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프리다> 덕후가 된 건에 대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이여 만세!

by 유영운

뮤지컬 <프리다>를 본 것은 순전히 우연한 계기였다. 근래 월우파를 재미있게 봤는데, 아이키 님 채널에 <프리다> 캐스트 분들이 출연하셨다. 전에 도영 팬인 친구를 따라 <웃는 남자>를 보러 갔다가 무대를 날아다니는 한 배우님께 온통 시선과 마음을 빼앗겼는데, 그때 기억하고 꼭 작품 찾아봐야지 했던 김소향 배우님도 함께. 그래서 김소향+아이키 님 캐스트로 8월 20일에 나의 첫 <프리다>를 보러 갔다. 무려 삼연 째인, 그리고 6월에 첫공을 올린 <프리다>를 뒤늦게 알게 된 것도, 김소향+아이키 님 페어막인 것도 너무나 아쉬웠지만, 그래도 본 게 어디야. 이렇게 좋은 뮤지컬 만난 게 어디야. 그만큼 지난 몇 주간 홀딱 빠져있었던 뮤지컬 <프리다>다.


나는 꽤 오랜 시간 프리다 칼로를 좋아해 왔다. 처음에는 그녀의 작품이 좋았다. 한동안 내가 카톡 배경화면으로 설정할 만큼 좋아했던 그림은 제목도 긴 <우주, 대지, 디에고, 그리고 세뇨르 솔로틀의 사랑의 포옹>이라는 작품인데, 그림 속 프리다는 아기 형상의 디에고를 안고 있으며, 그런 그녀를 mother nature (어머니로 의인화된 대자연) 를 떠올리게 하는 대지의 여신이, 그리고 그녀를 또 다른, 더 거대한 우주의 여신이 안고 있다. 어려운 시기에 자연으로 감각되는 신을 찾게 되는 것은 인간이 공통적으로 하는 경험이어서 그런지, 이 작품에 형상화된 대지와 우주에 어쩐지 끌렸다. 디에고는 끝내 프리다가 끌어안아야 하는 아기가 되었구나. 디에고는 왜 제3의 눈을 떴을까? 대지의 여신은 젖을 주는구나. 세뇨르 솔로틀은 어떤 존재일까? 그녀의 반려견 이름일 뿐일까? 멕시코 신화에서 복합적인 신적 존재를 의미하는 걸까? 프리다는 세뇨르 솔로틀로부터 위안을 찾는 것일까 그녀 자신이 세뇨르 솔로틀로 승화된 것일까? 늘 프리다 칼로의 그림에 먼저 매료되었고, 그 의미와 해석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건 그다음 순서였다. 그만큼 프리다 칼로의 작품에는 보는 이를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1494567348165.jpg El amor de la tierra y de mí, de Diego y del Señor Xólotl, Frida Kahlo


프리다 칼로의 삶에 대해 조금 더 자세하게 알게 된 건 영화 <프리다> 때문이었다. 이 글을 쓰며 찾아보다가 2002년에 개봉한 영화라는 사실에 놀랐는데, 예술적이고 무엇보다 색감이 좋았던 영화로 기억하기 때문이다. 영화를 통해 내게 남은 프리다 칼로의 모습은 '역경을 딛고 일어난 위대한 여성'이라는 것이었다. 어쩌면 당연하다. 영화 <프리다>를 접했을 때의 나는 인생의 고비를 아직 맛보지 않은, 그때는 몰랐지만 꽤나 맑고 순수했던 20대 초반이었으니까.

MP0HHrtx-4ACCu9dlAD0MZGkBYM.jpg Frida, directed by Julie Taymor


뮤지컬 <프리다>를 보는 나는 달랐다. 고작 서른한 살이 되었을 뿐이지만, 유방암을 견뎌 내면서 질병의 고통과 그를 따라오는 정신적인 고통에 대해 잘 알게 되었으니까. 뮤지컬로 다시 만난 프리다는 대단하거나 특별해서가 아니라, 그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어서 고통을 피하지 않고 다만 견딘 것으로 보였다. 그런 나에게 와닿은 건 당연히 <코르셋>이라는 넘버였다. 붕 뜬 건 첫사랑에 대한 그녀의 마음뿐만이 아니었으니, 프리다는 전차 사고로 9개월 간 침대 신세를 지게 된다. 그녀가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오른손뿐이었다. 이제 완전히 끝났으니 편히 쉬라는 죽음의 데스티노, 그리고 버텨내고 붙들어야 한다는 프리다의 또 다른 완벽한 자아 메모리아 사이에서 프리다는 마침내 결심한다. 멋진 인생도 화려한 조명도 필요 없다고. 다만 조그만 숨이, 사랑할 힘이 남아 있다면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나는 프리다 칼로라고. 포기하지 말라고.

