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사소한 것들』클레어 키건,침묵 너머의 용기

[앗싸들의책수다 #1] 당신의 크리스마스는 안녕한가요?

by 최은녕 라온나비



[앗싸들의책수다 #1] 침묵 너머의 용기

당신의 크리스마스는 안녕한가요?

클레어 키건, 『이처럼 사소한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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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양심을 외면하지 않는 한 남자의 조용한 성탄일기.
침묵과 순응 사이, 작지만 단단한 인간의 존엄성을 찾아서.



들어가며


"크리스마스."

이 단어는 언제나 따뜻하고 포근하게 들립니다. 하지만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그 아름다운 환상 뒤편에 숨겨진 냉혹한 진실의 온도를 보여줍니다.

한때 성냥팔이 소녀가 혹한 속에서 성냥불을 켰다면, 이 소설 속의 빌 펄롱은 한겨울의 석탄을 들고 사람들의 마음속 꺼진 불씨를 되살리려 합니다. 그 둘 사이의 차이는 단 하나. 성냥은 금세 꺼지지만, 석탄은 오래 탄다는 것입니다.

이 소설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과연 우리는 빌 펄롱처럼 '불편한 양심'을 택할 용기가 있는가? 혹은 그의 아내 아일린처럼 '현실적인 외면'을 선택하게 될 것인가?






한겨울, 작은 용기의 시작


1985년 아일랜드의 작은 마을 뉴로스. 석탄 배달업을 하는 평범한 가장 빌 펄롱은 아내와 다섯 딸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수녀원에 석탄을 배달하던 그는 우연히 차가운 창고에 갇힌 한 소녀를 발견합니다. 갓난아기를 낳고도 방치된 채, 추위에 떨고 있는 그녀. 모두가 알고도 모른 척하는 막달렌 수녀원의 현실, 가난과 낙인 속에 버려진 미혼모들. 그리고 교회의 권력 앞에 침묵하는 마을 사람들.


펄롱은 처음엔 망설입니다. 아내는 만류하고, 이웃들은 경고합니다. 하지만 마침내, 그는 그 작은 소녀를 트럭에 태워 수녀원 밖으로 데리고 나옵니다.

그 순간, 한 사람의 침묵이 깨어지고, 세상은 아주 조금 바뀝니다. 대체 무엇이 그 평범한 남자를 움직였을까요? 이 소설 속 인물들을 만나면서, '침묵과 용기' 사이에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들을 함께 찾아보겠습니다.






인물들 : 침묵과 용기 사이의 선택들


1. 빌 펄롱 ― 고뇌하는 성실함


"그때 미시즈 윌슨이 어머니를 품지 않았다면, 지금 이 아이가 내 어머니였을지도 모른다."

펄롱은 그야말로 ‘성실함 그 자체’입니다. 시동을 켜놓았고, 실어놓은 짐이 주문과 일치하는지 전날 저녁에 확인해 놓고도 재차 확인합니다. 어제 야적장 바닥이 깨끗한지, 밤새 저울에 남겨둔 건 없는지 살핍니다. 사무실에 할 일이 없어도 문을 열고 전등을 켜고 둘러봅니다.

이토록 꼼꼼하고 빈틈없는 성격은 그의 겸손한 성실함을 보여줍니다. 길 건너 집에 땔감 배달 메모를 적는 와중에도 전화가 끊길 때까지 지켜보고 1~2분 더 울리지 않는지 기다리는 모습. 이런 성실한 삶의 태도가 결국 그를 수녀원의 진실을 외면하지 못하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그는 1946년 4월 1일, 만우절에 태어난 16살 미혼모의 아들입니다. 학교에서 '사생아', '만우절에 태어난 아이'라 놀림받았지만, 큰집에 사는 아이로 '봐줌'의 시선을 체감하며 사회의 질서를 일찍 배웠습니다.

기술학교를 거쳐 석탄 야적장에서 일할 때부터 "일머리 좋고 사람들하고 잘 지낸다"는 평판을 얻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술을 멀리하는 생활 리듬을 스스로 다잡고, 일꾼들을 존중하며, 잔돈이 생기면 가난한 이웃에 나누고, 비 오는 날 트럭에 사람을 태워주고, 몰래 석탄과 장작을 내려놓는 조용한 선행을 이어갑니다.

