. 물론 그림을 잘 그리면 의상디자인을 하는 데 플러스 요인이 되긴 하지만 필수 요소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저는.(웃음)


Q. 그림을 그리는 이유가 있다면? 그림의 매력은 뭐야?


먼저 그리게 된 이유는 그냥 내가 좋으니까. 음악 들으면서 아무 생각 없이 그림 그리는 데 몰두할 수 있는 것도 좋고,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하루 종일 내 시간을 투자해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나 자신도 좋아. 그리고 사람들이 내 그림을 보고 위로를 받는 것도 좋아.


Q. 직접 그린 그림을 블로그에 올리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언제부터 올리게 되었고 그 계기가 뭐였어?


2012년도, 대학교에 들어와서부터 블로그를 시작했어. 그림을 올리기 위해서 블로그를 만든 건 아니었고, 그냥 내가 좋아하는 느낌이나 감성을 모아둘 수 있는 ‘내 공간’이 필요해서 만들게 됐어. 그래서 내 블로그 제목에도 ‘마음을 그리는 공간’이라고 쓰여있어. 그림이든 글이든 음악이든 뭐든 다 올리는 공간으로 만든 거지.


그렇게 시작했는데, 매번 노트 구석에 그리고 버려지는 자잘한 그림들이 아까워서 블로그에 하나 둘 올리게 됐어. 그동안 쉽게 그린 그림들이 소중하다는 생각을 못 해서 ‘또 그리면 되니까’하고 그냥 버리는 경우가 많았거든. 기록해두려는 목적으로 그림들을 올렸기 때문에, 맨 처음 글을 보면 공책에 낙서처럼 끄적이던 그림이 올려져 있어. 그런 내 그림들을 보고 사람들이 예쁘다고, 좋다고 해주니까 점점 욕심이 생기더라고. 그렇게 그림 그리는데 더 많은 시간을 들이게 되고 꾸준히 그림들을 올리게 됐어.


블로그 활동 초반에 올린, 끄적이던 그림들


Q. 네이트 판에 직접 그린 그림이 소개된 적도 있었지?


응. 사람들이 내 그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서 네이트에 그림을 올렸었는데, 그게 소개가 됐었어. 그때 사람들이 ‘남자친구랑 싸웠는데 그림을 보고 기분이 좋아졌다’ 등의 긍정적인 피드백을 해주니까 뿌듯하더라고. 욕심도 나고. 그 이후로 더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공유하게 된 것 같아.


Q. 그때 ‘취준생의 마음이 따뜻해지는 그림들’이라고 소개됐는데, 스스로 생각하는 본인의 그림 스타일과 비슷한 것 같아?


그 제목을 직접 쓴 건 아니지만 비슷한 것 같아. 나는 항상 그림을 소개할 때 ‘저는 따뜻한 그림 좋아해요. 다듬어지지 않았어도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그린 따뜻한 그림을 좋아해요.’라고 쓰거든.


Q. 자주 그리는 주제로는 어떤 것들이 있어?


반려견, 예쁜 공간에서 생활하는 모습, 연인 사이의 감정, 내가 꿈꾸는 것 등을 그리는데 그중에서 반려견을 가장 많이 그리는 것 같아. 주로 내 그림엔 반려견, 연인, 사람이 많이 등장해.


Q. 그 주제들을 자주 그리는 이유는?


먼저 반려견은 내가 강아지를 미친 듯이 좋아해서! 내 꿈 중에 하나가 강아지를 좋아하는 남자랑 결혼해서 같이 여행 가는 것이기도 해. 그리고 믿음, 사랑, 싸운 후에도 보고 싶은 마음 등 보이지 않는 감정을 그림에 보이게 하고 싶어. 따뜻한 그림을 통해 사람들이 내가 그린 따뜻함을 함께 느꼈으면 좋겠어.


