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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 퍼스트 Oct 26. 2016

거북이라 거북하십니까?


‘만만디(慢慢的)’

중국인의 행동거지가 농축된 용어죠. 
‘늦을 만(晩)’이 곱절이니 그 느림의 수위가 가늠이 됩니다.

이로 인해 파생되는 오해들도 차고 넘칩니다.
‘빨리빨리’로 무장된 한국 정서와 만나면 더더욱 그렇죠. 
‘천성이 게으르다’, ‘속 터지고 답답하다’, ‘책임감이 없다’…
이런 부정적인 인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입니다.


(사진:Artifan/shutterstock.com)



그들의 시선


미국계 금융 회사에 종사하는 금융 컨설턴트 A씨, 그는 전 세계 각국을 대상으로 사모펀드(private equity fund)를 운영하는 미국 금융계의 스타 컨설턴트로 국내외 언론에도 수차례 실린, 이름만 들어도 다 아는 분이죠.


그런 그가 사석에서 긴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유독 투자를 꺼리는 지역으로 중국과 인도를 꼽는 것에 주저하지 않습니다. 전 세계 인구 1, 2위를 차지하는 두 곳의 국가에 대한 투자야말로 가장 필수적일 것 같지만, 그는 ‘희망이 없다’는 답변만 되풀이합니다.


세계 최대 투자처로 각광을 받는 두 국가에 대해 일찍이 그가 희망을 놓아 버린 데에는 두 국가의 국민들이 가진 국민성 탓입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느린’ 그들만의 문화와 사고 탓에 금융 투자가로서, 그리고 ‘마감일을 맞추지 못하는 공장은 존재의 의미가 없다’는 사업가적 마인드로 일찍이 사망 선고를 내려버린 것이지요.


중국 특유의 느린 문화… 답이 안 나옵니다.(사진: Niyazz/shutterstock.com)



그녀의 시선 


A씨의 이 같은 지적에 일면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금융 전문가도 글로벌 사업가도 아닌 그저 보통 사람인 필자 역시 중국에서 거주하며 겪게 되는 갖가지 일화 가운데 그들의 ‘느림’에서 비롯된 사건 사고가 많기 때문이죠.


대표적인 곳이 은행입니다. 중국은 아직까지 번호표를 받아 고객들이 차례로 업무를 보는 시스템이 완전히 자리 잡지 못했는데요. 그런 상황에서, 고객들이 (수많은 창구 중)한 두 곳의 창구에서만 업무를 보게 되는 상황이 잦고, 직원들은 유유히 잡담을 나누면서 그런 고객들을 느릿느릿 응대하는 상황을 처음 마주했을 땐 저도 모르게 혀를 차곤 했었죠. 그 때문에 오전 시간을 온전히 은행에서 바쳐야 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필자 역시, ‘중국은 아직 멀었어’, ‘중국은 역시 안 돼’라는 섣부른 정의를 내리곤 했었습니다.


한국에서 거주할 당시 번호표 시스템에 차례로 ‘착착’ 진행되는 업무에 익숙했던 제가 긴 줄을 선 사람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은행에서 업무를 보지 않고 잡담을 나누는 직원들의 모습을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베이징대학 내에 자리한 100주년 기념관에서는 매주 다양한 문화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이 곳 역시 총 3곳의 매표소 가운데 단 한 곳에서만 티켓팅을 진행, 문화행사 참가를 위해서는 긴 줄을 서야 하는 수고스러움을 마다할 수 없는 형국이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베이징 곳곳에서 운영 중인 대형 마트에서 장을 보고 계산대에 도착하면 영락없이 손님들이 긴 줄을 서 있는데, 이 줄이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물건 바코드를 찍고, 값을 지불하는 단순한 과정인데 어째서 이토록 긴 시간을 소비해야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는 순간이죠.


사실 중국은 아직까지 카드로 결제를 하는 시스템이 완전히 정착되지 않았습니다. 카드 결제를 하려는 손님은 카드 단말기에 카드를 긁고, 비밀번호를 누른 뒤 본인 사인을 하고, 인증 받는 과정을 거쳐야 하죠. 때문에 필자는 중국에 온 뒤로 항상 카드보단 현금을 가지고 다니며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번거로운 과정을 거치면서도 카드로 결제를 하는 손님들이 유독 많고, 이때 계산원은 빠르게 업무를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직원들끼리 수다도 떨고, 자주 오는 단골손님과는 때마다 농담도 주고받으며 업무를 처리하기 때문에 긴 줄을 서야 하는 고생을 강요받게 되는 것이죠.


이쯤 되니, 이들의 DNA 어딘가에 우리에게는 없는 ‘느림’의 유전자가 대대로 유전돼 내려오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들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이 같은 업무 환경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회주의를 기반으로 성장한 중국에서 노동자의 업무와 그들의 일상은 동시에 존중받아야 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물론, 많은 부분 과거 공급자 위주의 경제에서 구매자 위주의 시장으로 전환이 됐다고 하지만, 사상적인 기반은 여전히 근로자의 권리를 최고 수준으로 보장해야 한다는 인식이 저변에 있죠.


지난해 12월 기준, 소유와 경영이 모두 중국 정부에 귀속돼 운영 중인 국유기업(state-owned company)의 수는 무려 10만 곳에 달합니다. 



지난 겨울 춘절을 앞둔 중국 허난성 정조우 광역버스 터미널의 모습. 중국 최대 명절을 맞아 귀성하는 이들로 유독 혼잡해졌지만, 단 두 곳의 매표소에서만 티켓팅을 진행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중국인들이 가진 ‘느린 노동 강도’가 오랜 기간 유지될 수 있는 이유에 대해, 시장경제와 국가 통제가 적절하게 병존하는 혼합 시장이라는 점에 기인한다고 분석합니다.