수녀원에서 젖 얼룩이 번진 채 빈 식탁 앞에 앉은 소녀를 보고도 바로 들이받지 못해 스스로를 책망하지만, 끝내 "그들이 가진 힘은 우리가 준 만큼"이라고 말하며 침묵의 공모에서 걸어 나옵니다.

펄롱은 생각이 많은 편이지만, 결론을 내리면 행동으로 끝까지 책임지는 사람입니다.



2. 아일린 ― 지극히 현실적인 외면, 가족을 지키려는 필사적인 방어


“내 말이 바로 그거야. 걔들은 우리 애들이 아니라고."

검은 머리카락과 회색 눈을 가진 아일린은 펄롱의 아내이자 다섯 딸의 엄마입니다. '살림 감각'과 현실 감각이 예민한 사람입니다. 외풍이 심한 창문을 대출로 고치고, 돈을 아껴 계획적으로 쓰며, 다섯 딸의 생활 루틴을 깔끔히 관리합니다.

가족의 생계와 딸들의 교육에 지대한 관심을 쏟으며, 불필요한 위험을 피하고 안정적인 삶을 유지하는 것을 최우선 가치로 여깁니다. 남편의 선행을 미덥지 않아 하는 건 냉정함이 아니라 책임감 때문입니다. 술주정뱅이를 '가장'으로 용납하지 않는 태도처럼, 가정의 안전을 위협하는 변수에는 단호합니다.

펄롱이 수녀원 일을 이야기했을 때, 그녀는 이 대사를 통해 단호하게 선을 긋습니다. 이는 체제의 보복을 현실적으로 두려워하기 때문이고, 한편으로는 "아이들이 잘 큰 건 내 덕"이라 말할 수 있을 만큼 헌신해온 자기 확신에서 비롯됩니다.

펄롱에게 "사람이 살아가려면 모른척해야 하는 일도 있는 거야. 그래야 계속 살지"라고 말합니다. 펄롱이 미시즈 윌슨의 선의를 이야기할 때, 아일린은 씁쓸하게 반박합니다. "미시즈 윌슨이 우리처럼 생각하고 걱정할 게 많았겠어? 그 큰 집에서 연금 받으면서 편히 지내는 데다가 농장도 있고..."

아일린은 나쁜 사람이 아니라, 가족을 지키기 위해 두려움으로 선을 긋는 엄마입니다. 그녀의 냉소적이고 체념적인 태도는 불안정한 삶을 살아가는 필사적인 자기 방어 기제이며, '행동하지 않는 우리 다수'의 모습을 거울처럼 비춥니다.



3. 미시즈 윌슨 ― 조건 없는 사랑과 지지를 주는 '선의의 샘'


“사람한테서 최선을 끌어내려면 그 사람한테 잘해야 한단다."

전사한 남편의 연금과 농장을 바탕으로 검소하게 살며, 이웃과도 척지지 않는 균형 감각을 지닌 개신교도입니다. 늘 단정하고 우아한 차림새를 하고 있으며, 누구에게나 품위 있는 태도로 일관합니다.

그녀는 열여섯 미혼모였던 펄롱의 어머니를 내치지 않고 병원으로 데려가 출산을 돕고, 아이와 함께 집에 머물게 했습니다. 펄롱에게 글을 가르치고 심부름을 맡기며, "누구나 어휘를 갖춰야한다."는 말로 가난을 뚫는 '언어의 사다리'를 쥐여 주었습니다.

결혼을 앞둔 펄롱에게는 몇천 파운드를 쥐여주어 자립의 발판까지 마련합니다. 그녀의 친절은 동정이 아니라, 지혜로 다듬어진 온기였습니다. 한 사람의 삶을 불쌍히 여기지 않고, 자립할 수 있는 가장 실질적이면서도 고결한 방식의 사랑입니다.

보수적 질서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을 현실적으로 지켜낸, 조용한 권위의 사람입니다.



4. 네드 ― 말없는 지지


“하느님만이 아시겠지"

펄롱의 어머니가 일했던 농장의 과묵한 일꾼입니다. 큰 체격에 말수는 적지만, 주변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주는 은근한 배려심이 몸에 배어있습니다.