신뢰에 대한 생각을 담은 그림, <믿음이란>


Q. 얼마 전 참여한 전시회에 대해 설명해줄 수 있어?


루브비앤씨에서 주최하는 겟썸(GetSome)이라는 전시회였어. 일러스트 전시도 하고 일러스트로 만든 상품도 판매하는 팝업 전시회인데, 게릴라성으로 일주일 동안 진행했어. 주최 측에서 작가들을 발굴할 목적으로 여는 전시회 같아.


Q. 어떻게 참여하게 된 거야?


우연인지 뭔지 네이트 판에 내 그림이 소개되고 나서 이메일이 몇 통 왔었어. 그때 프로젝트를 같이 해보고 싶다는 메일이 두 통 왔는데, 그중 하나가 이 전시회였어.


Q. 그때 전시할 작품 6점을 골랐는데, 많은 그림들 중 그 그림들을 고른 이유는?


우선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그림이 제일 좋은지 물어봤어. 전시회를 통해 사람들과 공유하는 건데 이왕이면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공감할 수 있는 그림을 전시하려고.. 그렇게 사람들이 좋아해 주는 그림과 내가 좋아하는 것 사이에 타협을 봐서 결정했어.


Q. 그럼 통틀어 네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은 어떤 그림이야?


강아지와 다락방에서 자고 있는 그림이 제일 맘에 들어. 반려견을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내가 좋아하는 느낌이 내 생각대로 잘 옮겨진 그림이었어. 생각했던 느낌이 한 번에 쫙 그려지면 정말 기분이 좋아. 그리고 처음으로 페인터라는 프로그램으로 그린 그림인데, 생각보다 표현이 잘 되어서 좋았어. 프로그램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지만 그냥 일단 해봤던 거거든. 그 외에도 따뜻한 느낌도 좋고 사람들도 많이 좋아해 줬고.


가장 좋아한다고 이야기한, 강아지와 함께 자는 그림


Q. 혹시 그림을 그리며 한계가 느껴질 때도 있어?


최근에 욕심이 생겨서 그림을 더 그리려 했을 때 좀 한계를 느꼈어. 내가 기술을 배운 적이 없어서 내 머릿속에 있는 것들이 다 표현이 안 되는 것 같아. 내 그림은 자연스럽긴 한데, 다른 작가들의 그림을 보면 내가 상상한 공간을 잘 구현한 것 같아 자극이 될 때도 있어. 물론 사람마다 스타일이 있고 장단점이 있는 거겠지만 말이야.


그리고 내가 기술적인 걸 배운 적이 없으니까 남들보다 작업 시간도 오래 걸리고 배우는 시간도 오래 걸려. 그럴 때 아쉬워. 그래도 계속 인터넷도 찾아보고 이것저것 알아보면서 배우려고 하고 있어.


Q. 앞으로 도전해보고 싶은 그림이 있다면?


내가 표현을 더 잘 하게 되면 깊은 바닷속을 그려보고 싶어.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에 나오는 장면이 내 상상 속 바다 모습과 비슷한데, 거기에 나오는 것처럼 해마와 같은 바다생물부터 그 느낌까지 그려내고 싶어. 조용하고 잔잔한 물 소리가 흐르는 것 같은 느낌.


또 하나는 진짜 큰 하얀 캔버스에 추상화처럼 아무 색이나 느낌 가는 대로 그리는 그림(!) 음악 들으면서 작업에 심취해서 물감 흩뿌리고, 춤추듯이 자유롭게 한 번 그려 보고 싶어.



PART 2. 기분 좋은 상상들


Q. 스스로 예술가적인 기질이 있다고 느껴?


항상 느껴.(웃음) 왜냐면 너무 공상, 엉뚱한 상상을 많이 해. 누가 바닷속에서 돌고래를 타는 상상을 하며 이런 주제로 매일 얘기를 할 수 있겠어. 또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다른 사람들보다 감동도 더 크게 받고. 이러다 보니 나는 뭘 해도 예술을 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Q. '예술가적'이라는 건 어떤 거라고 생각해?


