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더 퍼스트 Jul 12. 2017

아이돌 예능 신화는 살아있는가

[아이돌話] by 박희아 기자


지난 4월 13일, MBC 장수 예능 프로그램 <우리 결혼했어요(이하 우결)>가 또다시 폐지설에 휩싸였습니다. 2008년에 첫방송을 시작해 시즌4까지 명맥을 유지해온 <우결>은 아이돌 팬들 사이에서 유독 환영받지 못하는 예능 프로그램 중 하나인데요. 덕분에 매 시즌 종영을 알릴 때마다 폐지 소식으로 와전되면서 격렬한 ‘환영’ 인사를 받곤 합니다. 


출처: MBC<우리 결혼했어요> 홈페이지


팬들 입장에서 <우결>은 강력한 권력자인 지상파 방송국이 “환상을 깨부수라”고 종용하는 것처럼 보이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팬과 아이돌이 함께 만들어온 서사 안에 제3자가 난데없이 개입합니다. 이를 ‘비즈니스’라는 명목 하에 정당화한다는 인상을 준 것이죠. 그런데 기획사들은 꾸준히 이 프로그램에 자사 소속 아이돌들을 내보냈습니다. 언뜻 생각하면 회사 입장에서도 득이 될 것 없는 프로그램 같지만, 한동안은 이를 통해 아이돌들이 얻는 인지도가 연기, 기타 예능 출연 등으로 이어지며 쏠쏠한 이득을 챙겼습니다. 


아이돌 그룹 멤버들은 <우결>을 통해 ‘남편’으로서 얼마나 듬직하고 멋있는 모습을 지니고 있는지, ‘아내’로서 얼마나 애교가 많고 요리 실력이 뛰어난지 등을 보여줄 수 있었죠. 팬덤 바깥에 놓인 일반 대중에게 자신들이 얼마나 사회 생활에 적합한 사람인지 알릴 수 있었습니다. 아이돌이 마냥 어리고 철 없는 존재가 아니라, 무난하게 부부 생활을 해낼 수 있는 이들이라는 인상을 주기에는 이만한 프로그램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좀 분위기가 다릅니다. “예전같이 확 뜨지는 못하는 것 같은데?” 시즌 초반까지만 해도 <우결>에 출연한 멤버가 속한 그룹에 대한 관심이 급속히 높아지곤 했고, 이는 개인을 포함해 팀원 대다수가 유명해질 수 있는 기회로 직결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가상 결혼 서사는 진부해져 버렸습니다. 화면 속에서 아이돌들이 제시하는 건강한 남편상과 사랑스러운 아내상은 지루하고 틀에 박힌 캐릭터로 전락했고, 어느 순간부터 <우결>은 ‘말실수만 안 해도 본전’인 프로그램이 되었죠.  



# 예능형 아이돌, 또다시 탄생할 수 있을까? 


한국 아이돌 시장은 더 이상 방송국 무대를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유튜브와 각종 SNS, 포털 사이트 앱이 강력한 마케팅 수단으로 자리 잡았고, 일부 케이블 채널 프로그램과 음악 예능을 제외한 TV 프로그램은 팬덤을 확보하고 난 뒤에 부차적으로 취하는 홍보 수단 정도에 불과한 게 현실입니다. 


변화의 원인으로 몇 가지를 들 수 있는데요. 첫째로, 아이돌이 너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대중을 신경 쓰기 전에 고정 팬덤을 확보하는 것부터가 영 쉽지 않고, 이를 절감한 기획사들은 바이럴 마케팅처럼 보다 즉각적이고 과감한 반응을 끌어낼 수 있는 수단을 통해 팬들을 끌어 모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한 아이돌 숫자가 늘어나면서 예능 프로그램에서 보여줄 수 있는 캐릭터 또한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는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위에서 예로 든 <우결>이 대표적인 사례죠. 


