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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 퍼스트 Sep 19. 2017

활동보조인과의 동거, 그 생소함에 대하여…

초등학교 1학년이 ‘학교’라는 사회에 적응하는 1년이었다면, 2학년인 지금은 달라진 외부 환경에 적응을 해야 하는 시기다. 


언제나 옆에 있던 엄마가 안 보이고, 낯선 할머니가 엄마 자리에 대신 서 있다. 어떻게 된 건지 잘은 모르겠지만 뭐가 막 바뀌고 있다. 인생 최대의 변혁기. 마음속은 두 살인 아홉 살 아이한텐 모든 게 낯설 것이다. 


활동보조인이 오게 되었다. 3월 초에 국민연금관리공단으로부터 월 128시간의 서비스 이용을 확정 받았다. 지적장애 2등급이지만 1등급에 해당되는 시간을 받은 것. 심사관이 집에 와서 아이를 직접 겪어보니 1등급을 안 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용시간을 확정 받고 관련 기관 한 군데에 활동보조인 신청을 하니 대기자가 많아 석 달은 기다려야 한단다. 여름까지 어떻게 기다리지? 고민하고 있는데 구원자가 나타났다. 


아들이 다니는 학교의 특수반 엄마를 만났는데 활동보조인이 집에 온 지 며칠 만에 남편이 불편하다며 손사래를 치더란다. “저는 평생 애나 볼 팔자인가 봐요”라며 한숨 쉬는 그녀. 자기네 활동보조인을 우리 아들에게 연결시켜 주겠단다. 고맙고 안쓰러운 마음. 


며칠 뒤 그녀가 연결시켜준 활동보조인이 면접을 왔다. 친정 엄마 또래의 푸근한 분이다. 활동보조인 교육을 받고 사실상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되는 새내기라고. 그렇게 새내기 활동보조인과 서비스를 처음 이용하는 새내기 엄마가 함께 공동 육아를 시작하게 되었다. 


적응기가 필요하기 때문에 3월 한 달 동안은 활동보조인과 내가 아들의 동선을 따라 함께 움직이기로 했다. 그녀에 대한 인상? 장애인 활동보조인이 아닌 그냥 손주 돌보는 할머니! 


그럴 만도 한 게 책상에 앉아 몇 시간의 교육을 받고 곧바로 실전에 투입되는 거라 처음부터 장애에 대한 전문성 등은 기대할 수가 없었다. 거듭 해보면서 노하우가 쌓여가는 거겠지. 대신 손주를 돌보는 할머니의 마음으로 아들을 예뻐하고 아낀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고맙다.             



하교 시간에 맞춰 학교에서 만났다. 만나면 활동보조인과 내가 복지부에서 발급받은 서로의 카드를 휴대용 단말기에 대고 서비스 시작을 등록했다. 요일마다 다른 치료 시간표. 오늘은 여기 갔다가 저기로. 내일은 저기 갔다가 여기로. 그렇게 치료가 끝나면 함께 집으로 와서 시간을 보냈다. 


활동보조인이 오고 난 후 가장 신기했던 건 아들이 집에 있는데도 내가 마트에 장을 보러 나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동안 나의 모든 외출은 아들이 하교하기 전인 12시 50분이나 1시 40분까지만 허락됐는데 오후 5시에 동네를 홀로 거닐고 있다는 건 낯선 경험이었다. 


심지어 어제는 비가 오길래 딸의 학교에 우산을 갖다 주러 가기도 했다. 평소였다면 무릎이 안 좋아 ‘나무늘보보다 느린(딸의 표현이다)’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우산을 부탁했을 것이다. 


비 오는 날 교문에서 우산을 들고 서 있는 엄마 역할을 꼭 한 번은 해보고 싶었다. 활동보조인 덕분에 소원 성취했다. 왠지 꿈꾸던 이상적인 엄마가 된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활동보조인 덕분에 내 삶의 활동반경이 한층 넓어졌다는 건 확실히 좋은 일이었다. 4월이 되어 본격적으로 활동보조인에게 치료실 순방을 전담하고 나면 내 삶의 스펙트럼은 더 넓어질 것이다. 치료실에 오가는 짐만 활동보조인에게 나눠줘도 장애아이 엄마로서의 삶은 이렇게나 숨통이 트인다. 


하지만 마냥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으니 그건 바로 내 집에 낯선 타인이 있다는 불편함 때문이었다. 일단 청소를 꼬박꼬박 해야 했다. 바쁜 날은 오후 늦게 청소기를 돌리거나 저녁에 설거지를 몰아서 하곤 했는데 이젠 그럴 수가 없게 됐다.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다. 