그냥 사소한 것에 의문을 가지는 것. 혹은 사소한 것에 감동을 잘 느끼는 거 아닐까. 나의 큰 장점 중에 하나가 자고 일어나서 햇살만 봐도 하루 종일 기분 좋을 수 있다는 거야. 그런 행복한 장면들이 머릿속에 예쁘게 남고, 이를 통해 예쁜 그림이 나오는 것 같아.


Q. 주로 일상생활 속에서 어떤 상상을 해?


아까 도전해보고 싶은 그림 얘기할 때도 나왔지만 수영을 좋아해서 바닷속에 있는 상상을 많이 해. 아니면 꿈속에 나왔던 예쁜 장면들.


그런데 꼭 이런 디즈니 같은 상상들이 아니어도, 그냥 일상적이거나 이룰 수 있는 상상들도 많이 해. 예를 들어 나만의 다락방을 가지고 반려견과 함께 아침에 일어나는 상상, 강아지와 함께 꽃가게를 구경하는 상상 같은 거 말이야. 그리고 정말 아무도 없는 깊은 바다에서 나 혼자 수영하는 상상이나 패러글라이딩을 하는 상상, 독일에 크리스마스 같은 마을이 있다는데 크리스마스 날에 좋은 사람과 그곳에 집을 하나 빌려서 쿠키를 만들어 먹겠다는 상상 같은 것도 많이 해.


Q. 한희: 어쩌면 지금 당장 이룰 수도 있는 것들인데 상상만으로 그치는 이유는 꿈꾸는 것이 더 좋기 때문인가요?


음.. 현실적이고 사소한 상상들은 꿈이라기보다 나중에 할 것들이에요. 할 건데, 그냥 그걸 떠올리는 순간이 행복해요. 그래서 그 순간, 상상 속 예쁜 장면들을 그림으로 남기는 거죠.


패러글라이딩하는 상상을 실제로 터키에서 이룬 후, 정말 행복해 보이는 인터뷰이 :) 
아무도 없는 깊은 바다에서 수영하는 상상도 크로아티아 여행 중 아드리아해에서 이뤘다.


Q. 꿈도 많이 꾼다고 했었는데, 기억나는 꿈이 있는지?


선명하게 기억나는 꿈이 5개 정도 있는데... 근데 이게 되게 고민되는 게 내가 꿈꾼 것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면 ‘얘가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건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 그래서 나는 웬만하면 꿈 얘기들을 잘 안 하고 혼자 간직하는 편이야. 그래도 그 꿈들 중 하나를 이야기해보면, 내가 그린 그림 중에 ‘자전거를 타고’라는 그림이 있는데 그게 내가 꾼 꿈을 그려본 거야. 그림처럼 보라색, 하늘색 구름 위에 집이 있고, 그 위로 올라가려면 자전거를 타고 어떤 집에 가서 키를 받아야 해. 키를 받기 위해서 여행을 하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그렇게 그다음 위층의 세계에 가고.. 대충 이런 꿈이었어.


실제로 꾼 꿈을 그린 그림, <자전거를 타고>


또 하나는 집에 있는데 창문으로 빛이 피터팬처럼 막 들어오는 거야. 그래서 ‘이게 뭐지?’하고 밖에 나갔는데 하늘에 페가수스같이 별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었어. 이런 꿈을 꿀 때에는 정말 안 깨고 싶어. 아마 내가 이렇게 말로 하면 잘 안 와 닿을 건데 그냥 내 머릿속에는 이런 꿈들이 있어.


Q. 예전에 이런 꿈 이야기를 하게 된다면 아이들한테 해주고 싶다고 말했었지?


응! 아이들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우와(!) 하고 반응할 거 아니야.(웃음) 어른들한테 얘기하면 ‘아...’ 이런 반응뿐이지만, 아이들은 더 동화책 듣는 것처럼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라고 물어볼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러면 난 더 신나서 이야기해줄 수 있는 거지.


