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째 날 나의 아침은 다른 날보다 일찍 밝았다. 근교로 쿠킹 클래스에 가보는 날이었으니까. 해보고 싶다는 생각만 있었지 한국에서도 요리를 배운 적은 없었는데, 역시 여행은 긍정적인 자극을 줄 때가 많다. 특히 혼자 여행을 하다 보면 평소보다 알차게 시간을 보낼 방법을 강구하게 된달까.
그랩을 부를까 망설이다 조금 시원한 아침의 기운을 믿고 픽업 장소까지 걸어갔다. 차량이 조금 늦었는데, 그동안 "너도 혹시 쿠킹 클래스 차량 기다리니?"라고 물어보는, 나처럼 사원 입구에서 길 잃은 것처럼 두리번거리는 사람들과 함께 기다려서 불안하지 않았다. 올드시티의 호텔 두 군데 정도에 더 들려 꽉 찬 차량으로 재래시장으로 향했다. 옆자리에 앉은 두 명은 프랑스인이었는데, 가는 동안 이들이 어린 시절 친구이며, 갓 학업을 마쳤고, 첫 일자리를 구했으며, 일의 시작 시기를 미룬 후 여러 나라를 여행 중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나의 앞자리에 앉은 이스라엘 가족은 부부가 직장을 그만두고, 자녀들의 학업은 중단하고 여행 중이며 10월까지는 태국에 있을 예정이라고 했다. 그 이후에는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돌아가든 여행을 계속하든 할 거라고. 아직 초등학생인 것 같은 이스라엘 소녀는 내가 한국에서 왔다는 말을 듣고 BTS를 좋아한다고 말했는데, 나는 BTS에 대해서는 할 수 있는 말이 조금도 없었다. 한국인이라고 다 BTS를 좋아하는 건 아닌데 어쩌겠니... "난 걸그룹을 좋아하는데, 블랙핑크 같은..."이라고 중얼거렸지만 소녀는 걸그룹에는 관심이 없다고 딱 잘랐다. "I like boys."라는 그 아이의 말에 아빠는 "What?"이라고 덧붙였다 ㅋㅋㅋ. 그치, 그건 좀 이상한 어감이긴 해... 프랑스인은 '너도 이 열풍이 지겹지 않아?'라는 뉘앙스로 한국인으로서 케이팝을 듣긴 하냐고 물어봤는데, 꽤 많이 듣는 게 사실이라 그렇다고 했다. 케이팝은 뭉뚱그린 용어고 사실 그 안에 장르는 참 다양한데 뭐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어... 팝 듣냐는 질문만큼 너무 광범위하잖아...
어쨌거나 프랑스인도 이스라엘인도, 한국인인 나도 공통적으로 일 문화에 대해서는 "intense"하다고 불평했다. 도대체가 휴가가 너무 적고 야근이 잦다는 얘기였는데, 그래서인지 여행지에 종착한 우리 모두는 조금은 더 말랑한 마음으로 서로를 대했던 것 같다. 아마 우리가 각자의 직장에서, 혹은 boundary에서 서로를 만났다면 전혀 다른 모습이지 않았을까.
요리 클래스의 세부 일정까지는 알아보지 않고 신청했지만, 클래스 장소에 도착할 때까지는 일종의 단체 투어 상품이었다. 재래시장의 상인들은 쿠킹 클래스 직원들을 알고 있어서, 직원이 우리에게 설명할 수 있도록 재료를 내어주고 맛보게 해 주었다.
처음 간 과일 가게에는 구아바 - 내가 태국에 와서 먹은 건 속살이 흰색이었는데 여기서는 붉은색을 팔고 있었다. -, 샐러드에 쓰이는 초록 망고와 달달한 노란 망고, 마찬가지로 쏨땀에 쓰이는 초록 파파야와 과일로 먹는 주황 파파야, 조금 더 작고 단단한 쪽의 속살이 붉은색, 그치만 흰 색도 맛있는 용과 같은 익숙한 과일뿐만 아니라 렁껑 - 작은 감자 송이 같이 생겼는데 맛은 새콤달콤하다고 한다. -이나 람부탄 같은 조금은 생소한 과일도 있었다. 람부탄은 하나씩 까먹었는데, '털이 있는 열매'라는 이름의 뜻과 걸맞게 외계인을 닮아 재미있었고 겉껍질이 쏙- 하고 알맞게 빠지며 속알이 나오는 과정에 쾌감이 있었다. 먹어 본 과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한국 뷔페에 가면 꼭 나오는 과일은 리치였던 것 같다. 미니 사과를 닮은 과일도 있었는데, 혼잡한 시장에서 낯선 태국어로 말해주시니 못 알아들었을뿐더러 아무리 검색해도 찾지 못하겠다. 이렇게나 세상에는 많은 과일이 있네.
