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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길: '노땅'이라는 말은 누구를 지우는가?

시간의 쓸모와 존재의 폭력에 대하여

by root


우리는 '노땅'이라는 호칭을 통해서 그 시간의 깊이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는 우리 자신을 배제하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다.

‘노땅’이라는 말은 나이 많은 사람을 조롱하는 표현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단어는 훨씬 더 깊은 폭력을 품고 있다. 그것은 한 인간으로서의 시간을 쓸모없음으로 선언하는 말에 다름 아닌 것이다. 또한 그 쓰임새의 기준은 철저하게 현재 시점의 생산성이다. 더 이상 조직에 이익을 가져오지 않는다면 그는 과거의 젊은 시절에 어떠한 희생과 헌신으로 공동체를 지탱해왔는지와는 무관하게 “퇴물”로서 낙인찍혀 삭제된다.


이러한 단어가 작동하는 방식은 우리 사회가 한 인간을 고유한 개체로서의 존재로 보지 않고 그로부터 뽑아낼 수 있는 기능으로만 파악하는 구조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 ‘그 자체로서의 존재’로 존중받기보다는 ‘쓰임새로서의 도구’로 평가되는 것이다. 나이 들었다는 이유로 그는 더 이상 ‘사용할 가치 없음’으로 평가되고 그가 유지해 온 삶의 시간은 폐기된다.


하지만 인간의 시간은 단지 효율성으로서의 분할이나 목표를 지향하는 경로가 아니다. 우리 삶 자체에서는 도달해야 하는 지점이나 정점이란 없다. 인간의 시간은 그 자체로 충분한 의미를 가진 하나의 흐름이고 그 안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이 되어간다.


우리 사회가 한 인간의 고유한 시간성을 지우고 인간임을 박탈하는 방식

그러나 현재 우리 사회는 그 시간의 흐름을 오직 자본의 축적 수단으로써, 평가를 위한 그래프 위에서만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한다. 인간으로서, 우리의 시간이 ‘쓰임새’로서만 환원된다는 것은 인간의 과거가 망각되고, 현재 시점의 효율만이 평가된다는 것이다. 오래된 시간은 그의 경험과 식견에 대한 존엄이 아니라 ‘낡음’으로 간주된다. 그리하여 늙음은 결핍이 아니라 깊이라는 사실이 우리에게서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하이데거가 말해주듯이 인간은 단지 지금 여기에 놓여 있는 것만이 아니라, 시간을 통해 존재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과거와 현재가 그리고 미래가 하나로 얽힌 시간성 속에서 자신을 이해하고 그의 고유한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다. 한 인간의 과거를 지워버리고 단지 현재만으로 평가하는 행위는 그에게서 ‘인간으로서의 고유성’을 단절시킴과 동시에 인간을 박탈하는 일이 된다.


‘노땅’이라는 말은 단순한 구어체 혹은 비속어라고 할 수없다. 그것은 한 인간의 고유성을 제거하는 선언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가 더 이상 조직에 기여할 수없다고 판단되는 순간에 그를 기억에서 지우고 내친다. 바로 그 지점이 공동체가 스스로 공동체이기를 멈추는 시작점이다.

노인은 과거에 ‘존재했던’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여전히 여기에 있고, 그의 시간은 여전히 현재에 흐르고 있다. 그리고 그 시간은 ‘불필요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기억과 깊이를 보존하는 시간인 것이다. 우리가 노땅이라는 호칭을 통해서 ‘잉여’가 된 것은 그가 아니라 그가 거쳐온 시간을 수용할 능력을 모두 잃어버린 우리 사회의 상상력 그 자체다. 그리고 그 시간의 깊이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는 우리 자신을 배제하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다.


효율성이 아니라 인간존엄의 윤리가 필요하다.

늙음은 결핍이 아니며 시간이 한 인간을 통해서 형성한 깊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그 깊이를 외면하고 단지 현재의 기준만으로 인간을 평가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우리 스스로의 뿌리를 자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땅’이라는 호칭은 쉽게 흘려보내기 어렵다. 그것은 한 고유한 인간 시간 전체를 조롱함과 동시에 우리 스스로가 얼마나 손쉽게 내쳐지고 잊히거나 잊히게 할 수 있는지, 얼마나 비인간적인 세계 속에 살고 있는지 보여주는 사회적 자화상인 것이다.


우리 인간의 시간을 단순한 소비재로 전락시키는 것, 그리고 그러한 행위에 침묵할 때, 가장 먼저 희생되는 것은 늙은 자들일 것이다. 하지만 결국, 마지막에 무너지는 것은 우리 사회의 인간성 그 자체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효율성'이 아니라 쓸모를 넘어서는 인간 존엄의 윤리, 바로 그것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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