실제로 중국 기업 상위 500개 기업 가운데 국유기업이 349개나 차지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많은 인구가 국유 기업에 고용돼 있고, 이들이 모두 공급자 위주의 경제를 기반으로 한 노동시장에 진입해 있는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하지만, ‘느리다’는 지적을 받아오는 그들만이 가진 장점도 있습니다. 회사원의 경우 출근시간을 오전 9시 30부터 10시까지 넉넉하게 조정이 가능하고, 점심시간도 11시 30분부터 2시 30분까지 각 회사별로 탄력적인 운영해 오고 있습니다. 상당수 회사들은 회사원들에게 점심시간으로 2시간을 할애하고 있죠.



베이징 남역(南站). 전국 각지로 향하는 기차표 예매를 위해 긴 줄을 선 여행객들의 모습.


또한 넉넉한 점심시간을 활용해 낮잠을 잘 수 있도록 회사마다 수면실을 필수적으로 구비해 놓고 있죠. 때문에 이 시간을 활용해 낮잠을 자고, 취미생활을 하거나, 회사 인근 어학원에서 수업을 듣는 직장인들도 많습니다. 실제로 필자와 아주 가깝게 지내는 지인은 이 시간대에 주로 낮잠을 청하는데, 점심시간을 이용해 전화를 하면 늘 수면실에서 잠에 취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곤 합니다. “제인… 내가 잠시 뒤에 다시 전화할게”라면서요.


더 반가운 것은 이들의 퇴근 시간이 오후 5시부터 시작된다는 점입니다. 때문에 우리 나라였다면 저녁을 먹고 휴식을 취할 때 즈음 시작했던 9시 뉴스와 같은 위치의 국민 프로그램이 이곳에서는 7시에 시작됩니다. 5시 정시에 퇴근해 집으로 돌아간 회사원들이 저녁을 먹고 부른 배를 두들기며 TV앞에 모여 앉을 때가 저녁 7시 무렵이기 때문이죠.


더욱이 지난해 8월부터는 국무원이 ‘주말 휴가(兩天半大周末)’권유 제도를 본격적으로 도입, 여름철에는 금요일에 오전 근무만 할 수 있는 조항을 신설했습니다. 당시 국무원의 이 같은 조치는 주말 휴가를 통해 국내 관광산업을 진흥시키기 위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를 통해 수 억 명의 근로자들은 주7일 가운데 2.5일의 휴일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죠.


필자인 저는 한국에서의 바쁜 삶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수 백만명의 샐러리맨들을 떠올리며, 감히 이곳을 ‘근로자들의 천국’으로 정의 내려 봅니다.


그러면서 한사코 느림을 고집하는 이들의 삶의 방식이 때론 더 많은 사람들에게 편안한 삶의 양식을 선사하는 하나의 방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습니다.


무엇이든 빠르게 진행되는 것만이 편리한 것이라 여기고 살아온 우리들의 모습에서, 조금 느리지만 편리함 대신 편안함을 추구하는 삶의 방식이 부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더 빨리, 더 멀리, 그리고 더 높이 가야만 승리한 것이라는 올림픽 정신과 상반되지만, 그것이 꼭 삶을 살아가는 진리가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잠시 생각해볼 여유조차 가져보지 못했던 과거의 제 모습을 떠올리게 된 순간이기도 합니다.


지금 이 순간,


“근심으로 가득 차 멈춰 바라볼 시간이 없다면, 그것이 무슨 인생이랴, 한낮에도 밤하늘처럼 별들로 가득 찬 시냇물을 바라볼 시간이 없다면, 미인의 눈길에 돌아서서 그 아름다운 발걸음을 지켜볼 시간이 없다면, 눈에서 시작된 미소가 입가로 번질 때까지 기다릴 시간이 없다면 가련한 인생이 아니랴. 근심으로 가득 차 멈춰서 바라볼 시간이 없다면…”


이라는 ‘William Henry Davis’의 ‘멈춰 서서 바라볼 여유가 없다면’의 구절이 떠오릅니다.


느리다는 것은 일면 ‘편리함’과는 동떨어진 것일 수는 있으나, ‘편안함’이라는 속성과는 더 가까운 것은 아닐까요.


느린 그들에 대한 타박을 거두고, 한 때 빠른 것이 최상의 선(善)이라고 여겼던 제 자신을 돌아봅니다. 당시의 필자는 빠른 업무처리를 위해 날마다 야근을 해왔었고, 깜깜한 새벽에 일어나 지친 몸을 일으켜 출근 준비를 해야 했었습니다.


사업가 또는 투자자로의 중국에 대한 못마땅한 시선을 거두어들이자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구분이 모호해집니다. 그리고 중국인들의 느린 삶의 방식에서 비롯된 ‘저녁 있는 삶’을 더 많은 이들과 공유하고 싶습니다.


/사진: 제인 린(Jane lin)    


중국에 대한 101가지 오해

 언론에 의해 비춰지는 중국은 여전히 낡고, 누추하며, 일면 더럽다. 하지만 낡고 더러운 이면에 존재하고 있는 중국은 그 역사만큼 깊고, 땅 덩어리만큼 넓으며, 사람 수 만큼 다양하다. 꿈을 찾아 베이징의 정착한 전직 기자가 전하는 3년여의 기록을 통해, 진짜 중국을 조명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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