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수영 집착증을 이겨내고 푹 쉰 덕분인지 수면 시간 8시간을 채우고 나자 저절로 눈이 떠졌다. 아직 평일이지만 평일에도 열리는 시장을 구경해 볼 계획이었다. 이때는 몰랐지만 이것이 치앙마이 대쇼핑의 시작이었달까... 친구가 말하길 나는 지독한 실용주의자랬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져... 그렇지만 여행의 묘미 중에 쇼핑이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도 사실이긴 하다.
우선 집을 나서 아침 식사 장소로 가면서 찍은 꽃 사진이 남아있다. 대단한 관광지나 놀 거리가 있는 건 아니지만 치앙마이는 구석구석 꽃도 많고 아기자기한 매력이 있다. 아침 식사로는 샐러드를 먹었는데, 쌉싸름한 케일과 달콤한 오렌지와 망고의 조화가 좋았다. 생각보다 치즈가 너무 많이 들어있긴 했지만... 빵 맛집으로 유명한 곳이었지만 양심상 하나만 선택해야 했기 때문에 빵 대신 블랙 오렌지에 도전해 보았다. 음, 생각보다는 예상 가능한 맛이었다. 달콤 상큼한 오렌지 주스와 고소하고 쓴 에스프레소. 그치만 섞이면 섞일수록 양쪽의 매력이 다 서로에게 잡아먹히는 느낌이었다. 쓴 오렌지주스가 되거나 상큼함에 가려진 커피물이 되어버리는... 그치만 뭐든 한 번쯤 시도해 봐야 미련이 남지 않는 걸. 그러다 취향을 발견할지도 모르고.
식당에서 바로 그랩을 잡아 이동한 곳은 평일에도 열리는, 코끼리 바지와 망고 젤리가 주력 상품인 와로롯 시장이었다. 의도치 않게 요가 수업 6회권을 끊었지만 운동복은 딱 한 벌 뿐이었던 나는 편한 바지나 스포츠 브라를 사보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질이 좋지 않았다. '한국에 가도 입을까?'라고 질문해 봤을 때 아니라는 답이 나왔기 때문에 한 바퀴 둘러만 보고, 라탄 가방이 유명한 마하산으로 향했다.
라탄 가방 쇼핑에 꽤 많은 시간을 들였는데, 물건이 예쁘고 합리적인 가격이기도 했지만 가족과 친구 선물을 몽땅 사고 싶었기 때문이다. 호보백, 토트백, 숄더백 등등 가방도 종류별로, 거기다 부엌에 두면 좋을 자개 디자인이 들어간 크기별 쟁반과 모자까지 샀다. 직원 분들은 가방 1개만 더 추가하면 15% 할인이 된다며 파우치도 가방으로 쳐준다고 설득하셨는데, 계산해 보니 어차피 파우치를 공짜로 받는 거나 다름없어서 독특한 모양의 파우치도 하나 골랐다. 까먹고 있다가 마지막에 모자도 같이 계산해 달라고 하니 이번에는 물건 2개만 더 사면... 하셔서 "already too much"라고 손을 휘적휘적 저으며, 엄청나게 큰 비닐봉지와 함께 겨우 가게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개미지옥이 따로 없어...
근처에 위치한 지앙하 키친웨어에도 들렸지만, 특별히 마음에 드는 물건은 없었다. 망설이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센트럴 치앙마이였다. 시내에서 거리가 꽤 있어서 그나마 가까운 곳에 왔을 때 들려볼까 하는 심산이었다. 역시나 스포츠 브라를 사고 싶어서 나이키부터 들렸는데, 이때 깨달은 사실은 태국은 수입품이 엄청 비싸다는 것이다. 내장 브라캡이 달린 나시 한 장이 80,000원 가까운 가격이었는데, 로컬 브랜드는 어떨까 쇼핑한 결과 나시+가디건 세트, 긴 팔, 긴 츄리닝 바지 합쳐서 40,000원 가까운 가격에 구매했다. 브랜드와 보세의 차이일 수도 있겠으나 어쨌거나 굳이 해외 브랜드를 태국에서 살 필요는 없는 것 같다. 결국 운동복은 계속 빨아서 돌려 입기로 해... 그나마 세탁기가 있는 숙소에 묵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일회용 필름 카메라가 있을까 했는데 카메라 매장이 여러 개 있었고 가격도 나쁘지 않아 2개를 구매했다. 치앙마이에 머무르는 동안 꽤 요긴했고! 사실 내가 늘 갖고 싶었지만 가격 때문에 사지 않아 온 필름카메라는 라이카인데, 그동안 써온 니콘 tw zoom의 수명이 다하기도 했고, 이렇게 오래 원했으면 사는 게 맞지 않나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그치만 인터넷에서 가격을 찾아보고 다시 숙연해진... 에? 이백만 원이요?...
