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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 퍼스트 May 04. 2018

게으른 어벤저스는 가라, 슈퍼 빌런이 나타났다

[전통주 다이제스트] 대한민국 증류식 소주의 자존심, 안동소주

마블 혹은 DC. 오늘날 슈퍼히어로물은 더 이상 어린아이들이나 즐기는 만화영화의 수준이 아니다. 다채로운 캐릭터와 그들이 빚어내는 풍부한 스토리는 다양한 변주를 거쳐 예술의 경지로 올라섰다. 권선징악의 단순한 이야기가 철학의 영역에 들어선 시점은 악당에게도 그 정당성과 설득력이 부여되면서부터다. ‘착한 놈’보다 대중의 사랑을 더 받는 ‘나쁜 놈’이 등장한 그때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소개할 전통주는 히어로를 압도할 극강의 파워를 갖춘 ‘슈퍼 빌런’, 안동소주다.


오늘의 주인공, 안동소주. 이 늠름한 자태를 보라. (사진: 드렁큰 위도우)


우리나라 증류식 소주 중 ‘원톱’ 격인 안동소주. 지금껏 소개한 전통주 가운데 인지도가 가장 높을 터다. 우리에게 ‘안동’은 익숙하고, ‘소주’는 더더욱 익숙하니까. 하지만 거기까지다. 다들 ‘경북 안동에서 만드는 독한 소주’ 이상으로 잘 알지 못하며, 별로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동안 ‘참X슬’, ‘XX처럼’ 같은 희석식 소주에 너무도 길들여져 왔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저렴하고 구하기 쉽다는 건 분명한 미덕이고, 지갑 가벼운 이들의 벗이 될 자격을 갖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살림살이가 나아지고 대중의 구매력이 상승했음에도 희석식 소주는 여전히 불티나게 팔린다. 광고모델은 시즌마다 바뀌지만 술맛이 더 나아지는 것은 아니며, ‘부드러움’과 ‘국민건강’을 위해서란 명목사실은 원료 절감으로 도수를 낮췄지만 우리들은 개의치 않고 오늘도 마신다. 가장 많은 이들이 찾는 주류계의 히어로는 언제 어디서든 나타나지만, 그 발전이나 노력에 있어서는 상당히 게으르다.


그에 비해 안동소주는 어떤가. 고두밥, 전술, 증류의 복잡하고 수고스런 과정을 거쳐서야 완성된다. 그 깊은 맛은 절기와 시간에 따라 달라진다. 전통 누룩 사용이 금지됐던 일제강점기, 쌀 사용을 막기 위해 제조를 탄압했던 군사독재정권을 거치면서도 명맥을 이어왔다. 대표적 전승자인 두 명인이 더 나은 술맛을 내기 위해 오늘도 선의의 경쟁을 벌이고 있다. 안동소주가 엄청나게 매력적인 빌런이 아닐 수 없는 이유다.


안동소주 전승 ‘투톱’, 박재서 명인(上)과 조옥화 명인(下).


기왕 꺼낸 김에 간단한 설명을 덧붙인다. 안동소주는 현재 대한민국전통식품명인 제6호인 박재서 명인과 제20호인 조옥화 명인이 대표적 전승자다. 흥미로운 점은 두 명인의 안동소주가 제조법과 맛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는 사실. 박 명인은 쌀로 고두밥을 만들고 쌀누룩을 넣어 전술을 빚은 뒤, 중탕 방식으로 증류해 100일간 숙성시킨다. 조 명인의 경우 멥쌀 고두밥에 밀누룩을 사용하며, 20일 발효시켜 만든 전술을 바로 증류한다. 이 때문에 전자는 부드럽고 깊은 맛이, 후자는 거칠고 강렬한 맛이 특징이다.


당연하게도 이번 주 <전통주 다이제스트>에서는 위의 2가지 버전의 안동소주를 모두 시음했다(고 쓰고 들이부었다고 읽는다). 