펄롱이 원하던 선물은 아니었지만 그에게 받은 보온 물주머니는 나중에 "그 선물 덕분에 밤마다 그 뒤로도 오랫동안 따스함을 느꼈다"고 회상합니다. 그는 밤의 추위를 견디는 법을 몸으로 가르쳤고, 구두끈을 묶는 법, 면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며 아버지 없는 소년에게 남성성의 긍정적 모델을 보여주었습니다.

펄롱이 자기 아버지가 누구인지 물었을 때 네드는 "하느님만이 아시겠지."라고 말하며 어쨌거나 여기에서 잘 컸고 잘 살고 있지 않냐고 말해줍니다. 그가 불러준 아일랜드 민요 '까까머리 소년(The Croppy Boy)'은 펄롱에게 세상의 냉혹함과 불의에 대한 저항 정신을 은연중에 전수했습니다.

그는 펄롱에게 혈연의 불투명함을 대신해 돌봄의 확실함을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자리를 크게 옮기지 않지만 누군가의 내면을 크게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5. 수녀원의 소녀들 (특히 세라) ― 침묵의 희생양


"내 아기 어떤지 물어봐 주시겠어요?"

차가운 창고 속 소녀 세라는 펄롱의 어머니 세라와 겹쳐지는 인물입니다. 둘 다 미혼모였고, 사회로부터 버림받았습니다. 이 짧은 질문은 인간의 존엄이 파괴된 상황에서도 엄마의 가장 원초적인 사랑과 절박함을 드러냅니다.

소설 속 수녀원에는 '선한목자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직업학교와 세탁소가 있었습니다. 이곳은 실상 '타락한 여자들'이라 불리는 이들이 새벽부터 밤까지 고된 빨래로 속죄를 받는 곳이었습니다. 어떤 이는 정맥류를 얻을 정도로 착취당했고, 아이들은 빵과 버터만 먹는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었습니다.

펄롱은 어느 날 수녀원에서 젊은 여자들과 어린 여자아이들이 맨발에 끔찍한 회색 원피스를 입은 채 죽어라 바닥을 문지르고 있는 참혹한 모습을 목격합니다. 그곳의 소녀는 "우리를 도와달라", "아저씨 집으로 데려가 달라"고 애원하며, "일하다 죽을 때까지 일할게요. 저한테는 아무도 없어요. 그냥 물에 빠져 죽고 싶어요."라고 절규합니다.

펄롱이 소녀에게 "나랑 같이 집에 가자, 세라"라고 건넨 한마디는 이 소설에서 가장 강렬한 순간입니다. 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는 것, 나의 고통을 인정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펄롱은 그녀를 보았고,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6. 수녀원장 ― 위선의 극치


"더러움이 있는 곳에 복이 있다는 말도 있죠."

마을 수녀원의 최고 책임자입니다. 단정하고 엄숙한 수녀복 차림에 위압감을 주는 눈빛과 흐트러짐 없는 자세를 유지합니다. 매우 정중하고 친절한 말투를 쓰지만, 그 이면에는 타인의 약점을 간파하고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끄는 노련함이 엿보입니다.

펄롱이 "원장님, 저희 때문에 바닥에 발자국이 남았습니다"라고 말하자, 수녀원장은 "괜찮아요. 더러움이 있는 곳에 복이 있다는 말도 있죠."라며 가증스러운 위선을 떨칩니다. 그녀는 봉투를 꺼내며 "청구서를 보내주시면 처리하겠습니다. 일단 이건 크리스마스니까"라고 말해 펄롱을 회유하려 합니다.

수녀원장은 펄롱에게 말합니다. "아들이 없으시다니, 섭섭하겠어요." 이 한마디는 딸들은 가치가 없다는 암시이자, 아들이 없는 것은 불완전하다는 메시지를 던집니다.

그녀의 표면은 정중하고 논리는 단단하지만, 그 단단함은 타인의 취약함을 붙들어 매는 방식으로 유지됩니다. '교화'와 '정결'의 언어로 강제노동과 굴욕을 포장하며, 돈을 셀 때의 태도, 깔끔히 닦인 바닥, 회색 원피스와 맨발의 소녀들—그 대비 속에서 그녀의 진짜 신념이 드러납니다.