점심을 먹으러 푸드 코트에 들렸는데 꽤 신기한 시스템이었다. 학식 마냥 카드에 돈을 먼저 충전하고 푸드코트 안에서는 탭해서 결제하는 방식이었다. 이걸 몰랐던 나는 열심히 음식 주문까지 했다가 다시 카드를 충전하고 돌아왔지만... 해산물 커리가 올라간 밥을 시켰는데 역시나 고자극이었다. 자꾸 물을 찾게 돼...
나가는 길에 입구에 있는 팝마트를 보니 오전에 있었던 대기 줄이 사라졌다. 사고 싶은 건 없었지만 또 홀린 듯 들어갔고, 그렇게 구하기 어렵다는데 사볼까 싶은 마음에 라부부를 3개나 샀다. 나중에 집에 와서 까보니 왜 이걸 까보는 게 그토록 재밌는 일인지 이해하게 되었다. 근데 이제 라부부는 갔고 크라이베이비가 왔다며... 이왕이면 나는 웃고 있는 캐릭터가 좋은데 이것도 나중에 이렇게 홀린 듯 사게 될까?
숙소에 들려 짐을 두고 요가원으로 향했다. 이번 클래스의 이름은 싱잉볼이라서 싱잉볼을 들으며 요가를 하는 건 줄 알았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누워서 싱잉볼만 듣는 신기한 수업이었다. 그치만 명상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조금 분주했던 오전 시간에서 벗어나 몽롱한 상태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는 시간이라 지루하지는 않았다. 신기한 건 선생님이 싱잉볼이 몸의 순환을 도와주기 때문에 화장실을 가고 싶을 수도 있고, 목이 마를 수도 있으니 물을 많이 마시라고 안내해 주신 거였는데, tmi일 수 있지만 실제로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화장실에 다녀왔고 물도 뚝딱 마셔댔다. 과학적인 지는 모르겠지만 싱잉볼의 주파수가 뇌파를 안정시켜 주고 심신을 이완시켜 준다는데, 혼자 치면서 명상까지 하기는 어렵겠지만 어디서 들을 수 있을까 고민했을 정도로 마음이 많이 안정되었다. 요가의 세계도 이렇게 무궁무진하네...
요가원에서 나와서는 치앙마이 시내를 내려다볼 수 있도록 5층에 위치한 카페에 갔다. 요가원 바로 옆이라 숙소에 들려 다시 요가원 앞으로 온 꼴이라 조금 웃기긴 했지만, 치앙마이에서 그렇게 흔하진 않은 디카페인과 오트밀크 변경이 돼서 좋았다. 글을 조금 쓰고, 저녁을 먹으러 맥도날드에 갔다. 굳이 태국 음식이 아닌 패스트푸드 점을 찾은 게 웃기긴 하지만 거의 운동 캠프 급으로 요가와 걷기, 수영을 병행하다 보니 고칼로리 음식이 땡기기도 했고, 내게는 태국 음식이 너무 짜고 달고 맵기도 하고, 태국에만 있다는 콘 파이도 먹어보고 싶었다. 배불러서 숙소에 돌아와 간식으로 먹은 콘 파이는 뭐랄까, 옥수수 스프가 든 튀김 맛이었는데 튀김을 별로 좋아하진 않아서 아주 맛있진 않았으나 만족스러운 일탈이었다.
쓰는 시점에서 돌아보니 극악의 스케줄이 아닌가 싶은데 밤에는 수영을 했다. 그치만 물에 가만히 떠서 배영으로 휘적휘적, 아주 느리게 팔다리를 돌리며 내 숨소리에 집중하는 순간에는 '이대로, 이렇게 살 수는 없을까?'라는 생각이 들 만큼 행복했다. 전에는 억지로 최대한의 시간을 끌어 여행하고 나면 바로 그날 새벽이나 다음날 출근했으니 마음의 여유가 없었는데, 돌아갈 곳이 없는 지금은 '원하면 이렇게 살 수 있지.'라는 답이 떠올랐다. 물론 여행지에서 거주지가 되면 많은 것들이 바뀐다. 여행자처럼 소비에 치중된 삶을 살 수는 없고, 현생도 살아야 하며 건강과 평화 등 삶의 균형도 잘 맞춰 나가야 한다. 근데 그래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어쩐지 파고들었다. 이곳으로 떠나오기 전에 건강 때문에 꽤 많은 잔걱정을 했는데, 2주 동안 이렇게 잘 지낼 수 있으면 나 어디에서든 잘 지낼 수 있지 않을까. 어디든 새 출발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무도 없는 수영장에서 처음에는 한 바퀴, 두 바퀴, 자유형과 평영, 배영과 잠영을 번갈아 하며 숫자를 세었지만 다섯 바퀴쯤을 넘어가면서부터는 숫자를 까먹게 됐다. 이번 여행의 테마가 되어가는 것 같은데 사진이나 영상으로 기록하거나 숫자처럼 가시적으로 남기기보다는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끼고 마음에 새기려고 하다 보니 그렇게 많은 것들이 선명하다가도 조금씩 뭉개지고 그렇게 나의 모양으로 바뀌어가는 것 같았고 그러니 무엇이든 괜찮아지고 잠잠해지는 기분이었다. 덕분에 또 하루가 이렇게 무사히 저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