WHEN: 4월의 마지막 날
WHERE: 서울 인사동 일대
DISHES: 돼지고기 숙주볶음, 순수한 계란말이
MEMBERS: 에디터 스트레인지(39·언론사 총수), 드렁큰 위도우(36·프리랜서), 不편집장(본 에디터)


오늘의 선발투수다. 박재서 명인의 안동소주. (사진: 드렁큰 위도우)


이 바닥에서 나름 쟁쟁한 글쟁이들을 한 자리에 어렵게 섭외했다소위 글을 팔아’ 먹고 사는 이들이니 표현도 남다르지 않을까하는 기대 속에 박재서 명인의 안동소주를 열어 본다귓가를 때리는 경쾌한 효과음코끝을 스치는 점잖은 향.


편집장: 향은 어때?

에디터 스트레인지: 없진 않은데, 생각보단 약하네. 소주에 인이 박혀서 그런가.

편집장: 향의 힘 자체는 느껴지는데 왜.

드렁큰 위도우: 부드러워. 선비의 도포자락 같음.

에디터 스트레인지: 그렇다면 난 엄마의 치맛자락! 


어째 시작이 좋지 않다.


편집장:  털어넘기지 않고 천천히 음미하니 향이 더 풍성해지는 듯.

드렁큰 위도우: 확실히 맛이 있네. 좋은 술이란 게 티가 난다.

에디터 스트레인지: 이건 마치... 닌자 같다고 해야할까. 칼을 숨기고 소리 없이 나타나서 확 치고 나오는.

편집장:  탄산 느낌도 조금 있는데? 머금고 있으면 타격감이 느껴짐.

에디터 스트레인지: 음, 그러네. 원래 안동이 물이 유명하잖아, 탄산이 있는 광천수. 낙동강 발원지니까.

드렁큰 위도우: 그럼 오리알을 안주로 먹어야 하나?

에디터 스트레인지: 진짜 오늘 분량 안 나오겠다.


주고받는 술잔 속에 싹 트는 우애. 아니 애증. (사진: 드렁큰 위도우)


어쩐지 커져만 가는 불안감.


드렁큰 위도우: 수정방하고 비슷하다는 사람도 있더라고.

에디터 스트레인지: 수정방? 그게 뭐임?

편집장: 중국 최고급 백주(白酒)임.

에디터 스트레인지: 그래서 그런가 갑자기 잘 튀긴 깐풍기가 먹고 싶네.

드렁큰 위도우: 수정방을 먹어본 안동 사람이 나한테 이야기를 하는데 말야, 이게 특유의 향이 강하고 목 넘김도 묵직하고... (중략) 아무튼 그래서 내가 수정방에 대한 기억이 좋아서, 안동 소주를 꼭 마셔보고 싶었어. 뭐야, 지루해?

에디터 스트레인지: 응? 아니, 조금. 아니, 아니야.

편집장: 그런데. 이 소주의 ‘주’가 한자로 뭔지 다들 알고 있나?

드렁큰 위도우: 알지. 황교익 선생이 이야기했잖아. 자기가 그걸로 내기해서 공짜술 많이 얻어먹었다고.

에디터 스트레인지: 뭔데? ‘술 주(酒)’ 아냐?

편집장: 그거 말고 ‘세 번 빚은 술 주(酎)’를 쓴다는 건데, 알고 보면 일제강점기에서 그렇게 강제했다고 한다는군.

에디터 스트레인지: 오, 이 얘기 내가 한 걸로 해주면 안 됨?


반은 맞고 반은 실패한 이날의 마리아주. 돼지고기 숙주볶음(左), 그리고 순수한 계란말이(右). (사진: 드렁큰 위도우)


대관절 이 술을 마시면 사람이 이상해지는 효과라도 있는 걸까문득술의 유래가 궁금해진다.


편집장: 굳이 안동에서 증류식 소주가 발달한 이유는 뭘까?

드렁큰 위도우: 선비들이 술을 많이 마셨잖아. 안동은 선비의 도시고.

편집장: 아니, 선비야 조선 팔도에 다 있었지.

드렁큰 위도우: 도산 서원이 특히 유명하잖아.

에디터 스트레인지: 거기 도산했다며.

편집장: 그냥 집에 가고 싶다.

에디터 스트레인지: 농담이고, 안동 같은 내륙지방 사람들이 다소 고고하고 풍류에도 익숙하고, 허세도 약간 있고 그랬잖아. 그렇다보니 천천히 오래 음미하면서 마시는, 만듦새가 심플한 독주를 마시는 문화가 발달한 것 아닐까.

