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은녕 Nov 01. 2021

시를 이렇게 막 솔직하게
써도 되는 거예요?

책 읽는 소년원 이야기 - # 2 시 감상과 패러디 시 쓰기


 

   “헐, 선생님, 시집은 싫다고 지난주에 말씀드렸잖아요. 에세이나 소설을 읽고 싶다니까요.”

  시집이 왜 싫은지 물었더니 시는 짧긴 한데 뭔 소린지 모르겠고, 외워야 해서 싫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지금까지 그 친구에게 시는 짧지만, 자기와는 동떨어져 있는 저 세상의 단어들의 향연이고, 이해하지 못하는 말들로 어우러진 ‘말뭉치’에 암송해야 하는 숙제일 뿐이었나 보다.   

  일단 시집을 읽고 수업을 시작하는 것을 보류하고, 책사회에서 선물로 만든 시카드를 한 세트씩 나눠주었다. 소녀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파스텔 톤의 예쁜 시카드를 받아 든 아이들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30장의 카드를 살펴보고 가장 마음에 드는 시카드를 고르라고 했다. 아이들은 꼼꼼하게 시카드를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꼭 한 장을 골라야 하느냐며 다섯 장의 카드를 들고 고민하는 친구, 그림은 이게 예쁜데, 시는 이게 맘에 들어서 어떤 것을 골라야 할지 모르겠다고 고민하는 친구, 다른 친구가 자신과 같은 시카드를 골라 다른 카드로 바꾸는 친구도 있었다. 일단 자신이 고른 최고의 한 장을 들고 예쁜 목소리로 낭송을 하고 고른 까닭을 돌아가며 나눠보았다. 아이들은 30장의 카드를 겹치지 않게 골랐다. 박성우의 <보름달>, 함민복의 <가을>, 고정희의 <고백>, 김상열의 <사랑>, 나태주의 <풀꽃>, 안도현의 <너에게 묻는다>, 윤동주의 <서시>, 박세현의 <너무 괜찮다>, 김춘수의 <꽃> 등을 들고 그림이 예뻐서, 이미 알고 있는 유명한 시라서, 글이 마음에 와닿아서 등등 선택한 이유도 각각이었고, 친구의 낭송을 들으며 아이들도 즐거워했다. 어쩌면 이렇게 예쁜 카드를 선물로 주실 생각을 했느냐며 감사하는 말을 전했다. 가족(엄마)과 친구에게 이 카드에 편지를 써서 보낼 것이라며 기뻐했다. 하지만 시카드를 개인이 가질 수 없다는 담당 선생님의 한마디 말은 봄날 같았던 교실을 엘사의 겨울왕국으로 만들어버리고 나가셨다. 아이들의 투덜거림, 실망하는 탄식이 내 마음으로 쏟아져 촘촘히 박혀 따끔거렸다. 안타깝게도 예쁜 시 카드는 수업교재임에도 불구하고, 개인물품 소지 불가라는 소년원의 규칙에 따라 수업시간에만 아이들이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시카드를 관사로 가져갈 수 없다고 투덜거리는 아이들에게 퇴소할 때 꼭 선물로 줄 거라고 속상해하는 마음을 달래 보았다. 가뜩이나 시집을 읽기 싫다는 친구들의 분위기를 시카드로 겨우 바꿔놓았는데, 이런 복병 출현이라니..... 속이 탔다. 걱정스럽게 아이들을 바라보는 내게 “원래 그래요. 샘들은. 우린 물건 가지고 싸우지도 않는데, 딴 애들 땜에 피해를 본다니까요. 쳇” 하며 금방 평정심을 찾아주었다. 그들의 빠른 태세 전환이 얼마나 고마웠던지 안쓰럽던 맘을 다잡고, 박성우 시인의 <난 빨강> 시집을 펼치게 했다.     