개인적 악이라기보다 제도의 얼굴을 한 악이며, '하얀 제복'으로 가려진 권위의 속살을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7. 미시즈 케호 ― 현실적 한계 앞에 체념


"수녀들이 안 껴 있는 데가 없어요. 다 한통속이야"

펄롱의 석탄 가게에 자주 들르는 수다스러운 이웃입니다. 유쾌하고 사교적인 성격이지만,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정보를 꿰뚫고 있으며 때로는 불평도 늘어놓습니다.

그녀는 펄롱에게 수녀원의 권력이 얼마나 강력한지 경고하며 "수녀들이 안 껴 있는 데가 없어요. 다 한통속이야, 어느 한쪽하고 척지면 다른 쪽하고도 원수가 되는 거예요. 조심하세요."라고 말합니다.

그녀의 말은 선의에서 나온 경고라기보다는, 거대한 체제 앞에서 무기력하게 순응하고 침묵하는 다수의 체념을 보여줍니다. 그녀의 충고는 차갑지 않지만 뜨겁지도 않습니다. 생존에 필요한 온도죠.

그녀는 악인이 아니며, 동시에 체제의 마찰을 줄이는 윤활유 같은 사람입니다. 행동 대신 타협을, 분노 대신 체념을 권하는, 일상의 '지혜'를 대표합니다.



8. 마을 사람들 ― 침묵의 공모자들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훈련을 가장 잘 받은 사람들입니다. 세탁물은 새것처럼 돌아온다는 소문과, 소녀들이 새벽부터 밤까지 일한다는 소문을 동시에 믿습니다.

성당과 학교, 병원과 가게 사이 얇은 경계에서, 서로의 침묵을 거래하며 살아갑니다. 누구도 큰소리로 악행을 지시하지 않지만, 모두가 작은 목소리로 악행을 가능하게 합니다.

공동체가 '깨끗함'의 이미지를 유지하는 방식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집단입니다. 이들은 '내 일이 아니니까'라는 이유로 진실을 외면하는 가장 현실적인 존재이자, 가장 섬뜩한 공모자들입니다.







행동하는 양심의 미학


클레어 키건은 펄롱을 영웅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그는 다섯 딸을 키우는 가장이고, 두려움도 있고, 망설임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지 않음의 죄'를 견디지 못했습니다.

"일어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 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은 지나갔다."

그의 행동은 세상을 바꾸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수녀원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고,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침묵합니다. 하지만 펄롱은 더 이상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 순간, 한 인간의 존엄은 다시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었다고 작가는 말합니다.






마무리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크리스마스의 낭만을 부수고, 양심의 온도를 묻습니다. 선은 거창한 결심이 아니라,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하지 않기로 한 일'을 하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걸 펄롱이 보여줍니다.

성냥팔이 소녀가 한겨울 밤의 어둠 속에서 켰던 불꽃과 펄롱이 품었던 석탄의 온기, 그건 다르지 않습니다. 불은 작지만, 그것이 꺼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그 마음이야말로 인간이 인간으로 남게 하는 마지막 불씨입니다.

"그들이 갖는 힘은 딱 우리가 주는 만큼 아닌가요?"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그들에게 얼마만큼의 힘을 주고 있는가.




다음 편 예고

[2편] 선의의 씨앗들과 상징의 세계


1 편에서 『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주요 인물들과 그들의 이야기를 살펴보았다면, 다음 편에서는 빌 펄롱의 내면을 빚어낸 '선의의 씨앗들'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작가가 소설 곳곳에 숨겨놓은 다양한 상징들을 함께 탐구하며 작품의 깊이를 더해보겠습니다.

펄롱의 삶을 형성한 '사소한 것들'이 어떻게 그를 '침묵하지 않는 사람'으로 만들었는지 함께 찾아볼까요?






댓글로 함께 나눠요.


1. 『이처럼 사소한 것들』 속 인물 중, 가장 공감되거나 기억에 남는 인물은 누구인가요?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2. 당신에게도 펄롱처럼 '이건 외면할 수 없다'고 느낀 순간이 있었나요? 그 경험은 어떠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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