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미약 덕분에 낯선 곳에서의 첫날이지만 푹 자고 일어났다. 님만해민에 위치한 숙소에서 지내고 있어 공항이 가깝기 때문에 비행기 소리도, 나름 핫한 지역으로 그 특유의 소음도 있었지만 나의 단잠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6월부터 10월까지라는 우기의 한복판에 치앙마이행을 결정했기 때문에 날씨가 거의 흐리고 비가 내릴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첫날 나를 맞아준 햇살은 너무도 뜨거웠다. 원래 가려고 했던 브런치 가게에서 테이크아웃만 가능하다고 한 덕에 언젠가 갈 수도 있겠다며 저장해 둔 샌드위치 가게로 발걸음을 돌렸는데, 도착하니 땀이 뚝뚝 떨어졌다. 하지만 이 역시도 어쩌면 여행자의 첫날을 돌봐주는 행운 같은 거였다고, 무섭게 쏟아지는 새벽녘의 빗방울을 반쯤 무의식의 상태로 감각하며 깨달았다.
아무런 준비 없이 치앙마이에 떨어진 나의 눈에 처음 들어온 건 차량이 좌측통행을 한다는 거였다. 이런 것도 모르고 여행에 오다니 싶었지만 - 하긴 공항 가는 길에 아빠가 "치앙마이는 산악 지역이지?"라고 묻는데 "그래? 난 몰라."라고 대답한 것이 조금 더 한심했다. 이제야 알게 되었지만 치앙마이는 산에 둘러싸인 분지다. - '태국은 식민지가 아니었지 않나? 왜 영국식이지?' 하는 궁금증에 몇 가지를 검색해 보았다.
우선 꽤 흥미로운 사실은 - 나에게만 흥미롭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상식일지도 모르는 일... - 영국에서 차량이 좌측 통행했던 이유가 마부의 편의를 위해서였다는 거다. 대체로 오른손잡이인 마부가 채찍을 휘두르다 마차나 보행자를 치면 안 되니까 왼쪽 통행이 유리했다는 것. 어쩐지 말이 불쌍하게 느껴지지만 나름대로는 지혜로운 결정이었나 싶기도 하고...
그렇다면 태국은? 태국은 근대화 시기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일명 '대나무 외교'로 끈질기게 자국의 독립을 지켜냈다고 한다. 인접 국가인 미얀마, 말레이시아 /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은 각각 영국 / 프랑스령이거나 그 영향권 안에 있었는데, 바람이 불면 유연하게 휘지만 부러지지 않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대나무처럼, 태국은 교묘한 줄타기 외교를 한 것이다. 그래서 태국 문화 안에서는 영국과 프랑스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도로 시스템은 영국식인 것처럼.
재밌는 건 실제로도 태국에 대나무가 많다는 거다. 치앙마이에서 열리는 많은 마켓 중 밤부 마켓도 있는데, 아마도 대나무가 많은 장소에서 열려서 그렇겠지? 주말을 지나야 제대로 된 치앙마이 마켓에 가볼 수 있을 것 같다.
다음으로 치앙마이 길거리를 거닐며 후각으로 느껴진 건 강한 대마 향이었다. 교환학생 시절 기숙사를 지나다 보면 나는 낯선 냄새였지만 어느 순간부터 대마향이라고 인지할 수 있게 된 냄새였다. 대마가 그려진 가게를 꽤 많이 지나쳤고 심지어는 가게 안에서 대마를 재배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태국은 대마를 약재로 사용했던 경험을 토대로 의료용 대마를 합법화했지만, 이후 코로나 19로 인한 관광 산업의 타격을 회복하고자, 어쩌면 내세운 선거 공약을 밀어붙이는 정치적 상황으로 대마가 마약류에서 제외되고 가정 재배까지 허용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관리 문제로 인해 다시 규제를 강화하는 움직임이 있다는데... 미국에서는 '대마가 담배나 술보다 건강하다.'라는 논리를 꽤 자주 접했기 때문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에서 마약류로 분류해서 그런가 다행히도 나는 가능한 이 냄새로부터 멀리 떨어지고 싶은 마음이었다. 법은 나라마다 다르고 가치 역시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그냥 그렇구나, 하고 낯선 지점을 인지하고 넘어갔다. 다만 가끔 대마인지 모르고 대마가 그려진 티셔츠를 사 입는 관광객을 보곤 하는데 - 아니면 대마인 줄 알고도 입었는데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것일까? - 그런 점은 좀 경계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외국어가 쓰인 티셔츠를 입는 것만큼이나 위험천만할지도 모른다구.
