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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seph Dec 11. 2022

생의 실루엣

아직도 연락하는 초등학교 동창이 몇 없단 점을 이용해 살짝 과장을 보태자면 1997년부터 2000년 사이의 나는 멈출 수 없는 댄싱머신이었다. 물론, 댄스 가수의 춤을 카피하기 위해선 인기가요를 VCR로 녹화해야 했던 시절이라 기록이 남아있지 않으니 내가 허우적대는 바람 인형처럼 추태를 부리고 있었는지, 아니면 진짜 소질이 있었는지 확인할 방법은 없다. 나 역시도 내가 춤추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아무렴 어떤가. 일인칭 시점에서 당시 기억을 떠올려 보면 나는 춤을 좀 준다고 스스로 믿고 있었다. 아무튼 자신감은 하나는 넘쳤던 것 같다.


유튜브에서 ‘초등/중학교 축제’로 검색해보니 요즘도 학예회를 하나 보다. 케이팝의 진화와 함께 안무가 복잡해진 만큼 영상을 보니 퍼포먼스의 수준도 올라간 것 같다. 내가 초등학생일 때도 학기가 끝날 때마다 학예외 같은 게 있었다. 나름 반에서 활발한 편으로 소히 나댄다는 아이들이 삼삼오오 그룹을 결성해 장기자랑을 준비하곤 했다. 약간 마이너한 성향을 가졌거나 튀고 싶은 애들이 NRG, 베이비복스를 선택하는 경우도 가끔 있었지만, 보통은 HOT나 SES, 젝스키스, 핑클 등 당시 대세였던 그룹들의 무대를 카피했다. 그룹이 결성되고 나면 캐릭터 분배가 중차대한 안건이었던 게 생각이 난다. 가령 HOT의 노래를 카피한다 치면 누구도 이재원 역할을 맡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컨셉 단계부터 빈틈없이 계획되는 요즘 아이돌과 달리 달리 1세대 아이돌은 꼭 그룹마다 약간 허술한 멤버가 있었다. 장우혁은 망치 춤 같은 포인트 안무가 늘 있고, 문희준은 리더고, 토니안은 프리 코러스를 담당했기에 분량이 적지 않았으며, 강타는 싸비뿐만 아니라 브릿지의 절정 구간까지 멋있는 건 다 했는데 이재원은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없었다. 생각해보면 알게 모르게 학급 내 권력관계 같은 것들이 투영되는 과정이었다. 보통 반에서 인기가 많은 애들이 좋은 역할을 다 가져가고 깍두기처럼 영입된 애들이 엉겁결에 이재원이 되곤 했다. 나는 HOT의 팬이었기에 그들의 노래 다수를 카피했으며 영턱스클럽과 NRG, 신화로 분하여 무대에 오른 적도 있다. 한 번은 유승준에게 도전했다가 그의 현란한 풋워크에 치를 떨며 포기한 기억도 난다.


나의 무대는 학예회 외에도 수련회, 보이스카우트 캠프파이어 등 다양했다. 댄싱 꿈나무들에겐 그중에서도 수련회가 대목이었다. 교실이 아닌 큰 무대 위 화려한 조명이 나를 감쌌던 동계수련회. 그렇게 남들 앞에서 춤을 춘 건 중2 수련회 때 젝스키스의 ‘폼생폼사’가 마지막이었고, 이후엔 왜 장기자랑에 참여하지 않았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비보잉이 유행했던 때라 학교 탈의실에서 되지도 않는 토마스이니 윈드밀이니 하는 것들을 흉내 냈던 기억만 드문드문 난다. 한국에 계속 있었다면 춤을 향한 나의 관심이 어디로 이어졌을지는 이제 와선 알 수 없다. 어쨌든 중학교 졸업 후 영국으로 넘어간 이후 안무 카피 같은 걸 할 일은 없었다. 그때부턴 학교 프롬에 참석하거나 대학교 초년생 시절 클러빙을 시작하며 가끔 남들 틈에 섞여 함께 몸을 흔들 일이 있었는데, 그래도 알코올의 힘을 빌려 분위기에 맞춰서 놀 정도는 됐던 것 같다. 2007년의 그날 그 일이 있기 전까진.


내가 다니던 학교 한인회가 주최한 파티가 열린 날이었다. 보통 클럽을 대관하는 파티가 다 그렇듯, 포스터엔 21시 오픈이라고 쓰여있지만, 이 시간 사람들은 근처 술집에 모여 혈중알코올농도를 힘껏 끌어올리는 중. 12시쯤 돼야 하나둘 입장하기 시작하고 이때가 진짜 파티의 시작이란 건 모두가 알고 있다. 하지만 혹시라도 잘 모르고 일찍 왔다면 한산한 스테이지 위 무아지경의 스트리트 맨/우먼 파이터들을 만날 수 있다. 파티 준비를 하러 일찍 가지 않았다면 나도 절대 만나지 못했을 베일에 싸인 무리. 통 큰 바지에 손목에 아데 같은 걸 한 차림으로 와서 열정적으로 관절을 꺾다가 클럽이 시끄러워질 때쯤이면 어느새 자취를 감추는 사람들이었다. 요즘은 트렌드가 어떤지 모르겠으나 당시만 해도 클럽에 가면 50 Cent의 끈적한 힙합/R&B에 맞춰 다들 부비고 문대는(?) 게 일반적이었는데 그에 반해 이들은 정말로 자기 춤을 추러 온 것 같았다. 무리를 지어 춤을 추기보단 각각 하나의 고독한 섬 같았던 그들, 보통 중국계 사람들로 보였던 그 무리 속에서 난 그날, K를 발견했던 것이다.