붉은색으로 염색한 발효 달걀 - 선생님이 플라밍고 알이라고 장난쳤는데 나는 너무 순진해서 오~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했다 ㅋㅋㅋ. 거의 초딩 아니냐고 ㅋㅋㅋ. - 닭 피를 응고시켜 만든 큐브 - 내장 요리나 똠얌에 넣는다고 한다. - 재스민 쌀 - 은은한 향기 때문에 재스민 쌀이라고 불릴 뿐 재스민과는 상관이 없다. -, 스티키 라이스, 검은 쌀까지 설명을 듣고 나자 자유 시간이었다. 혼자 온 나는 어쩐지 조금 어색했지만 나중에는 편하게 시장 구석구석을 둘러보았다. 시장의 한 구석에서 바느질하는 할머니도 지켜봤다. 어쩐지 이런 장인 같은 분들에게는 눈길과 마음이 간다.
단체 여행에서는 눈치가 참 중요한데 n년째 여행 경력으로 눈치가 빠른 나는 다시 모이는 시간은 듣지 못했지만 다른 일행이 어디에 있는지 매의 눈으로 스캔하며 길을 잃지 않았다. 시장 한쪽에는 '튀긴 곤충' 섹션이 있었는데, 흥미로워서 꽤 오래 구경했다. 메뚜기나 장수풍뎅이 같은 것은 튀겨먹는다고 알고 있어서 놀랍진 않았는데, 밀웜을, 그것도 꽤 엄청난 양으로 팔고 있어서 신기했다. 나처럼 혼자 온 미국인은 "Ew"라고 계속 외쳐댔는데, 나는 뭐랄까, 내 편견일 수도 있지만 서양인의 이런 태도가 좀 싫었다. 먹어보고 싶지 않을 수는 있지만 굳이 팔고 있는 사람 앞에서 더럽다는 식으로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지 않은가. 뭐든 사실 익숙함의 차이일 뿐 희한한 음식은 어디에나 있는데 말이다. 심지어는 이게 아주 고급화될 수도 있고. 차로 돌아갈 때쯤에는 독일인까지 합세해 '누가 누가 더 이상한 음식을 먹어봤냐' 말하기 대회가 열렸는데, 생각해 보니 어릴 때는 동물원에 가면 번데기를 꽤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났다. 영어로 뭔지 모르니 "worm soup"이라고 했는데 그렇게 표현하니 뭐랄까 압도적으로 이상한 느낌이... 어쨌거나 두리안은 떠나기 전에 한 번은 먹어보고 싶은데 이번에도 용기는 안 났다.
클래스 장소에 도착해서는 정원을 먼저 둘러봤다. 라임, 카피르 라임, 고수, 타이 바질, 타이 부추 등 잎을 바로 따 향을 맡아볼 수 있도록 손바닥에 올려주셨는데, 특히 카피르 라임 잎의 향이 정말 강렬했다. 태국에 와서 먹었던 대부분의 음식에서 났던 향인데 너였구나! 그게 어떤 인공 감미료가 아니라 이 잎을 통째로, 조금 크다면 반으로 잘라서 넣은 결과였다는 게 신기했다. 정원을 둘러보는 동안 계속 잎의 향을 맡아댔는데 처음 잘렸을 때보다는 점차적으로 향이 옅어졌다. 당연한 거지만 신선할수록 향이 강렬한 걸 보니 식당에서는 꽤 신선한 재료를 쓰고 있나 보다고.
쿠킹 클래스에서는 쏨땀, 똠얌을 만들어 한 차례 식사하고, 망고 스티키 라이스, 카오쏘이, 팟타이를 만들어 두 번째 식사를 했다. 사실 이게 요리 클래스로 불릴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우리에게 주어진 역할은 아주 미미했는데 - 버섯과 바질을 찢거나 고추를 빻거나 음식을 저어가며 끓이거나 볶는 정도로 -, 파파야나 닭고기 같은 재료는 이미 손질되어 있었고, 우리의 동선에 맞춰 착착 옮겨졌으며, 선생님이 돌아다니시며 "간장 한 스푼이에요"라고 설명하고 계량해 주는 식으로 대리 요리를 해주셨기 때문이다.