마지막 치앙마이의 첫인상은 식물이 많다는 거였다. 베트남, 싱가포르, 필리핀 등 다녀본 동남아시아 국가와 비슷한 점이기도 했지만, 실내로 들어가면 진짜 식물과 가짜 식물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진짜 식물이 인공에 가까운 강렬한 색깔과 반짝임을 자랑하는 것이 특징인 것 같았다. 실제로 카페에서 당연히 가짜라고 생각했던 식물들에 물을 주는 직원을 발견했을 때 적잖이 당황했다. '어, 뭐야, 이거 진짜였어?' 하면서.
아참, 이곳에서는 집이나 가게 앞에 놓인 노란색의 아기자기한 사당도 눈에 띄는데, 아직 이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차차 배우고 써보려고 한다. 오늘은 그것이 집이나 건물에 머무르는 수호신을 위한 사당이며, 이름이 '산프라픙'이라는 것까지만. 13~18세기 란나 왕국의 수도였기 때문에 치앙마이 도시 곳곳에 사원도 있는데, 올드타운이 아닌 님만해민에 묵고 있어서 아직 가보지는 못 했다. 이것도 차차...
다시 둘째 날의 동선으로 돌아가보자면 너무도 친절했던 샌드위치 가게의 태국 언니가 떠오른다. - 나보다 동생 같았지만 멋지면 다 언니잖아. - 우선 그녀는 연신 땀을 닦아내는 나에게 필요하면 커튼을 쳐서 해를 가려도 된다고 설명해 줬다. 괜찮다고 했지만 그녀는 내가 주문한 음식의 요리를 끝내자마자 다가와 커튼을 쳐주었고, 음식을 내주면서는 "I like your hair!"이라는 천진한 말로 나의 헤어스타일을 칭찬해 주었다. 그녀 역시 숏컷으로 자르고 싶었는데, 미용실에서 해주지 않는다며. 역시 고객이 하고 싶다고 해도 재차 확인하고 끝내 안 해주는, 그러니까 결과에 대한 엄청난 부담을 가지고 있는 미용사의 마음은 만국 공통인가 보다 ㅋㅋㅋ. 그녀는 항암 치료가 끝난 지 4개월 차에 접어들어 아직 머리가 짧은, 그러니까 사실은 숏컷으로는 잘라본 적이 없는 나의 사정은 모르지만, 너무도 맑은 얼굴로 칭찬해 주어 내 기분을 아주 좋게 만들어줬다. 그리고 내가 가게를 나설 때 오늘의 계획에 대해 묻고서는 - "난 아무 계획이 없어. 그냥 커피나 좀 마시고 쉬려는 게 다야."라고 대답했다. - 자신이 좋아하는 치앙마이의 카페를 열 곳 가까이 추천해 주었다. "너 하루에 커피 몇 잔이나 마실 수 있는데?"라는 질문과 함께. 그중에는 유명한 카페 주인이 운영하는 또 다른, 덜 유명하지만 마찬가지로 맛이 좋은 카페도 있어서, 알아두면 꽤 유용할 것 같기도 했다. 그녀가 많은 정보를 줘서가 아니라 그냥 여행에서의 낯섬이랄까 긴장된 마음을 눈 녹듯이 녹여주었기 때문에, 그녀의 순수하고 예쁜 얼굴을 기억하고 싶어 셀피를 찍자고 제안했다. 그녀의 초상권을 위해 올리지는 않지만. '태국 새램들 정말 친절하잖아!' 하면서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그녀 덕분이었다.
샌드위치로 배를 채우고 나서는 카페로 향했다. 달달한 크림을 라떼 위에 얹어 주는 소프트 라떼, 태국의 시그니쳐 메뉴인, 오렌지 주스에 에스프레소를 내려주는 블랙 오렌지 커피 - 치앙마이에 있는 동안 한 번쯤은 시도해보고 싶다. - 가 유명한 것 같았는데, 이미 토마토 주스 - 갈아주는 줄 알고 설탕을 빼달라고 했는데 토마토맛 시판 음료였다. 확인은 못 해서 다행이지만 당분이 꽤 들어 있었겠지. - 로 하루치의 당분을 초과한 것 같아서 아아를 주문했다. 산미와 고소함이 적당히 어우러지지만 꽤 연하고 슴슴한 맛의 커피였다.
카페에서는 일기를 쓰고, <나는 그것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라는 김금희 작가님의 엽편소설 모음집을 조금 읽었다. 좋은 것은 당연했지만 그래도 김금희 작가님은 글은 신기하게도 길면 길수록, 깊으면 깊을수록 좋은 것 같다. 오히려 이제는 대하소설을 써 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김금희 작가님이 생각하는 결말에 닿을 수 있다면 조금 빡빡한 부분이 있더라도 기꺼이 읽어낼 마음이 있으니까.
