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토마린 - 파라스 데 레이
포르토마린까지 오는 길에 낮의 태양 아래서 너무 고생을 해서 이 날은 이른 아침 길을 나섰다.
강가에 안개 가득한 포르토마린 풍경이 오싹한 느낌을 줬다.
어제의 해는 없었던 일처럼 아침 내내 안개가 가득했다.
전날 이른 저녁을 먹고 아침을 먹지 않은 상태로 안개 자욱한 길을 걸으니 더 빨리 지치는 느낌이었다.
걸은 지 2시간 만에 발견한 알베르게 겸 식당.
잔뜩 지치고 굶주린 채로 들어가 빵과 카페콘레체를 먹었다.
흐린 날엔 생각지도 않은 커피까지 마시게 된다.
바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미국에서 온 Eric이라는 남자를 만났다.
비슷한 날 생장에서 출발한 거 치고 한 번도 못 본 얼굴이라 신기하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는 매일같이 체크무늬 남방을 입고 다니는 나를 알고 있었다고 했다.
그렇게 첫인사 후 자연스럽게 대화로 넘어갔다.
왜 순례길에 오게 됐는지, 여기 오기 전엔 어떤 일을 했는지, 뭘 하고 살고 싶은지 등 건실하고 멀쩡한 대화를 나눴다.
아닌 게 아니라 이 날 2시간 넘게 이 남자와 함께 걸었고, 전혀 이상하다고 생각도 못했다.
심지어 순례길 초반에 자기에게 들이댔던 어떤 동성애자 때문에 비로소 여자들이 평상시에 느끼는 위협을 깨달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저 마음을 놓게 하려는 장치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알고 싶지 않은 자기 성생활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너무 스무스하게 넘어가서 원래 이런 얘길 하나? 말도 안 되는 착각을 하게 될 정도였다.
그렇게 더러운 얘길 잠깐 듣다 눈앞에 보이는 다른 바로 도망쳐갔다.
자기도 바에 가겠다고 따라와서 어쩌지 싶었는데, 화장실에 갔다 온 사이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있길래 뒤도 안 보고 도망쳐 나왔다.
그리고 뛰쳐나온 지 얼마 안 돼서 JS님과 HY님을 만났다.
이상한 미국인과 있다가 잘 아는 사이인 한국인들을 만나니 눈물 나게 반갑고 안도감이 들었다.
그렇게 셋이 걷다 순례길의 유명인사 '비춤이'를 만났다.
까미노에서 개를 데리고 다니는 외국인은 가끔 볼 수 있지만, 한국인은 보기도 힘들고 볼 거라는 생각도 못했다.
비춤이는 한국인 순례자분들이 데리고 다니는 개였다.
이름 뜻이 궁금했는데 '해가 비추다', '빛이 비추다' 할 때 그 비춤이라고 했다.
비춤이의 존재가 순례길에서 생각지도 못한 악연을 지나친 후 바닥까지 떨어졌던 기분을 다시 끌어올려줬다.
초반에 안개 가득 흐리던 날씨도 거짓말처럼 맑아졌다.
희로애락이 있었던 이 날의 루트.
목표한 대로 1시인 체크인 시간에 맞춰 오늘의 목적지 Palas de Rei(파라스 데 레이)에 도착했다.
이 알베르게는 만남의 광장 같았다.
레온 이후로 루트가 달라져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SY & JH님과도 오랜만에 같은 알베르게를 이용했다.
과자와 요거트로 대충 밥을 때웠다.
오늘 저녁은 식당에서 JS, HY님과 EJ, YH님 그룹이 함께 모여 먹기로 했다.
서로 내적친밀감만 있는, 처음 있는 조합이었다.
스페인에서 가장 흔한 음식들을 파는 동네 식당으로 갔다.
애초에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각자 돼지고기 스테이크나 계란후라이가 올라간 치킨 스테이크를 먹으며 후식 먹으러 갈 시간도 잊은 채 열심히 떠들었다.
이 날의 빅 이벤트!
프란치스코 교황 선종 후 새로운 교황을 뽑는 콘클라베가 이 날 있었다.
현지 레스토랑에 있던 우리는 티비에 시선을 고정한 스페인 사람들 사이에 있었다.
그리고 티비로 레오 14세가 선출되는 걸 실시간으로 봤다.
까미노를 걸을 때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종하시고, 새로운 교황이 선출되는 걸 보다니.
종교적인 목적으로 떠난 길은 아니라지만 기억에 오래 남을 풍경이다.
이 숙소엔 담요도 있었다.
초반엔 가끔씩 담요가 있는 알베르게가 있어도 베드버그가 두려워 덮지 못했다.
그런데 폰세바돈에서 역대급 추위를 경험한 이후로 베드버그보다 추위가 한 수 위로 무섭다는 걸 깨달아버렸다.
후반엔 베드버그고 뭐고 모든 걸 해탈했다.
이렇게 제대로 된 순례자가 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