데스티노 역의 이지연 배우님은 프레스콜에서 가장 좋아하는 가사로 "아직 사랑할 힘이 남아 있다면 쓰러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어"를 꼽으셨는데, 그 이유로 이 여자는 누군가 사랑해 줘서가 아니라 본인이 사랑할 힘이 남아 있어야 일어선다는 점이 눈물겹다고 말씀하셨다. 이 영상을 보고 난 뒤에는 <코르셋>을 들을 때마다 프리다가, 그리고 어쩌면 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내면의 힘에 집중하게 되었다.


뮤지컬 <프리다>의 첫 관람 후기는 당연히 아이키 님이 노래를 너무 잘한다는 것이었다. 특유의 재간둥이 매력으로 진행자인 레플레하 역과, 프리다와 관객들을 꼬시는 (?) 디에고 역을 밉지 않고 재미있게 잘 풀어나갔다. 김소향 님과의 즉흥 티키타카도 꽤 재밌었고, - "이거 뮤지컬이야. 숨 헐떡 거리지 말고 노래해." 같은 대사를 치시다니 ㅋㅋㅋㅋㅋ - 아이키님의 존재가 고통 가득한 이 작품에 산뜻한 환기 요소가 되어 주었고, 무엇보다 김소향 배우님은 정말 대배우였다.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이 관객에게 그대로 전달되어 향리다가 흐느끼고 울부짖을 때마다 그 뼈저린 고통을 관객도 함께 통과하는 것 같았다. 거의 목쉰 소리가 날 만큼 울부짖으시는데 또 다음 넘버에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감정은 풍부하지만 음정과 딕션은 정확한, 엄청난 노래를 해내신다. 멋진 팔근육으로 코르셋과 목발을 갑옷과 검처럼 들었다고, 난 이미 충분하니까 낭만 따위 없어도 된다고 소리치는 그녀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사랑해요 향리다! 이때는 몰랐지만, 이렇게 나는 뮤지컬 <프리다>의 세상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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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뮤지컬 <프리다> 첫 관람. 우연히 아이키님 퇴근길도 봤는데 실물이 정말 예쁘셨다!


'아무래도 좀 아쉬운데, 한 번 더 볼까?" 하고 찾아간 두 번째 관람은 그로부터 11일 후인 8월 31일이었다. 나를 놀라게 한 건 오프닝에서 데스티노 역의 이아름솔 배우님의 솔로 파트였다. '뭐야 뭐야, 노래 왜 이렇게 잘해?'라는 생각을 할 만큼 부드럽고 매혹적인 목소리였다. 이때부터였다. <칭가 뚜 마드레 라비다>에 빠진 게. 아니 그만 포기하고 죽으라는 게 이렇게 감미롭고 신나면 어쩌라는 건가요 솔스티노 ㅠㅠ. 프리다 역의 김지우 님도 메모리아 역의 유연정 님도 좋았다. 두 분 모두 딕션이 너무나 정확하시고 노래도 까랑까랑할 뿐만 아니라 아름답기까지 하시다니... 이때부터 나는 막공까지 얼마 안 남았다는 사실이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소향 님이 여러 인터뷰에서 모든 캐스트에 대한 자부심을 괜히 내비친 게 아니셨구나. 한 번이라도 더 봐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나마 이 날은 스페셜 커튼콜 데이어서 잠깐이나마 영상을 남길 수 있었다. 물론 눈으로 담으려고 영상을 길게 찍지는 않았지만, 뭐라도 소중한 걸 남긴 게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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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나의 세 번째, 네 번째 뮤지컬 <프리다>는 9월 5일, 6일이었다. 월우파콘과 병행 관람에 출국을 앞두고 있어 부담이긴 했어도 혜화까지 운전하는 길이 설렘으로 가득했다.

우선 정유지 님은 김소향, 김지우 님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아름다우셨다. 외모도 물론이지만 셋 중 가장 아름답게 연기하고, 노래하고, 춤추시는 것 같았다. 친구는 <프리다>의 넘버가 조금 더 아름다울 수 있을 것 같다고 했고 나는 날 것 그대로인 지금의 느낌이 좋다고 했는데, 친구도 정유지 님 캐스트로 봤으면 더 좋아했겠다 싶을 만큼 가장 예술적이셨다. 현대 무용 느낌의 독무 파트도, 길쭉길쭉해서 그러신가 역시 아름다우셨다. 그리고 이젠 정말 솔며들어버린 것일까... 이아름솔 님에게 더욱 빠져버렸다. 퇴근길에 실물을 염탐할 정도로.


