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일상 2021년 6월 23일
피카소 그림을 베껴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참 자유롭다. 막 그려도 된다.
아이처럼 마구 그릴수록 더 '피카소'스러워진다(?).
아이가 되어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도 떠오르고
이게 '득도인가?' 싶게 자유가 느껴진다.
흥미로운 것은
이렇게 늘 막 그리는 것 같은 피카소가 젊을 때는 무척 대상과 똑같이 그렸다는 사실이다.
누가 봐도 수긍할 만큼 '완성도 있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정확히 그려내는 '능력' 이 있었던 것이다.
피카소는 '똑같이 그릴 줄도 알았으면서', '똑같이 안 그리고 기괴하게 그린 것이다.'
피카소가 대상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던 점은 '반추상'회화에서 더 분명히 나타난다.
위의 그림에서 발부분을 따로 자세히 보면,
구체적인 사실화가 아님에도 발표현에 있어서 뼈의 골격과 근육의 구조가
정확하게 표현되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인체를 그릴 때 가장 그리기 어려운 부분이 바로 발이다.
영화 '까미유 클로델'에서 그려졌듯이,
로뎅의 조수로 들어가기에 앞서,
실력을 검증받던 까미유가 조각했던 것이,
바로 발이었다.
피카소가 대상을 똑같이 그릴 수 있었기 때문에 '입체파'라는 '추상'의 단계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답이 간단치 않아 보인다.
그럴 수도 있고, 또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구상'의 과정을 거쳐야 '추상'에 이른다고 말할 수도 있고,
또 '구상'의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추상'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프랭크 스텔라 같은 추상화 가는 '구상 교육'을 받지 않은 대표적인 화가이고,
안셀름 키퍼 역시 '구상적인 표현'은 잘 안 하지만 '빼어난' 추상 작품을 내놓고 있다.
따라서 '추상'이 꼭 '구상 능력(대상을 똑같이 그리는 능력)'을 전재로 하는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철학자 김용옥 선생께서 '석도 화론'에서 잘 지적하셨듯이,
'파괴'와 '탈구성'은 다르다.
다시 말해 피카소처럼 '탈구성'을 하려면, '구성'의 장고한 역사가 '선행'되어야 한다.
'디컨스트럭션(탈구성)'에 이르러면, '컨스트럭션(구성, 구축)'의 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피카소의 과거의 작품을 보면, 그러한 '구축'의 과정의 '흔적'들이 보인다.
그래서 그의 작업이 역사에 남은 것이 아닐까?
물론 피카소는 무척 운이 좋은 화가이기도 하다.
살아생전에 성공했고 돈도 많이 벌었으며, 무엇보다 '인정'을 받았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면, 그의 성공은 '시대'의 산물이기도 하다.
대상을 한쪽에서만 보던 시대, 즉. 원근법이 있던 시대는 뉴튼의 시대이기도 했다.
중력으로 사과가 땅으로 떨어지듯,
하나의 방향으로 힘이 작용하는
'하나의 시선'이 지배하던 시대였다.
뉴튼의 시대가 지나고,
여러 방향에서 다양한 힘들을 이야기 하는 상대성의 시대가 도래했다.
시간마저도, 하나의 시간이 아니라, 경험에 의해 늘었다 줄었다 하는
베르그송적 시간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그 시기와 함께 원근법은 무너졌고, 대상을 입체적 시각에서 다양하게 보게 되었다.
피카소는 그 시기 이후에 등장했다.
조금만 더 빨랐어도
피카소는 이해되지 못했을 것이고,
더 느렸다면, 다른 작가에게 그 자리를 내주었을 것이다.
예술은 그 시대의 문화와 과학, 그리고 역사와 함께 움직인다.
피카소가 그림을 엉망으로 그렸다고 말해놓고 보니,
미안한 마음에 말을 얹어 보았다.
그는 위대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