이러한 변화를 감지한 방송사 측도 방향을 틀었습니다. 아예 아이돌을 주제로 한 프로그램을 만들기 시작했죠. MBC Every1 <주간 아이돌>부터 JTBC <걸 스피릿>, <잘 먹는 소녀들> 등 기획도 참으로 다양합니다. 그러나 그럴 수록 아이돌들은 치열해졌습니다. 해당 프로그램들에는 아이돌‘만’ 등장하기 때문에, 그 수많은 팀들 사이에서 보다 필사적으로 자신을 부각시키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게 된 겁니다. 예를 들어, 요즘 활동 중인 대부분의 보이 그룹에는 ‘걸 그룹 댄스’를 자신의 장기로 소개하는 멤버들이 꼭 한두 명씩은 존재합니다. 


‘걸 그룹 댄스’가 특기인 이들은 바이럴 마케팅, 케이블 채널 예능 프로그램 등을 통해 모두 한두 번씩은 빛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잠시였죠. 모두가 비슷비슷한 캐릭터로 인식된 나머지, 한두 명이 ‘예능 스타’로 떠오를 기회는 사라졌습니다. 더불어 어떤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건 간에, 이미 대부분이 2008년~2010년 사이에 크게 활약했던 예능형 아이돌들이 취했던 것들이라 대중에 신선한 인상을 주기 어렵다는 이야기도 많습니다. 


출처: JTBC<걸스피릿> 홈페이지


두 번째 이유는 몇 년 새 해외 팬덤이 놀라우리만치 커졌다는 점입니다. 이제 아이돌 그룹 멤버들은 예능 프로그램에 고정으로 출연하는 대신, 어느 정도 인기를 얻자마자 해외 투어 공연에 나섭니다. 빈자리는 실시간 방송 앱과 각 기획사 공식 유튜브 채널이 채워줍니다. 자유분방하고 장난기 많은 모습, 소탈한 대화 장면 같은 것들이 담긴 콘텐츠들은 국내 팬덤과 해외 팬덤을 아우를 수 있는 수단이죠. 


이미 온라인 콘텐츠를 통해 아이돌들의 다양한 모습을 지켜봐온 팬들 중에는 시간 맞춰 TV를 굳이 챙겨보는 대신 유튜브에 업로드 된 ‘편집본’ 정도만 찾아보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최근에는 몇몇 한국 아이돌들이 해외 예능 프로그램이나 실시간 SNS 중계에 ‘뛰어난 K-POP의 선두주자’로 얼굴을 비추면서, 과거 SBS <런닝맨>이나 MBC <무한도전> 게스트보다 이 짧은 영상들이 더욱 값진 트로피처럼 여겨지는 경향도 있고요.  



# 잘 먹는 소녀들, 잘 웃기는 소년들 


아이돌 씬 바깥에서 일어난 커다란 변화도 있습니다. 최근 들어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아이돌 멤버들에게 가해지는 불편한 언사나 행동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특히나 반가운 것은, 이전에 비해 놀랍도록 많은 이들이 걸 그룹 멤버들에게 가해지는 언사에 대해 ‘폭력적’이라고 꼬집으며 거침없이 화를 낸다는 점입니다. 가장 많은 비판을 받았던 프로그램으로는 JTBC <아는 형님>, MBC <라디오 스타>, tvN <SNL KOREA> 등을 꼽을 수 있을 텐데요. 해당 프로그램에서 고정 MC(패널)를 맡고 있는 이들은 걸 그룹 멤버들에게 끊임없이 애교를 요구하거나, 외모 콤플렉스를 희화화하거나, 말이 없다는 이유로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 자주 문제가 되곤 했습니다. 


사실상 보이 그룹에 비해 대중적인 인기를 중시하는 걸 그룹들의 경우에는 여전히 ‘예능 신화’에 매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잘 먹는 소녀들>이라는 프로그램의 내용, 기억하시나요? 방송에 나온 모든 여자 아이돌들은 똑같이, 혹은 남보다 더 잘 먹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모두가 열심히, 최선을 다해 먹는 모습을 보여주다 보니 누구 하나 대단히 눈에 띄지 않았다는 점이죠. 그럴수록 더욱 적극적으로 음식을 집어먹는 모습을 보여줘야 했습니다. 보는 사람이 당황스럽고 걱정할 정도로 빠른 시간 안에 많은 것들을, 그것도 ‘이미지가 망가지지 않는 선에서’ 먹어야 했어요.  