3번의 뮤지컬 모두 레플레하 역은 아이키 님 캐스트로 봤기 때문에 마지막으로는 꼭 향리다를 다시 한번, 그리고 이번에는 레플레하 역까지 올 뮤지컬 배우 캐스트로 보고 싶었다. 다른 캐스트도 봤기 때문에 알아차린 사실이지만 향리다만 <코르셋>을 부르고 첫 번째 자화상을 소개하신 후, 그 자화상을 쓰다듬고 퇴장하신다. 뭐랄까. 상처가 나면 나았는지 자꾸 들여다봐줘야 하기 때문에 자화상을 자주 그렸다는 프리다 칼로 그 자체의 모습 이어서일까, 뒷모습으로도 연기하는 소향님의 진심 덕분일까, <코르셋>의 감동이 퇴장과 그 후에까지 여운으로 남았다. 그리고 레플레하 역의 장은아 님. 역시 뮤지컬 배우는 뮤지컬 배우구나 느낀 게 프리다와 레플레하의 대화가 숨 쉬듯 자연스러웠다. 조금의 멈칫도 어색함도 없었다. 장은아 님만 다르게 부르는 <허밍 버드>도, 솔스티노가 간드러진다면 파워풀하고 강단 있는 선영데스티노도, 대사까지 꾀꼬리같은 목소리로 하시는 허윤슬 님까지. 마지막까지 정말 좋았고 왜 마지막이 있어야 하는지, 나는 왜 올 캐스트를 다 보지 못했는지 슬퍼하며, 그러나 이만하면 됐다고 뚝뚝 떨어지는 미련을 거둬들이며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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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를 통해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얻었고 캐스트에 따라, 또 같은 캐스트라도 그날그날에 따라 다른 뮤지컬의 매력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고 말하면 진심이 전달될까.

유방암을 경험하고 많은 나의 모습을 잃었다고 생각해 왔다. 마음껏 원하는 음식을 먹는 나. 술 한 잔 걸치고 빨개진 얼굴로 까불며 거리를 활보하는 나. 겨드랑이 림프를, 수술 상처를 수시로 들여다볼 필요가 없었던 건강한 나. 그리고 가발의 세계를 몰랐던, 원할 때면 손가락을 넣어 머리를 가르고 질끈 묶었던 나. <프리다>는 그런 나에게 이런 위로를 건넸다. 다만 변했을 뿐 사라지지 않았다고. 살아있는 건 그 자체로 축복이지 않냐고.

향리다의 막공에 간 덕분에 무대인사를 통해 이런 말을 들었다. "여러분들 한 분 한 분이 다 프리다입니다. 여러분들 각자의 고통이 얼마나 많은지 그 크기를 가늠할 수는 없지만 이 자리에 앉아서 오늘을 견디고 있는 여러분이 바로 프리다 칼로입니다. 여러분들은 인생의 그 뜨거운 열정, 뜨거운 그 순간을 기억하시면서 꼭 아름답게 인생을 찬양하시며 살아가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인생은 고통스럽지만 그래서 찬란하다고, 마지막 날에 충분했다고 말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살아가보자고, 그 진심이 작품을 통해서도 무대인사를 통해서도 절절하게 전달되었다. 소아마비, 전차 사고, 남편의 바람, 세 번의 유산과 발이 썩어가는 고통까지. 프리다가 살 수 있다면 우리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친구에게 <프리다> 사연이 안 올라오면 EMK를 인수하겠다는, 돈은 없지만 너무나 뜨겁게 이 작품을 사랑해 가능한 농담까지 던져보았지만, 사연을 기다리면서도 마음이 풍족한 이유는 근 몇 주간 나의 전부였던 삼연의 감동 덕분이다.

아, 하나 더 달라진 점이 있다면 빛나는 사람들은 가까이서 쫓기보다 멀리서 바라보는 게 더 자연스럽다 생각해 온 내가 향카롱 (김소향 님 팬클럽)에 가입했다는 것. 수시로 김소향, 이아름솔, 박선영, 장은아 배우님의 다음 작품을 놓칠세라 검색해 본다는 것. 언젠가 뮤지컬 <프리다> 덕분에 내가 한 시기를 넘어서고 살아갈 힘을 얻었다고, 프리다 팀에게 전할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다. 프리다, 안녕. 사랑했고 고마웠어. 부디 또 만나.


IMG_7778 (1).jpg 프리다, 안녕. 사랑했고 고마웠어. 부디 또 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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