  시는 제목이 여러 가지를 내포하고 있으니 제목을 보며 시의 내용을 상상해보기로 했다. 목차를 펼쳐 다 같이 입을 맞춰 제목을 읽었다. 제목이 매력적인 것은 마음속으로 찜해두고 어떤 내용일지 생각해본 후 그 시를 묵독으로 읽기로 했다. 조용한 묵독 시간. 갑자기 여기저기서 키득거리는 웃음소리와 짧은 감탄사가 들려오더니 자기가 고른 시를 친구들에게 읽어주고 싶다고 손을 들었다. 제일 먼저 손을 든 친구가 최대한 실감 나게 자신이 선택한 시(‘몽정’과 ‘문 잘 감가’)를 낭송했다. 제목이 살짝 야하고 궁금해서 골랐다고 했다. 다 같이 그 시를 들으면서 다른 친구들의 감상도 나누었다. 너무 그 상황을 잘 묘사했다면서 경험을 나누었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자신들이 고른 시를 다른 친구들에게 읽어주겠다고 손을 들었고, 돌아가면서 발표했다.         

  아이들이 가장 기다리던 간식 시간! 간식에 집중하던 친구들이 오늘은 먹으며 시집을 들춰 보고 서로 시집을 펴서 읽어주며 속닥속닥 키득거리며 조금 긴 간식시간을 마무리했다. 아이들이 선택해서 낭송하고 키득거리거나 울컥했던 시는 “몽정”, “학교가 우리에게”, “두고 보자”, “은밀한 면도”, “문 잘 감가”, “정말 궁금해”, “꼭 그런다”, “몽땅 컸어”, “면도 후”, “공원 담배”, “압정별”, “보름달” 등이었다. 다행스럽게 아이들은 <난 빨강>의 매력에 빠졌다. 서로 자신이 발견한 시를 읽어주고, 자신의 경험과 이야기로 교실 분위기는 소란스러움으로 활기를 띄었다. 시인이 청소년 시절 겪었던 자신의 경험을 자연스럽게 표현한 말들이 아이들의 마음에 가 닿았나 보다.

   한 친구가 질문이 있단다. “근데요, 쌤. 이렇게 시가 막 솔직하게 써도 되는 거예요? 막 야하고, 부끄러운 거를 써도 괜찮아요?... 시 별거 아니네. 이렇게 쓰면 저도 쓸 수 있을 거 같아요.” 

  그럼 우리도 시인이 되어보자 말하고 예쁜 색깔 종이를 나눠주었다. 각자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시를 쓰고 싶다고 했다. 보름달 시를 읽어주었던 친구는 부모님에 대한 사랑을 지금 여기서 깨달아 그리움을 담아 시를 썼다. 남자 친구와 연애 중인 친구는 몽글몽글 사랑의 감정을, 보고 싶은 친구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남자 친구와 얼마 전 이별한 친구는 소심한 복수심을, 박성우 시인의 시를 패러디하여 정심학교 생활도 아이들의 말로 시가 되어 낭랑한 목소리로 울림이 되었다. 시를 읽으면서 아이들은 변덕스럽고, 부끄럽고, 지질하고, 슬프고, 억울하고, 화나고, 엉뚱한 자신의 못난 모습이 자신만 그런 게 아니란 걸, 그런 감정을 겪으며 누구나 성장한다고 괜찮다고 위로받는 것 같았다. 마무리 수업 소감을 나누는데 시집이 싫다던 아이가 이런 시라면, 이런 종류의 시집이라면 언제든 좋다고. 다음 수업시간의 책을 궁금해한다.

  우리가 함께 읽고, 자신의 느낌과 경험을 나누고, 공감하고, 뭐 그까짓 것 나도 쓸 수 있겠다며, 문득 자신의 이야기도 쓰고 싶다고 근거 없는 자신감을 주는 것, 그래서 무엇인가 끄적거리게 하는 힘! 이것이 ‘다 함께 책 읽기’의 힘이 아닐까? 

  어느 봄날 교과서에 실려 있던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읽고, 느낌을 나누기보다 비유법을 배우고, 님의 침묵에서 ‘님’은 누구를 상징하는지 찾고 외워 문제집을 풀었던 그때의 기억이 씁쓸하게 떠올랐다. 아이들에게 먼 훗날 오늘 우리가 함께 했던 이 시간의 기억이 씁쓸한 책 읽기 시간으로 기억되진 않기를 빌어 본다. 

매거진의 이전글 색다른 경험으로 다가간 그림책 함께 읽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