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자를 빌리러간 날의 대화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별거 아닌 순간들에 대하여

by 정원

포토부스 매장 오픈을 2주 앞두고 있는 초보사장인 나는 오늘 하루도 바쁘게 살았다.


아침부터 내 매장에서 가벽 공사에 대한 미팅을 하고,

눈여겨보고있던 자판기 실물을 보러 하남까지 빗길을 뚫고 갔다가,

고속터미널의 꽃도매시장으로 이동하여 촬영소품인 장미꽃 조화를 알아봤다.


마지막에 잠깐 다시 매장으로 돌아가야했는데, 내가 구매할 예정인 자판기가 우리 매장의 작은 문을 통과할 수 있는지를 보기 위해서였다.

문의 사이즈는 최소 81cm가 되어야 어찌저찌 자판기를 넣을 수 있었기에, 급한 마음을 안고 후다닥 다시 매장으로 문 사이즈 측정을 하러 갔다.


가끔 이렇게 정신없이 시간에 쫓겨 지내다보면 가장 단순하고 기본적인걸 잊을 때가 있다.

오늘의 나에게 그건 바로 줄자였다.


서울에 갑작스러운 기습 폭우로 뉴스가 쏟아져나오는 저녁, 나는 매장 앞에 덩그러니 혼자 우산만 들고 서있었다.

줄자도 없이 매장 문 앞에 서서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나 자신이 웃겼다.

압구정 로데오쪽엔 다이소도, 오피스디포도 없었다.


한참을 물끄러미 서서 고민하던 내 눈에, 같은 골목의 건축인테리어 사무실 겸 카페가 보였다.

건축, 인테리어, 자재, 그리고 커피 라는 단어들이 매장유리에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부끄러움을 무릎쓰고 유리문을 열고 들어갔다.


딸랑.


내부에는 커피머신, 커다란 책상, 그리고 티비가 한대 있었다.

70대로 보이는 멋진 수염과 안경을 쓰신 사장님이 커피를 마시며 티비를 보고계셨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정말 죄송한데요.. 혹시 줄자를 잠깐만 빌릴 수 있을까요?"


내가 같은 골목에 가게를 열게 되었다는 사실을 덧붙이려던 순간, 사장님은 시원스러운 한마디를 내뱉으며 오래된 줄자를 건네주셨다.


"그러세요."


기쁜 마음에 덥석 받아들고 감사하다고 외치며 뛰어나가는 날 보는 사장님은 허허 웃으셨다.

빗속에서 우산도 제대로 못쓰고 줄자로 문을 열심히 쟀다.

사장님의 줄자는 세월이 그대로 빛바래져 있었다.


다행히 문의 간격은 딱 자판기를 통과시킬 수 있는 정도였고, 이제야 한숨 놓은 나는 고개를 둘러 주변을 살폈다.

인테리어사무실 겸 카페의 사장님은 어느새 나와서 슬쩍 슬쩍 날 쳐다보며 가게앞 화분들을 괜히 들여다보시는 척 하셨다.

혹여나 자신이 내어준 소중한 줄자를 내가 가져갈까 걱정되실까봐, 한달음에 다시 사장님께 달려갔다.

감사하다며 다시 줄자를 드리고, 커피 한잔을 살 수 있냐고 여쭈었다.


사장님은 또 간단하게 승낙했다.

"그래요."


커피를 내려주시는 약 2분간 우리의 대화는 꽤나 정겹고 따뜻했다.

내가 첫 사업을 하는거라고 말하자 사장님은 한마디 하시고 껄껄 웃으셨다.

"잘했네요."


그런 짧은 말들 속에 내 마음에 꽂힌 말이 있었다.

"하시다가 건축이나 목공이나 어려운거, 잘 안되는거 있으면 와요. 내가 많이 도와줄게요."


도움을 받을 구석이 생겨서 기쁜게 아니였다. 그냥 누군가가 잘되길 바라는 마음, 도와주고싶다는 마음, 그게 느껴져서 마음 한켠이 찡했다.

갑작스러운 이 대화는 아마도 사업을 시작한 나에게 꽤 오랫동안 힘이 되어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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