카페 에어컨이 빵빵한 데다가 아이스 음료를 들이키니 금방 몸이 추워져서 야외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책에 집중하기보다는 도로와 사람들을 구경했다. 얽히고설킨 것처럼 보여도 필요한 곳곳으로 정확하게 이어질 전깃줄과 빽빽하게 정렬하여 주차된 오토바이를, 그리고 타인의 오토바이를 조금씩 옆으로 옮기고 자신의 오토바이를 끼워 주차하는 행위를 오랫동안 관찰했다. '한국에서는 저렇게 하면 왜 만지냐고 하지 않을까? 기스 났다고 억지로 주장하거나...' 그런 생각이 떠올랐는데 각박한 게 한국 사회인지 나인지 알 수는 없었다. 어쨌거나 막히는 길을 요리조리 피해 다니는 오토바이와 건널목 없이 천천히 길을 건너는 이곳의 방식이 이상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늦은 오후에는 조금 쉬다가 수영장으로 갔다. 대장내시경 + 용종제거한 지 2주가 되지 않아서 비행기 타는 것도 겨우 허락받았기 때문에 평소와 달리 무리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10일이나 시간이 있다고 생각하니 나의 수영 집착증도 조금은 가라앉는 것 같았다. 조금은...
숙소의 공용 수영장에는 사람이 많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단 한 명도 없었다. 수영장을 통과해야 갈 수 있는 헬스장에는 한둘씩 드나들었지만... 신기했다. 나라면 같은 운동이라면 무조건적으로다가 수영을 선택할 텐데! 물론 근육 부자들의 의견은 다르겠지만...
지난번 다낭에서 강렬한 햇살에 크게 당했기 때문에 일부러 야외지만 지붕이 있는 수영장을 고른 거였는데, 햇살의 힘은 정말 대단한 것이라 물이 약간 차가웠다. 물론 한 번 심호흡하고 들어간 다음에는 거슬리지 않는 게 또 물이 주는 안락함이자 인체의 신비기도 했다.
저녁으로는 태국 북부의 대표 요리인 카오 소이를 먹어보았다. 진한 코코넛 커리 국물에 계란면과 튀긴 계란면을 고기와 곁들여 먹는 요리인데, 첫 입은 '뭐야, 이거! 너무 맛있잖아?'였고 다 먹어갈 즘에는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고 싶은 고자극 음식이었다.
밥을 다 먹고서는 쇼핑센터를 구경했다. 아메리칸 이글이 있어서 옷을 피팅해 보았는데, 편하고 아주 마음에 들었지만, 수입품이라 그런지 바지 한 장이 무려 80,000원대의 가격이었다. '태국이니까 좀 싸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던 게 너무도 오산이어서 황급히 가게를 나왔다 ㅋㅋㅋㅋㅋ. 아직도 아른거리긴 하지만 아직 고민할 시간은 많으니까.
마트에서는 물과 용과를 샀다. 첫날 배달시켰던 용과가 맛있었기 때문! 친절한 태국 언니가 꼭 잘 익은 두리안을 먹어보라고 추천했고 두리안을 발견하기도 했지만 내 눈으로는 어떤 두리안이 잘 익은 두리안인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포기하는 전략을 선택했다. 언니 말로는 잘 안 익은 두리안은 냄새가 심하고, 잘 익은 두리안은 정말 맛있다고, 태국인도 잘 안 익은 두리안은 안 먹는다고 했다 ㅋㅋㅋ. 돈을 좀 더 내면 잘 익은 두리안을 구할 수 있다는 팁을 주었는데, 며칠 지내며 가격을 비교해 보고 용기가 나면 도전해 봐야겠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원님만이 있고 치앙마이의 카페들은 생각보다 늦게 닫아서 원님만 안에 카페로 향했는데, 디카페인 + 무당 메뉴를 찾는 건 하늘의 별따기여서 무당인 줄 알고 시킨 차가 달달해서 실망했다. 한 입만 마시고 자리값이라 생각하며. 그곳에서 어제의 브런치도 업로드하고 쇼핑하는 사람들 구경하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그냥 편하게 쉬자며 치앙마이에 왔는데 여행이란 게 사람에게 어떤 에너지를 주는 건지, 나도 모르게 꽤 바쁜 둘째 날, 하지만 technically 관광으로 따지자면 첫째 날을 보냈다. 요가원을 등록하고 쿠킹 클래스까지 예약한 지금은 남은 일정이 더 다채로워질 것 같은데, 무언가 하고자 하는 마음 자체가 삶의 원동력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반가운 마음도 있고. 그렇지만 무리하지 않고 잘 쉬는 균형점을 찾는 게 중요하다는 걸 이젠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오늘 일찍 침대에 눕는 것으로 실천해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