그리고 내가 디즈니나 픽사도 들어가고 싶어서 알아봤었는데 이야기만 하면 되는 스토리텔러라는 직업이 있더라고, 내가 스토리텔러가 된다면 이런 꿈들을 다 이야기해주고 싶어.



PART 3. 그녀가 그리는 꿈


Q. 이렇게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는데, 전공을 미술이 아닌 의상디자인으로 택한 이유가 뭐야?


옷도 좋아했으니까. 어릴 때부터 웨딩피치, 세일러문같이 예쁜 옷을 입은 캐릭터들 그리는 것을 좋아했고, 내가 코디네이터면 연예인들 시상식 때 어떤 드레스를 입힐까 하는 상상도 많이 했어. 하루는 갑자기 한예슬에게 입힐 핑크색 튜브탑에 벌룬 드레스로 되게 상큼한 드레스가 생각이 나서 자다 일어나서 바로 그리기도 했어. 그런 경험들로 인해 ‘아 나는 옷이 좋구나’, ‘그럼 의상디자인 학과를 가자, 가면 그림도 배울 수 있겠지’하는 생각이 들었어.


Q. 다시 돌아가도 같은 전공을 선택할 것 같아?


응! 전공 선택을 잘 한 것 같아. 후회가 없어. 정말 재밌었어.


Q. 한희: 좋아하는 그림을 직업으로 삼을 생각은 없나요?


일단 그림은 취미로 놔두고 싶어요. 사실 예전에 한창 사람들이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할 때가 있었어요. 그때 되게 기쁜 마음으로 그렸지만, 어느 순간 너무 귀찮고 내가 이걸 왜 그려야 되나 싶은 거예요. 그리고 싶은 그림이 따로 있기에 주문받은 그림을 안 그리고 싶을 때도 있었고요. 그림 그리는 게 좋지만 사람들이 계속 좋아해 주다 보면 계속 더 그려야 할 것 같고 더 욕심내서 잘해야 할 것 같고 부담이 커지는 거예요. 원래 아무 생각 없이 그리는 그림이 제일 좋았는데..


그리고 그림을 계속 혼자 집에서 그리면 어느 날은 우울할 때도 있어요. 그림에 빠져서 그리다 보면 집중하기 때문에 해가 다 떨어질 때까지 말도 안 하거든요. 이게 계속 반복되면 우울해질 수 있겠다 싶어요. 그래서 지금은 그림을 블로그에 올리고 사람들과 공유하는 정도로 놔두고 싶어요.


Q. 그럼 다음 진로로 벤더 해외 영업을 선택한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옷도 디자인하고, 해외의 많은 사람들을 상대할 수도 일이어서 한 번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어. 구체적으로는 내가 사람들 만나는 것도 좋아하고, 외국인들이랑 이야기하는 것도 좋아하고, 여행하는 것도 좋아하고, 글로벌한 거 좋아하거든. 이렇게 좋아하는 부분들이 벤더 해외 영업일에 적절히 섞여 있기 때문에 지금은 자소서 열심히 쓰고 있어.(웃음) 근데 밤도 많이 새고 일이 힘들다고 해서 좀 걱정되긴 해.


Q. 궁극적으로는 어떤 ‘일’을 하고 싶어?


지금은 회사에 들어가서 경력을 쌓으며 실무에 대해 배울 생각이지만, 나중에는 내 스타일대로 하고 싶어. 만약 해외영업일이 잘 맞으면 내 디자인을 가지고 세계의 많은 바이어들을 상대하면서 일하고 싶고, 해외영업이 맞지 않으면 나중에 나만의 공방을 갖든 해서 내 시간을 꾸려 나가고 싶어.