이 프로그램뿐이 아닙니다. 종종 예능 프로그램에 등장한 걸 그룹 멤버들에게는 “이렇게 작고 마르고 예쁘다니”라는 칭찬(이라고 주장하므로)과 “잘 먹으니 보기 좋네”라는 칭찬(역시 칭찬이라고 주장하므로)가 한 자리에서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반대로 덜 먹으면 “프로답지 못하다”, “내숭이다”라며 비난을 받아야 하고요. 결국 <잘 먹는 소녀들>은 다수의 한국 예능 프로그램들이 그동안 여성 아이돌들에게 얼마나 비뚤어진 강요를 많이 해왔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남았습니다. 또 잘못된 남성 중심적 판타지가 왜 불쾌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지 알려주었죠. 


출처: JTBC <잘 먹는 소녀들> 홈페이지


정도나 형태에는 차이가 좀 있습니다만, 당혹스런 환경을 감내해야 하는 것은 보이 그룹 멤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외모가 예쁘게 생겼다는 이유로 칭찬을 빙자한 놀림을 받기도 하고, 원치 않는 여장을 강요받으면서 희화화의 대상으로 전락하기도 합니다. 간혹 여장을 시도한 보이 그룹 멤버들에게 “여장을 하면 무조건 웃겨야 하냐. 저런 식의 행동이 여성 혐오”라고 비판하는 분들이 계시는데, 예능에 나간 아이돌들 입장에서는 이렇게 정형화된 웃음 코드 또한 자기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아무리 과거의 위상을 잃었다고는 해도, 아직까지 생존 게임의 룰을 쥐고 있는 것은 “실패하면 여장!”이라는 벌칙을 준비한 쪽이니까요. 남자 아이돌들이 여성, 트렌스젠더 등 여러 소수자들이 지닌 아픔에 무감하다는 점을 비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이해 또한 어느 정도 필요하다는 게 저의 의견입니다. 아이돌들 입장에서는 어떤 행동이 옳고 그르다는 가치 판단을 할 새도 없이 시작되고 끝나는 촬영이 다수니까요.  



# 프로페셔널한 태도란 무엇인가 


처음 <우결> 이야기를 꺼내며 아이돌이 예능 출연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이전보다 줄었다고 얘기했습니다. 하지만 적은 분량이라도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야 할 이유 자체가 없어진 것은 아니기 때문에 꾸준히 얼굴을 비추게 되겠죠. 그렇다면 이중에 예능 프로그램에서 아이돌들이 취해야 할 ‘프로페셔널한 태도’란 과연 무엇일까요. 아래 보기는 모두 실제 상황이 아닙니다만, 특정 장면이 떠오르신다면 우연입니다.   


걸 그룹 멤버 A는 불편한 기색으로 “표정이 왜 그래요?”라고 말하는 남성 MC를 향해 상냥하게 웃으며
“제가 원래 말도 좀 없고…”라고 해명했다.             

보이 그룹 멤버 B는 여장을 하고 나와서 걸 그룹 멤버 춤을 과장해서 추었다.

걸 그룹 멤버 C는 다른 패널들이 게임에서 모두 탈락한 가운데 끝까지 남아서 분량을 독식했다.

보이 그룹 멤버 D는 밥상 앞에서 “가장이 먼저 수저를 들어야 먹죠.”라고 말했다.


아마 더 이상 ‘아이돌 예능 신화’가 나올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는 점차 많은 숫자의 대중이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전에는 무의식적으로 웃고 넘기던 것들이 불쾌감을 자아내는 요소로 인식되기 시작했으니까요. 많은 이들이 어린 나이에 불쾌한 언사를 듣고 희화화되기를 강요받는 아이돌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직시하게 되었죠. 허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예능 신화’를 계속 유효한 가설로 가지고 가야 한다면, 저는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예민하고 날선 비판을 꾸준히 지지하겠습니다. 다만, 위 문제의 답은 모두 정답. 아직까지 저들에게 이외의 선택지가 있는 것 같지 않네요.





아이돌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 「아이돌話」

→전체 시리즈 보러 가기


작가의 이전글 다섯 번째 사연: 외로움에 관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