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앙마이의 셋째 날. 밤새 퍼부어대는 빗소리에 약간은 뒤척였는데, 날이 흐리더라도 아침은 아침이라는 듯 밝아지는 기운에 눈을 떴다. 그리고 '장화 가져올 걸 그랬나?' '계속 이렇게 퍼부어대면 어떡하지?'라는 나의 소소한 걱정들이 다 쓸모없다는 듯 준비를 마치고 바깥으로 나가자 비가 그쳐 있었다. 이렇게 대부분의 걱정은 일어나지도 않을 일들에 대한 것인데, 멈추기가 참 어렵지. 그럴 때는 역시 집 밖으로 나가는 게 많은 문제를 해결해 준다는 것을 다시 깨닫는다.
처음 향한 곳은 아사이볼 가게. 아사이볼은 브라질 음식이고 후덥지근한 날씨에 어울린다는 것 말고는 태국과는 상관도 없는데 어쩐지 빵이나 소시지가 들어간 전형적인 브런치보다는 건강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챗GPT가 아사이베리 자체는 당분이 적을지 몰라도, 퓨레 형태로 만드는 과정에서 보존과 맛을 위해 당분이 추가된다며, 베이스와 토핑을 합치면 당분이 상당할 거라고 알려줬지만. 먹는 시점에 나는 그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아주 맛있게 먹었다. 잘했지 뭐. 특정 음식을 한두 번 먹는다고 암이 재발하지는 않는다. 매일같이 꾸준히 먹는 음식이 더 중요하다. 그렇게 불안할 때마다 되새길 필요도 있겠지.
비로 인해 약간 내려간 온도와 평소 잘 먹지 않는 차가운 음식에 금방 식어버린 몸을 데우기 위해 약간 거리가 있는 카페까지 걸어가 보기로 했다. 아기자기한 가게들이 주를 이루는 치앙마이에서 '대형 카페'로 검색해서 찾은 카페 - 글 쓰기에 더 좋을 것 같아서 찾았는데, 경험해 보니 치앙마이에서는 아무리 작은 카페더라도 작업하는 사람들이 주를 이루고 아무도 눈치 주지 않기 때문에 굳이 대형 카페를 찾아갈 이유도 없는 것 같다. -인데, 어쩐지 한국 카페와 아주 유사한 느낌이었고 한산했다. 역시 이때까지는 내가 이미 당분을 많이 섭취했다는 사실을 몰랐고, 여행의 설렘에 사로잡힌 데다가 말려줄 일행도 없어서 코코넛 케이크를 시켰다 ㅋㅋㅋ. 한국인들의 디저트 최고 칭찬인 '안 달다'라는 평이 많았는데, 요즘 당분을 안 먹다 보니 첫 입은 꽤 달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먹다 보니 왜 그런 평을 했는지 알 수 있었는데, 케이크라기보다는 푸딩에 가까운 텍스쳐였고 약간은 심심한 우유 맛이었다. 희미한 코코넛 향이 가미된. 물론 글을 쓰는 한참 동안 - 옆자리에 앉은 미국인들이 너무 시끄러워서 자리도 한 번 옮겼다. - 다 먹지는 못했고, 남은 케이크를 포장해 다시 길을 나섰다. 물론 일기도 썼는데, 단 한 명이더라도 독자를 가정하고 쓰는 다른 글과는 달리 나만의 안전한 공간에 기록할 수 있는 감정의 색과 결은 또 다른 것 같아서, 쓰는 양이 많더라도 일기를 빼놓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어차피 혼자 여행의 장점은 시간이 많다는 것 아닌가.
태국은 음식이 맛있긴 하지만 향이랄까, 맵고 짜고 단 맛이랄까 너무 자극적인 부분이 있어서, 계속해서 목마른 기분이었기 때문에 점심에는 샐러드 가게를 찾아갔다. 원하는 재료를 하나씩 선택할 수 있는 메뉴가 있어 그린 샐러드, 두부, 병아리콩을 함께 먹었다 - 쓰면서 생각해 보니 분명 고구마도 시켰는데 안 나왔고, 일부러인 것 같은데 20바트도 덜 거슬러줬다. 괜찮은 가게였지만 다시는 안 가야지. -. 그런데 음식이 나오기 전부터 옆자리에 있는 사람이 말을 걸어서 주의가 조금 산만해졌다. 처음 몇 마디의 대화가 이제는 사람들이 국가 등 기존의 사회적 체계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내용으로 흘러갔기 때문에 - 가치관이 맞는 사람들끼리 공동 합숙을 한다든가 하는... - '혹시 사이비인가?' '뭘 원하는 거지?'라는 생각에 조금 경계했는데, 내가 원할 때 대화를 마무리하고 나올 수 있었고 연락처를 묻는다거나 불편하게 하지 않은 걸 보면 그냥 이상적인 사회를 꿈꾸는 말 많은 청년이었던 것으로 ㅋㅋㅋ.
전에는 낯선 사람들에게 먼저 말을 걸기도 하고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을 즐기는 편이었는데 - 예를 들어 직원의 타투가 예뻐서 어디서 했냐고 물었다가 플러팅으로 오해할 수 있다는 친구에게 끌려 나와서 대화를 마무리하지 못한 적이 있을 정도로 ㅋㅋㅋ - 교사가 되고 나서는 에너지 레벨이 너무 낮아져서 편한 사람을 만나는 데에도 큰 결심이 필요했을뿐더러 아프고 나서는 더더욱 나에 대해 알려주는 전 과정이 귀찮게 느껴졌다. '유제품, 당분, 정제 탄수화물, 튀김, 돼지고기, 소고기는 안 먹어요.' '물론 가끔은 먹는데요.' '술은 안 마셔요.' '지금 머리는 가발이에요.' '오른쪽으로는 무거운 짐을 들 수 없어요.' 같은. 어쩌면 불필요할지 모를 정보를 말해야만 피할 수 있는 상황이 너무 흔하게 벌어지는 것처럼 느껴졌고 그럴 때 따라올지 모르는 '왜?'라는 질문 역시 피하고 싶었던 것 같다.