웃긴 건 다른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매운 걸 원하는지 물어보고 고추를 1-2개 넣어주셨는데, 나는 한국인이라는 걸 알자마자 "you Korean, you can handle spicy"라며 고추를 마구 투하하셨다. 5-6개 정도. 혹은 매워 보이는 걸로 골라서. 뭐 괜찮겠지 했는데 역시 맛보니 딱 알맞은, 맛있는 매움이었다. 나를 앞서 온 한국인들이 ㅋㅋㅋㅋㅋ 한국인들의 적정 매움 단계를 잘 가르쳐주셨나 봄.
태국의 거의 모든 음식에도 팜슈가가 한 스푼씩 들어간다는 사실에 놀랐고 음식의 종류도 5개나 돼서 다 먹을 수 없을 것 같았는데, 한 음식에 작은 새우 2개 들어갈 정도로 적은 양이어서 그런지 배가 부르긴 했어도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
필름 카메라를 들고 있던 프랑스인과 사진에 대해, 사진기를 선물한 남자친구와 앞으로의 삶에 대해 - 학생 때는 정해진 길을 따라가지만 이제 우리에게는 자유가 있고, 돈이 중요하긴 하다만 내 앞가림할 수 있다면 사실 세계 어디에서 살아도 되지 않냐는, 문화에 따라 다르지 않아 참 신기했던 이야기- 떠들다 보니 금세 출발 장소에 돌아왔다. 즐거웠던 대화와 달리 우리는 모두 만나서 반가웠고 좋은 여행 되라는 쿨한 인사를 끝으로 각자의 길을 갔다.
태양이 작렬하는 오후 2시에 차에서 내렸기 때문에 황급히 물을 사 갈증을 해소한 다음 두 개의 사원을 둘러보았다. 차량 픽업 장소라 우연히 방문했을 뿐 관광지로 유명한 곳은 아니었기 때문에 조용히 기도하는 현지인들을 의식해 사뿐한 걸음으로 둘러보았다.
근처에 있는 맛차 가게에도 들렀는데, 직장을 때려치우고 맛차 가게를 차린 지 1년이 되었다는 일본인 주인은 꽤나 수다스러웠다. 현지 물가와 에어컨이 안 나오는 트럭이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꽤나 비싼 말차였지만, 대체 할 것도 없는 치앙마이에 오는 이유가 뭐냐고 이해하지 못하던 그는 모순적이게도 치앙마이에서 가보면 좋은 여러 장소를 추천해 주었다. 아마도 내가 지루한 시간을 보낼까 봐 약간의 오지랖을 부려준 게 아닐까. 주로 자연을 좋아하지만 이번에는 도시에 도전해 봤다는 나에게 - 사실 시골에 살면서 운전을 너무 많이 하게 되어 도보로 걸어 다닐 수 있는 여행지를 찾았던 거다. - 메캄퐁이라는 마을이 조용하고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알려 주었는데, 예상외로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흘러가고 있어 반나절이라는 시간을 근교 여행에 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여행은 언제나 조금은 아쉬운 점을 남겨두어야 돌아올 핑계가 되기 때문에 내가 이곳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어쩐지 안심이 되었다. 장사가 잘 안 된다는 그는 다음 달이면 가게를 닫을 것 같다고 했는데, 원래 바를 차릴 생각이다가 현지인들이 술을 별로 안 마시는 것 같아 맛차로 선회했다는 그의 경험처럼 뭐든 조금 무모할지라도 도전해 보는 삶이 어쩐지 귀감이 되었다.
또 20분가량을 걸어서 집에 도착하니 땀범벅이 되었고, 이른 아침에 시작된 일정으로 아주 피곤했다. 친구의 말대로 어쩐지 뭔가를 놓치게 될까 봐 어디든 나가볼까 쉴까 고민하던 찰나에 폭우가 시작되었다. 하늘이 이렇게 도와주다니! 폭우 덕분에 미련 없이 쉬기로 결정했다. 주변 맛집에서 구운 닭고기와 옥수수 쏨땀, 밥을 시켜 먹고 늘어지게 쉬었다. 이런 날도 있어야지.
쿠킹 클래스로 빠르게 지나간 하루지만, 여전히 나의 세상은 너무도 제한적이고 좁으며, 배우고 즐길 것은 도처에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요한 것은 언제든 떠날 용기와 새로운 것에 대해 마음을 여는 것뿐. 아차차. 당연히 돈이 필요하고. 어디든 여행지에서처럼 쓰기만 하면 당연히 삶이 재밌지 않겠냐고 ㅋㅋㅋ. 그렇게 여전히 전 세계를 떠돌며 집 없이 살고 싶다는, 좋아하는 노래의 가사를 떠올리며 안정과 자유를 저울질해 보는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