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더 퍼스트 Sep 19. 2016

소란스러움과 반가움, 그 경계선에서

[중국에 대한 101가지 오해]


한국에 살고 있으며, 중국을 방문한 경험이 없는, 
그래서 중국에 대해서라면 경험보다 소문에 익숙한 지인 5인에게 물었습니다. 


“중국하면 어떤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오르냐”



─그들의 시선 


Q. “중국인들은 너무 시끄러워!”


그들은 한 치의 주저 없이 “대화할 때 무엇 때문에 그토록 목에 핏대를 세우며 이야기 하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힐난의 답변을 보냈습니다. 실제로 제가 좋아하는 부장님 한 분께서는 서울 지하철 역사 내에서 마주친 40대 중반의 중국 여성 여행객들의 대화 소리가 지나치게 큰 나머지 스트레스를 받아, 목적지에 당도하기도 전에 지하철을 내려 다음 열차를 탔던 경험을 털어놨습니다. 저는 이럴 때, 제가 마치 당시 중국 여성들의 표본이 된 것도 같고, 괜한 질문을 던진 것만 같아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편견 없는 오해는 없으니 이 페이지를 빌어, 제가 가진 중국과 중국인에 대한 소중한 경험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그녀의 시선 


A. “정말, 너무 많이 반가워서 그런거야.”


어릴 적, 필자가 국제 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제가 재학했던 당시 인터내셔널 스쿨에는 10명 남짓의 친구들이 있었고, 이들 중 상당수는 서양인이었습니다. 아시아인은 필자와 인도네시아 출신 친구 단 둘 뿐이었죠.


학교에서는 주로 영어로 대화를 나누도록 교육받은 탓에 언어 차이로 인해 기인하는 불편은 없었습니다. 문제는 식사 시간과 가정 방문의 날과 같은 문화적 차이를 서로가 직접 마주해야만 할 때 였습니다. 특히 필자의 부모님은 저의 점심 도시락으로 간편하게 먹기 좋은 김밥 몇 줄을 말아 넣어주시곤 했는데, 당시 서양인들 가운데 김을 먹을 줄 아는 친구들은 거의 없었고, 오히려 김 냄새를 역하게 여기는 이들이 상당했죠. 실제로 몇 친구들은 김밥 시식 후 토하는 시늉을 하기도 했고요.


인도네시아 친구도 저와 같은 쓰라린 경험이 있습니다. 그는 집에서 준비해온 뜨거운 물을 이용해 즉석 라면(우리식 컵라면)을 만들어 먹곤 했는데, 이 역시 서양 친구들에게는 새로운 문화로 보여졌던 모양입니다. 일부 학생들이 인도네시아 친구 옆에서 그가 준비해온 인도네시아식 도시락을 조롱했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납니다.


(사진:O Driscoll Imaging/shutterstock.com)


또 다른 일화도 있습니다. 당시 필자의 반 친구들은 학부모들까지도 모두 친하게 지내곤 했는데, 하루는 독일인 친구의 생일 파티가 있었던 날, 필자를 포함한 우리 반 친구들이 모두 그 친구의 집에 초대를 받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 자리에는 학부모들도 모두 참석했었죠.


우리 모두 대부분 영어로 대화를 주고받았고, 급한 경우 간혹 제 나라 말이 ‘툭툭’ 나오기도 했죠. 그런데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등 출신 서양 아이들이 자국어로 질문을 할 경우 대부분의 엄마들은 오히려 그 나라 말을 모르는 자신을 탓하며 미안해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 출신 친구와 필자 등 일부 아시아인들이 자국어로 질문을 하거나 대화하고자 할 경우, 그들의 말을 모르는 자신을 탓하기 보단,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겼죠.


이 같은 상황을 마주할 당시 필자는 열 살이 채 안된 나이였고, 이 모든 상황에 대해, ‘아마도 일부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그릇된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에서 비롯된 결과는 아닐까’하는 의문만을 가졌을 뿐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당시의 기억은 현재 중국인들의 대화 습관과 관련한 상당수 사람들의 편견에 대해 확고하게 답변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선, 그간 우리의 인식 속에 중국은 낡고 누추한 곳이며, 중국인은 예의 없고 시끄러운 사람들이라는 편견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감히’ 묻고 싶습니다.


중국어에는 우리에게 없는 말의 높낮이를 의미하는 ‘성조’가 있습니다. 같은 단어이지만 성조의 높낮이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는 탓에 정확한 단어의 높낮이를 조절해야만 의미를 전달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사진:Hung Chung Chih/shutterstock.com)


그런데, 이 같은 말의 높낮이는 중국어뿐만 아니라 영어, 불어, 러시아어 등 세계 각국의 언어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현상입니다. 물론 우리말도 예외는 아니죠. 익숙한 탓에 느끼지 못했지만, 실제로 우리말의 표준어를 포함한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등 각 지역의 방언에서 말의 높낮이는 분명 존재합니다.


그런데도 중국에 대해 가지고 있는 몇 가지 편견 탓에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대화를 나누는 중국인들의 말투와 억양을 접할 때마다 이해를 하기보다, 불편한 마음이 먼저 앞선 것은 아닐까요.


그리고 혹시, 만약 그들이 쓰는 대화가 중국어가 아닌 영어나 불어 등 우리의 인식 속에 아주 세련된 ‘무엇’으로 여겨지는 것이었다면, 아마 그들의 이해할 수 없는 대화가 비난의 대상으로 그리 쉽게 전락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일부 사람들의 인식과 행동으로 치부될 수 있지만, 이 같은 과거 필자의 경험에 비추어본다면 중국인들의 성향을 너그럽게 이해하는 것이 조금 수월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럼, 실제로 왜 이토록 중국인들의 목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게 되는지 필자의 오랜 중국인 친구에게 묻고, 돌아온 답변을 덧붙여 소개하고자 합니다.


필자의 10년 지기 중국인 친구 손씨는 중국 후난성 대학에서 한국어과 교수로 재직 중인 친한파 한족입니다. 저는 그에게 “왜, 중국인들은 목소리를 높여 대화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중국에서는 대륙의 규모가 크기 때문에 중학교 시절부터 기숙사 생활을 하며 가족끼리 떨어져 지내는 경우가 상당하다. 때문에 한 달에 한 번, 혹은 일 년에 몇 차례 가족을 만나는 것이 전부인데, 이때 반가움이 지나쳐 크게 이야기하게 되는 것은 아니냐”고 오히려 제게 되물었습니다.


더 반가운 만큼, 더 크게 포옹하고, 더 크게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앞서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을 것이라는 거죠.

 

그의 답변을 상기하며, 저 역시 정말로 아주 많이 사랑하고 있는 누군가를 마주할 수 있게 됐을 때를 회상해 보았습니다. 아마도 그가 먼 발치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순간부터 저는 주저하지 않고 그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가 안길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감성을 가진 필자와 ‘당신’이라면, 그들이 가진 반가움의 정서를 이해하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요?



/사진: 제인 린(Jane lin)


중국에 대한 101가지 오해 언론에 의해 비춰지는 중국은 여전히 낡고, 누추하며, 일면 더럽다. 하지만 낡고 더러운 이면에 존재하고 있는 중국은 그 역사만큼 깊고, 땅 덩어리만큼 넓으며, 사람 수 만큼 다양하다. 꿈을 찾아 베이징의 정착한 전직 기자가 전하는 3년여의 기록을 통해, 진짜 중국을 조명해본다.



우리가 중국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것들은?

작가의 이전글 프롤로그: 아주 특별한 곳으로의 초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