옆자리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하자 "며칠 전에 카페에 갔는데 대낮에 차 마시면서 모임 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고. 오히려 너의 라이프스타일과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면 좋은 거 아니야?"라는 답이 돌아왔는데, 참 맞는 말이었다. 모든 모임이 다 술모임이고 파티고 내 건강에 해가 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건 아니다. 그런데도 나는 무엇이 그렇게 불편하게 느껴졌었는지 좀 머물러 생각해봐야겠다 싶기도 했고, 늘 변화하는 존재인 나 자신을 인정하고 thrive 하기 위해서는 조금 더 마음을 열어야겠구나, 깨닫기도 했다.
나름대로 좋았던 대화 끝에는 종종걸음으로 숙소로 향했다. 옷 갈아입고 가야 하는데 요가 클래스 시간이 간당간당했으니까. 역시나 요가원에 도착하니 시작 시간이 5분 정도 지나 있었지만, 눈치껏 강사님과 눈인사를 하고, 수련장 한편에 위치한 준비실로 들어가 나의 매트를 꺼내고, 호흡을 시작했다. 다행히 이미 알고 있는 나디 쇼다나 프라나야마 (교대 비호흡) 중이어서 - 물론 이름은 몰랐지만. - , 재빠르게 한쪽 콧구멍씩 번갈아 막아가며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에어컨이 없어 꽤 더워 나시를 입고서도 땀이 흥건했지만, 내가 무리하지 않고 해낼 수 있는 강도였고, 골반의 위치를 조정해 주거나 다리의 각도를 맞춰주는 강사님의 핸즈온도 즉각적으로 도움이 되었다. 언젠가 제주도의 야외 요가원에서 명상 요가 중에 비가 쏟아졌던 기억이 참 좋았어서 그 요가원에 있던 배롱나무도 좋아하게 되고 여행지에서 요가 클래스에 참여하는 습관이 생긴 건데, 그때처럼 비가 쏟아졌다. 아침에는 걱정의 대상이었던 비가, 그러니까 조금은 엉성하게 지어진 지붕을 두드리는 우렁찬 빗소리가 이번에는 마음을 파고들어 내 안에 남아있는, 제때 빠져나가지 못한 모든 것들을 말끔히 씻어내주는 것 같았다.
한 가지 조금 생소했던 경험은 수업이 끝날 때쯤 무릎을 꿇은 자세에서 눈을 치켜뜨고, 혀를 길게 내밀고, 하!!!!! 하는 짐승 - 강사님 설명으로는 사자 - 같은 소리를 냈던 거다. 나중에서야 이 호흡법이 '사하자 시호사나'라는 걸 알게 되었는데, 내가 느꼈던 것 그대로 뭔가 개운한 느낌이 들게 해준다고 한다. 사람들이 약간 거리낄 것을 이미 알고 계셨는지 처음에는 강사님이 보여주시고, 두 번째에 따라 하라고 하셨는데, 끄아악!!!!! 같은 이상한 소리를 입으로 뱉어보니 정말 신기하게도 자유로운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1회 체험 비용이 아닌 할인된 6회권을 결제하고 요가원을 나섰다. 남은 기간 동안 요가를 5회나 더 오려면 꽤 부담일 수도 있지만 오늘의 수업으로 얻어 가는 게 더 많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넷째 날은 아침 일찍 쿠킹클래스가 예정되어 있어 무리하지 않고 싶었는데도 수영 집착은 버리지 못했다. 역시나 비어있는 수영장에서 글도 쓰고, 해가 지니 조금 더 추웠지만 가볍게 수영도 했다. 저녁은 나갈 기운이 없어서 태국식 샤부샤부인 '수끼'를 시켜 먹었는데, 담백하고 맛있어서 순식간에 해치웠다. 알고 보니 내가 배달시킨 가게가 시장에서 꽤 유명하고 성수기에는 줄이 길어서 오히려 배달을 추천하는 맛집이었다. 이렇게 우연히 얻어걸린 것들이 더 큰 기쁨을 줄 때가 있는데, 역시나 쓸데없는 걱정이 많을수록 더 많은 것들을 알아보고 조사하게 된다.
쓰다 보니 나에게 음식은 참 중요한 것 같다. 여행에서는 음식의 비중이 커서 그런지, 하루를 정리하는 기준이 식당이나 카페네 ㅋㅋㅋ. 그래도 확실히 스트레스 요소로부터 물리적으로 벗어나니 잠도 잘 자고, 밥도 잘 먹고, 뭔가를 해보고자 하는 에너지도 회복하고 있다. 역시나 오늘도 쉼과의 균형을 잘 찾아보자는 다짐으로 마무리하는 글.
그나저나 혼자인 게 외롭지 않게 느껴지는 데에는 하루 종일 주고받는 친구와의 카톡이 한몫하는 것 같다. 분명 한국에서 일상을 살아가면서 해외여행을 나와있는 나의 하루가 전혀 궁금하지 않거나 귀찮을 수도 있을 텐데, 관심을 가지고 물어봐주고, 나의 안전과 행복을 생각해 주는 친구가 있어 행복할 수 있다는 걸 아주 먼 거리에서 더 가깝고 깊게 알아가게 된다. 내가 얻어가고 있는 이곳의 우렁찬 기운을 바람에 실어 보내면 그곳에도 늦지 않게 닿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