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직장에 다니게 되면...' '운전을 시작하게 되면...' 하는 식으로,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해볼 시간만 주어진다면 타인이 나의 상황과 마음을 온전히 이해해 주리라 믿었던 시절이 있다. 세상에는 시간차를 두고서라도 끝내 넘어서지 못하는 경계가 있으니까, 어떻게든 닿을 수 있다면 행운이라며.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도 메워지지 않는 간극은 존재했다. 직장에서 끊임없이 소모되어 주말에는 침대에서 일어나는 게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인 사람도 있지만 직장은 직장일 뿐 퇴근하는 시간부터 하루가 시작되는 사람도 있고, 신경을 곤두세운 채 운전하고 나면 누워야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배짱과 여유가 있어 정차하는 동안 뒤차가 빵빵거리거나 손님이 두고 내린 쓰레기를 치우는 데에 에너지를 쏟지 않는 사람도 있으니까.
이십 대에는 서운한 마음이 들 때면 '나는 왜 이렇게 그릇이 작을까' 자책하곤 했다면, 삼십 대의 나는 '내가 오늘 힘들었구나' 하는 식으로 감정을 인정하고 원인을 헤아린다. 여전히 표현하는 데에는 서툴지만, 그가 그일 수밖에 없어 펼쳐진 소소한 상황과 내가 나일 수밖에 없어 느끼는 무거운 불편감을 이해하고 미워하지 않는다. (아, 내가 예수님은 아니니 조금은 미워하지만 금세 보내준다.) 그저 그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는 몰라도 내가 배려하고 있음을 알아주는 사람들이 있고, 나 역시 어떤 지점인지 확실치 않아도 그들이 나를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알기에, 감사하다.
좋아하는 작가님이 강연에서 "삼십 대보다는 사십 대가 좋아요."라고 말하셨다. 이십 대에는 삼십 대가 더 좋다는 말을 들었는데 삼십을 넘으니 사십 대가 더 좋다는 말을 듣는다. 여전히 어떤 순간에는, 또 어떤 사람들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적당한 거리가 있는 모든 사람과는 잘 지낼 수 있지만 누구와도 아주 가까이 지낼 수는 없는 사람 아닐까, 여전히 나를 의심한다. 그렇지만 사람을, 또 사랑을 믿기로 선택하는 지금의 나를, 미래의 나는 아주 고마워하지 않을까. 이십 대의 나는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자주 말하곤 했는데 이제 나는 삐죽빼죽해도 그냥 나이고 싶다.
트위터를 보다 보면 정답과 오답이 어떤 흐름에 의해 비가역적으로 정해지는 것 같고, 또 '손절'이라는 말이 유행할 만큼 관계를 끊어내는 게 지속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보다 현명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 세상에서 여지를 남겨두려는 모든 행위를 나는 애정한다. 내가 자꾸만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도 살아가고 사랑한다는 게 그런 여지로부터 시작되고 지속되는 게 아닐까 해서. 물론 도망쳐야 하는 경우도 있지만, 나에게 해로운 사람을 알려면 내 자신을 잘 알아야 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나에게도 아직 여지가 있다. 모든 곳에는 여지가 남아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