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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seph Mar 02. 2022

영어라는 세계

줌파 라히리의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나에겐 2002년 해외생활을 시작할 무렵부터 '원어민만 쓸 법한' 영어 표현을 꾸준히 수집해온 노트가 있다. 눈에 띄는 문장과 단어를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아 게걸스럽게 섭취하던 시절만큼은 아니지만 지금도 꾸준히 하고 있단 점에서 아마도 밥 먹기와 잠자기 정도를 제외하면 내 평생 가장 성실하게 해온 일이라 할만하다. 책 몇 권을 집필할 수 있을만한 분량이 쌓인 지금 이 노트를 돌아본다. 이젠 내 언어의 일부가 되어 다소 시시하게 느껴지는 숙어 (그렇지만 당시엔 얼마나 간절했었던가!), 그리고 여전히 내 것이 되지 못한 낯선 단어들.. 신기하게도 그중 일부는 어떤 상황에서 적어뒀는지 지금도 기억을 해낼 수가 있다. 만감이 교차한다. 이 해묵은 노트는 한때 내가 꿈꿨던 이상향과 내 한계와 좌절, 자기혐오와 성취와 희열, 욕망 그 자체.



'언어가 우리 삶이나 세계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아는 것은 우리의 지적 의무다'라고, 언어학자 고종석은 말했다. 그의 말처럼 언어는 스스로를 표현하는 도구일 뿐 아니라 나를 둘러싼 세계와의 관계 형성의 최전선에 있기에 언어가 내 안에 남긴 족적을 따라가 보는 건 모든 개인에게 중요한 과업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낯선 환경에서 낯선 언어로 살아가야만 했던 경험은 누구에게나 소중하다. 모국어로 숨 쉬듯 사용했던 '언어'가 처음으로 낯선 무언가가 되는 경험을 한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적 의무'는 꽤 멋진 표현이긴 하지만 나에겐 너무 고상하게 들린다. 이방인 됨을 경험한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내게 있어 이 과정은 자랑스러운 족적 이라기보다는 '상흔'을 더듬어 따라가는 일이기에 - 원어민 같지 못한 내 억양을 내 귀로 들어야 했던 순간들, 정확한 표현을 찾지 못해 버벅거리는 내 모습을 타인의 눈을 통해 바라보는 경험, '사실 난 더 잘할 수 있는데'를 되뇌다 쌓여버린 자격지심, 능숙하지 못했던 발표나 실패한 유머 같은 걸 끊임없이 복기하며 자책했던 수많은 퇴근길. 영어와 나의 관계를 돌아보는 건 대체로 1보 전진, 2보 후퇴해온 패배의 역사를 돌아보는 작업이다.



줌파 라히리는 오래전부터 이탈리아어와 사랑에 빠져있었다. 그 사랑은 그를 이탈리아까지 이끌어 이방인으로 살게 했고, 소설가로서의 모든 영애를 안겨준 익숙한 언어(영어)를 뒤로하고 제2 외국어로 이 책을 쓰기까지 이른다. 그가 새로운 언어를 배워온 과정을 돌아보며 '불완전성'이란 개념을 여러 차례 사용한 게 눈에 띄었다.



'난 모든 것이 가능한 시대, 누구도 한계를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순식간에 메시지를 보낼 수 있고, 세상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가지 하루 만에 갈 수 있다.. 기술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지금 먼 거리를 거부한다. 하지만 이탈리아어 글을 쓰겠다는 내 계획은 언어 사이의 거대한 거리를 날카롭게 인식하게 해 준다 … 새로운 언어로 글을 쓰고 새로운 언어의 심장부로 들어가는 데 기술 발달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 길은 느리고 불안하고 지름길이 없다.' (p.79)



'불가능을 인식한다는 게 창조적 충동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도달할 수 없을 듯한 모든 것 앞에서 나는 경이로움을 느낀다. 사물에 대해 경이로움과 놀라움을 느끼지 않고는 그 무엇도 창작할 수 없다. 나와 이탈리아어 사이의 거리를 채울 수 있다면 난 더는 이 이 언어로 글을 쓰지 않을 것이다.' (p.81)



영어와의 오래된 긴장 가운데서 내 속에 깊이 뿌리내린 정서도 아마 이런 불완전성과 닿아있을 것이다. 이제 그 언어가 만든 그대로의 나를 담담히 들여다봐야 할 때가 온 듯하다. 언어를 배우는 걸 자기 계발 이상으로 생각해 볼 기회가 없었거나 혹은 나처럼 낯선 언어로 살아야 했던 값진 경험을 가진 모든 독자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책이 쓰인 배경을 생각하면 이탈리아어로 읽어야만 하는 책이었단 생각은 들지만, 작가가 언어에 치이고 또 화해하며 축적해온 그 삶에 가까이 닿아있는 사유를 느끼기에 한국어로도 모자람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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