며칠 전엔 장 보러 갔다 왔더니 활동보조인이 다용도실 문 앞에 널 부러져 있는 빨랫감들을 차곡차곡 바구니에 담아 놓았다. 빨지 않은 내 속옷까지 전부다 노출돼 버렸다.(ㅠㅠ) 



어디 그 뿐일까? 4월부터는 내가 밖에 나가있어서 상관이 없지만 지금은 적응기라 집에서 온전히 시간을 같이 보내다보니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것도 일이었다. 활동보조인의 아들과 며느리가 어디서 뭐하는지, 내가 어디서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두 사람 인생의 줄거리가 대강으로나마 오고갔다. 


매일 저녁을 같이 먹어야 하는지도 고민이다. 아이들은 오후 5시에 이른 저녁을 먹는다. 여러 번 권했지만 사양하길래 그 다음부턴 나와 아이들만 밥을 먹는데 여간 눈치가 보이는 게 아니다. 


이른 저녁도 먹고, 늦은 저녁에 치료가 있는 날은 함께 치료실까지 다녀오고 나면 활동보조인의 일과도 끝난다. 다시 또 헤어지기 전에 서로의 카드를 단말기에 대고 서비스 종료를 등록. 매일 반복이다. 


다행히 아들은 활동보조인에게 처음부터 적응을 잘 했다. 타인에 대한 경계심이 없는 아이라 활동보조인을 잘 따랐다. 면접날부터 덥썩 안기더니 활동보조인의 패딩 점퍼를 질질 끌고 부엌으로 가져가 휙 하고 던져놓는다. 잠바를 치웠으니 집에 계속 있으라는 뜻이다. 


딸도 오케이다. 하교 후 학원 두 군데를 들렸다 집에 오면 오후 5시. 씻고 나서 곧바로 밥을 먹는데 활동보조인이 양가 할머니라도 되는 듯 재잘재잘 수다를 떨며 잘도 지낸다. 


잘 적응하고 따르는 아이들과 달리 나와 남편은 아직까지도 불편함을 느끼고 있다. 사실 지금은 내가 외부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지 않았기 때문에 3월 한 달 동안에는 더 적은 시간만 서비스를 이용해도 되는데 인정 상 그러지 못하고 있다. 


활동보조인의 시급은 시간 당 9천 원대인데 그나마 소속된 기관에 수수료(?)를 떼고 나면 실수령액은 6천 원대라고 한다. 그냥 아이를 맡긴 것도 아니고 손이 많이 가는 장애 아이. 얼마 전 내가 잠시 외출을 했던 이틀 모두 아들은 바지에 응가를 해버려 활동보조인은 아이를 씻기고 응가 묻은 내복까지 손빨래해야 했다. 


그럴 때면 내가 막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 힘들게 일하니 이왕이면 단 돈 만원이라도 더 가져가시라고 하루 한 시간이라도 더 늦게까지 서비스를 이용한다. 그러다보니 나는 하루 종일 집에서 눕지도 못하고 남편은 집에 일찍 들어와도 아들 방에 들어가 두문불출한다. 


활동보조인이 가고 나면 “이야~ 살 것 같다”며 우리 부부는 옷부터 갈아입는다. 노출이 많이 되는 더 편하고 헐렁한 옷으로. 그제서야 소파에 누워 ‘쩍벌’ 자세로 한 발을 등받이에 걸치기도 하고, 거실 한 복판에 대자로 누워 뒹굴거리기도 한다. 



활동보조인 서비스라는 건 실제 이용해 보니 편하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하다. 안심이 되기도 하고 불안한 것도 있다. 아들을 예뻐하는 건 안심이 되지만 4월부터 내가 없을 때에도 지금과 같은 태도일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걱정이 된다고 해서 다시 아들을 내 품에만 끼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가장 큰 이유는 아들 때문이다. 아들 옆에 젊고 힘 있는 엄마가 천년만년 있어줄 수는 없다. 나도 언젠가는 나이가 들고 몸도 아프고 기력도 쇠하다가 우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아들은 연습을 해야 한다. 엄마가 아닌 타인의 도움을 받아 사회에서 살아나가는 법을. 


두 번째 이유는 날 위해서다. 장애 아이를 키우는 건 장기전이다. 부모인 내가 먼저 지쳐서는 안 된다. 전에 어떤 분이 ‘동네 바보 형’을 읽고 쓴 댓글이 기억에 남는다. 지치면 안 된다고. 평생을 가야 하는 일이라고. 아이나 엄마, 둘 중 하나가 죽어야만 끝나는 일이라고. 깊이 공감한다. 초반에 전력질주 해버리면 마라톤을 완주할 수 없을 것이다. 


여러 문제점 때문에 말이 많은 제도임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내가 활동보조인 서비스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지금은 적응기다. 그리고 변혁기다. 우리 가정에 다가온 새로운 변화가 좋은 방향으로 잘 안착되기를 바랄 뿐이다. 



/글·사진: 류승연



→'동네 바보 형'전체시리즈 보러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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