  

인터뷰 중 사진 찍는 것을 너무 어색해해서 겨우 건진 수줍은 사진 한 장


Q.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나무 같은 사람,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어. 세상에 안 좋은 일도, 나쁜 사람도 있지만 그런 것들에 영향을 받고 싶지 않아. ‘나도 독해져야 해’라고 생각할 필요 없이, 손해를 보더라도 그냥 내 주관대로 옆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계속 따뜻하고 싶어. 누가 나에게 와서 힘들다 얘기하면 들어주고 나의 힘든 점도 이야기하고 싶어. 또 지금처럼 여행도 하고 봉사도 하고 그렇게.. 대단한 사람 말고 따뜻한 사람이고 싶어. ‘쟤는 따뜻한 마음이 있어서 이야기하고 싶다’라는 마음이 들게 하는 편안한 사람.


Q. 보통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너는 어떤 사람이야?


일단 밝고 긍정적이고 잘 웃고 엉뚱한 사람?(웃음) 그냥 신나면 춤추고 별 걱정 없는 사람.


Q. 다른 사람들이 보는 너의 모습이 마음에 들어?


마음에 들 때도 있지만 가끔은 좀 그래. 밝고 잘 웃고 어린애 같을 때도 있지만 나도 생각 되게 많이 하고 우울할 때도 있거든. 사실 긍정적인 면만 보면 저 사람에게 무슨 아픔이 있는지 잘 모를 수 있잖아. 그런 사람들에게 “쟤는 저렇게 걱정 없이 살아서 좋겠다.”, “쟤는 온실 속 화초처럼 자라서 세상 잘 몰라.”라는 말을 들으면 속상하지. 진짜 어려운 사람들만큼 힘들었던 건 아니지만, 사람의 고통과 아픔에는 무게가 없다고 생각하거든. 근데 나를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평가할 때 좀 속상한 것 같아.


Q. 예전에 강해지고 싶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잖아.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없어?


근데.. 이미 강한 것 같아. 그때 강해지고 싶다고 했던 말은 사람들에게 안 좋은 이야기를 하거나 나의 생각을 전달할 때, 상대방이 다치지 않고 나도 화내지 않고 현명하게 이야기하고 싶다는 뜻이었어. 즉 할 말을 ‘잘’, 기분 안 나쁘게 하고 싶어. 그리고 아까 강하다고 말한 이유는 난 외유내강인 것 같아. 겉으로만 보면 너무 여리고 맨날 웃기만 할 것 같은데, 주위에 잘 휘둘리지 않고 꿋꿋이 내 생각대로 나가는 것, 나쁜 일 있어도 금방 혼자 극복하는 걸 보면 강한 것 같아.


Q. 할 말을 잘 하는 법을 배워가는 와중에 겪는 시행착오가 있다면?


그동안 거의 화도 안 내고 웃기만 하다 보니까 어떻게 화를 내야 하는지 잘 몰랐어. 그래서 처음에는 그냥 무조건 ‘나도 화낼 수 있는 사람이다’, ‘나도 이런 불같은 성격이 있다’는 걸 보여줄 생각에 버럭 화를 낼 때도 있었던 것 같아. 현명하게 화를 다룰 줄 알아야 하는데 말이야. 그러다 보니 화를 안 내던 사람이 갑자기 화를 내면 사람들이 더 상처받잖아. 그렇게 상처를 줬던 적도 있는 것 같고.. 그런데 이제 감정 조절을 잘 해서 할 말을 잘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Q. 한희: 혹시 사람한테 상처를 받아 본 적이 있어요?


네, 상처받아봤죠. 제 기억 속에 가장 큰 상처는 연인 사이에서 받았던 상처였어요. 그 상처를 받고 나서 많이 힘들어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오히려 그 사람이 더 안타깝다는 생각요. 자기 주변에 좋은 사람들, 아껴주는 사람들이 있는데 왜 저렇게 함으로서 좋은 사람들을 잃어야 할까 안타까웠어요.