드렁큰 위도우: 일리가 없진 않네. 사실 다른 약주계열 전통주들은 꼭 무엇 하나씩 첨가하곤 하는데 안동소주는 그냥 잡스런 것 없이 완전 클래식하니까. 묵직하고.

편집장: 그럼 이 안주하고도 맥락이 맞네. 이 순수한 계란말이. 계란, 물, 소금만 가지고 만들어서 탱글탱글하고 계란 본연의 맛으로만 승부 보는.


4번 타자급 2번 타자, 조옥화 명인의 안동소주. (사진: 드렁큰 위도우)


신나게 떠들다 보니 어느새 박 명인의 술이 동났다교체 선수로 조 명인의 안동소주 투입아니 그런데.


에디터 스트레인지: 와, 이건 닌자가 아니라 선전포고 때리고 들어오는 군대다 군대. 존재감 작렬!

편집장: 격하게 공감. “이리오너라~” 하고 외치는 것 같아. 술이 입 안에서 칼춤을 춘다. 정말 협상 따윈 없는 매력 만발의 술이네.

드렁큰 위도우: 가장 진하게 느껴지는 건 흙맛인 듯. 흙의 향기가 싸하게 풍겨. 난 아까 것보다 이게 더 좋아. 술은 이런 임팩트가 있어야지.

에디터 스트레인지: 흙? 토지? 박경리?

편집장: 대지? 펄 벅?

드렁큰 위도우: (깊은 한숨)

에디터 스트레인지: 아무튼, 아까 그 술이 다소 대중 친화적인 느낌이라면, 얘는 뭐 팔리든 말든 상관없다 이런 기세가 느껴져. 칠 테면 쳐봐라 난 직구다 이런.

편집장: 아까 마신 그건 100일 동안 숙성시킨 거니까, 아무래도 이게 조금 더 거친 맛이 있겠지.

드렁큰 위도우: 안동소주도 숙성시키는 동안 많이 날아가려나?

편집장: 그 날아간 걸 서양 애들은 ‘천사들의 몫’이라 부르잖아. 낭만적이야.

에디터 스트레인지: 넌 그런 쓸데없는 걸 어떻게 아는 게야?

편집장: 만화 ‘신의 물방울’에 나옴. 그나저나 우리나라 전통주는 대부분 술병이 도자기로 돼 있어서, 줄어드는 걸 볼 수가 없어. 외국 양주는 투명해서 다 보이는데.

에디터 스트레인지: 그건... 카지노에 창문이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인가.

드렁큰 위도우: 넋 놓고 즐기라는 조상들의 배려인 듯


열변을 토하는 에디터 스트레인지(의 양손). (사진: 드렁큰 위도우)


뛰어난 술맛 만큼이나 이야기도 깊어간다취기가 얼큰하게 오르고장난기도 덩달아 오른다.


드렁큰 위도우: 안주는, 두부 같은 연하고 슴슴한 게 어울리는 듯. 술이 강해서 그런가.

에디터 스트레인지: 후두부?

편집장: 듣는 내가 전두엽이 다 아파오네.

드렁큰 위도우: (무시) 그런데 이거 술 금방 동나겠다. 양이 많지 않아서.

에디터 스트레인지: 동날까 ‘안동’날까.

드렁큰 위도우: (못 들은 척) 다시 마셔보니 이과두주 느낌도 조금 나는 듯.

에디터 스트레인지: 난 문과두주.

드렁큰 위도우: 조 명인의 안동소주는 누룩을 직접 만들어서 만든다고 하네. 거의 대부분 일본에서 수입해서 쓰는 걸로 알고 있는데.(알쓸신잡의 분위기를 억지로 이어가보려고 안간힘을 쓴다)

편집장: 뭘 쓰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만드느냐의 문제도 중요할 듯. 이스트(yeast)를 쓰는 것도 그렇고.

에디터 스트레인지: 그럼 동해안에서 만들어야 겠네.

드렁큰 위도우: 아, 오늘 망했다 정말.

에디터 스트레인지: 어쨌거나 총평하겠음. 이 술은, 옛 우정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있음. 흙맛이 강하잖아. 흙이 뭘 의미하겠어. 다 돌아가는 거지. 초심으로. 우리 모든 추억을 묻을 수 있는 흙으로 돌아가자.

편집장: 그래. 이제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살려줘.



/글: 이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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