K와 내가 친구가 된 경위는 분명치 않다. 아마 한인 타운에서 만난 친구의 친구 같은 것이었겠지. 그는 내가 어려워하는 타입의 전형이었다. 드샜고, 목소리가 크고 몸짓이 과장됐으며, 무엇보다 이런저런 소문들로 인해 생긴 ‘탈선’의 이미지 때문에 당시 (지금보다 더) 샌님이었던 내겐 약간 거리를 두고 싶은 사람이란 인상을 줬다. 십 수년간 생각할 일도 없었던 K를 다시 떠올린 게 <스트리트 우먼 파이트>의 제트썬을 본 순간이었단 게 많은 걸 말해준다. 실제로 K는 한인 또래 집단에서 춤을 잘 추는 여자애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밀리터리 카고 팬츠 차림의 그가 나를 알아봤을 때, 나는 흠칫 놀랐지만, 술도 약간 들어갔겠다, 가능한 가장 호방한 자아를 꺼내 들고 어울리려 애썼다. 기가 세고 입이 거친 친구들과 함께 있으면 늘 그렇게 하듯, 마치 나도 너희들과 어울릴 자격이 있단 듯이 못하는 욕도 하면서, 오 나 좀 쌘 것 같은데? 하면서 껴울리듯.


우리가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는 전혀 기억이 없다. 기억이 나는 건, 우린 런던 피카딜리 서커스의 한 클럽 스테이지 위에 있었고, 어두컴컴한 조명 아래 묵직한 베이스가 쿵쿵 내 고막을 때리고 있었고, 뜬금없이 (정말 뜬금없이!) K가 흡사 연체동물에 빙의한 듯 화려한 B-girl 무브를 보여주더니 나를 힐끗 보며 너 춤 좀 출 줄 아냐는 듯한 몸짓을 했던 것. 그리고 내가 뭔가 굉장히 애쓴 나만의 무브를 보여줬다는 것. 아아.. 그때 나를 보던 K의 눈빛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경멸, 치욕, 모멸, 굴욕! 내가 아는 모든 형용사를 더해도 그때의 부끄러움을 형언할 수 없다. 그딴 것도 춤이냐는 무언의 힐난. 이른 시간이라 보는 사람이 적었단 건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클럽의 어두컴컴한 조명이 굴욕으로 점철된 나의 낯빛을 최대한 가려줬길 간절히 바라며 어색하게 스테이지에서 도망쳐 나왔다.


믿기 힘들겠지만, 그 이후로 난 춤을 추지 않는 사람이 됐다. 적어도 남들 앞에선 말이다. 졸업반 이후로 클럽에 가지 않게 된 이유도 있지만 가끔 홈파티라던가 하는 것들에 초대됐을 때조차 나는 필사적으로 공간의 변두리에 머물며 딴짓거리를 찾는 사람이 됐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K의 언행이 조금 짓궂었던 것이 사실이라 해도 마냥 그를 탓할 수는 없다. 그날의 상황들이 K라는 촉매제를 만나 파국으로 치달은 건 언젠가 벌어질 수밖에 없는 일이 아니었을까. 완벽하게 리허설 된 안무 카피와 ‘남들과 함께 추는’ 춤은 다르니까. 그 순간 즐거움을 표현하는 즉흥적인 춤이란 게 언제나 남 앞에서 그럴 듯 해 보이길 원하는 나와 애초에 맞지 않는 걸지도 모르겠다. 같은 맥락에서 오래전 내가 춤에 열심이었던 건 춤추는 내 모습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란 것 또한 합리적 의심이다. 동영상으로 기록이 남고 심지어 유튜브를 통해, 인스타그램을 통해 수백 수천 명의 비교 대상을 만들 수 있는 요즘이라면 애초에 기가 죽어 시작도 못 하지 않았을까.


미야모토 테루의 <생의 실루엣>을 읽다 보면 한 개인의 삶 속 무심하게 지나친 순간들이 어떤 흔적을 남기는지, 또 그것들이 세월과 함께 어떻게 의도치 않은 의미로 남게 되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금수>와 <환상의 빛>을 남긴 대작가는 자기 안에서 소설이 태어난 계기를 ‘구로베강의 둑에서 뉴젠마치의 전원을 바라본 어느 날’로 회상하며 ‘그날 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 또 15년 전 사막에서 본 알지도 못하는 어느 청년의 뒷모습이 자기 삶에 어떻게 남아 있는지 회고하기도 한다. 내 생의 실루엣을 더듬듯이 거슬러 올라가다 보니 저 우스꽝스러운 에피소드가 남긴 상흔이 분명히 느껴진다. 우리가 모두 의도치 않게 이런 흔적을 주고받으며 살며, 내가 상상치도 못한 누군가의 일부로 남아 살아가고 있을지 모른다는 상상은 재밌으면서도 두려운 일이다. 그 흔적이란 게 누군가에겐 이 글처럼 가볍게 풀어낼 수 있는 게 아닐 수 있단 생각이 들어 더욱 그렇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나도 잘 모르겠다. 그러니 매 순간 누군가에게 아름답게 남을 수 있도록 매일의 언행에 최선을 다하자! 는 하나 마나 한 이야기 같고. 다만 지금의 나를 구성하는 일부가 어디서 비롯됐는지 회고하는 작업을 계속하고 싶단 마음을 얻었다. 이런 경험을 통해 마치 신체의 일부를 만져 그게 거기 있음을 분명히 확인하듯,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 서로에게 기대고 빚진 존재라는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인식하게 된다. 삶의 신비에 대한 감각은 이렇게 회복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이젠 뭐 하고 사는지도 모르는 K라는 내 일부가 괜히 애틋해지는 걸 보니 어쨌든 이 글을 쓰기 잘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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