그때 들었던 또 다른 생각은 ‘상처를 받는 건 진짜 아픈 거구나’, ‘상처를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의도치 않게 줄 때도 있겠지만, 그럴 때 최대한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가 되지 않도록 하자.’는 거였어요. 그 이후로 아까 말씀드린 나무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예요. 바보같이 막 퍼주며 지내자는 게 아니라, 상처를 받더라도 내 주관 안에서 따뜻하게 진심으로 대하자는 거죠. 세상 살기가 힘들다고 사람을 너무 계산적으로 대하지 말고, 내 주변에 있는 좋은 사람들을 믿고 현명하게 사람들을 대해야지라는 생각을 했어요. 상처를 준 사람들 때문에 제 모습이 변하는 게 너무 억울하잖아요. 제 생각을 잃는 게 싫어서 상처를 받더라도 그냥 내 식대로 하자라고 마음먹었어요.


Q. 그래도 이를 계기로 인간관계에 대한 가치관이 바뀐 부분이 있어?


현실적으로 말하면 사람은 바꾸는 거 아니라는 것. 예전에는 내가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모든 사람들이 이런 내 마음을 알아주고 좋게 변할 줄 알았어.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내가 잘 설득하면 될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 이제 연인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상처를 겪고 나니까, ‘사람들은 다 다르고 내 마음대로 사람들을 바꿀 수는 없구나’라는 걸 깨달았어.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내가 전부 다 감싸 안고 갈 필요 없구나, 모든 사람들에게 내가 좋은 사람이 될 필요도 없고, 그렇게 될 수도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이제는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들은 남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떠날 수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여유가 생겼지.


Q. 이제는 어떤 사람이 끌려?


따뜻하고 담백한 사람. 그리고 사소한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좋아. 같이 공감할 수 있는 사람. 예를 들어 내가 “이거 한 번 봐봐.”라고 이야기했을 때, “이 순간이 이렇게 좋은 줄 몰랐는데 네가 얘기하니까 진짜 좋은 것 같아.”라고 대답해주는 사람. 그리고 어떤 걸 할 때 투박하고 잘 못해도 그 사람에게 느껴지는 따뜻함과 정이 더 중요한 것 같아.




Q. 인터뷰를 마친 후 본인을 한 마디로 다시 정의해본다면?


아직도 잘 모르겠는데..


- 일동: 영화 <인사이드아웃>에 나오는 빙봉 같아요. 아직 머릿속에 빙봉이 사는 것 같은 느낌(웃음)


Q. 릴레이 질문. 다시 10대로 돌아간다면?


차라리 아예 일찍부터 미국에 가서 애니메이션 만들 수 있는 3D 기술을 배우고 공부할 것 같아. 그래서 내가 상상하는 바가 움직이는 형태로 재현되는 기술을 터득할 수 있지 않았을까. 나중엔 디즈니·픽사에 들어갔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Q. 죽고 난 후 묘비명에 어떤 말을 남기고 싶어?


그냥 행복하게 잘 살다 감? 죽을 때 ‘하하하 정말 잘 살았네.’하며 웃고 싶어.(웃음)



그녀는 자신이 꾼 꿈과 상상들에 대해 어린아이들과 이야기하는 것이 더 좋다고 했다. 예를 들어 어떤 사탕을 먹었더니 무지개가 보였다는 것과 같이 허무맹랑한 '상상 속 이야기'는 보통 어른들에게 대화 주제조차 되지 못한다.

어린 시절의 상상이라고 하면 황당무계한 것들이 참 많았다. 현실감도 없는 막연한 상상만으로도 마냥 즐거웠던 것 같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현실적인 고민들이 그 자리를 채워갔다. 10년 후에 나는 돈을 얼마나 벌 것인가, 당장 주어진 일이 잘못되면 어떻게 될 것인가 등의 상상 말이다. 삶이 지루해지고, 불만이 쌓여가기 시작한 것은 엉뚱하고 신나는 상상들을 잃어버리게 된 그때부터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가 어린아이처럼 맑고 밝아 보이는 이유는 어린 시절 그 엉뚱한 상상들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앞으로도 그녀의 기분 좋은 상상들이 그녀의 삶에 어떤 활력을 불어넣어 줄지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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