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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선 Sep 02. 2020

내게는 너무 멀고도 험한 - 운전면허의 길 1

나도 도로 위의 리듬을 느끼고 싶어!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체감한 크고 작은 생각의 변화 중 하나는 뜻밖에도, 운전면허에 대한 것이었다.


솔직히 여태껏 살면서 운전면허를 따고 싶다는 생각을 크게 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겁이 아주 많았고, 지독한 길치에 방향치이며, 내 몸뚱이 하나 운전하면서도 여기저기 부딪히기 일쑤에, 툭하면 눈물이 터지는 순두부 마인드다. 결정적으로 도로 위의 파이터들과 창문 내리고 맞설 자신도 없었다. 변명처럼 들릴 텐데, 사실 변명이 맞다. 면허를 한 번에 보란 듯이 착 딸 자신도 없었고, 운전을 시작해도 능숙하게 해내기까지는 평균(?) 이상의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꼭 필요한 게 아니라면, 잘하지 못할 바엔 안 한다’는 고질적인 ‘완벽주의’가 빛을 발했다.


이런 식으로 여러 가지 이유를 대 가며 이야기하면, 아니 사실 변명할 필요도 없이, 주변 친구들은 그러려니 수긍하곤 했다. 뭐, 면허 없는 친구들이 대략 반 정도는 되기도 했으니까. 그런데 입사를 하고 나서 선배들과 대화를 하다 보니, 내 ‘무면허’에 대해 순수한 물음표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왜 면허가 아직 없어?”


그리고 나의 ‘그럴싸’한 핑계들에도 경험에서 우러나온 조언이 뒤따랐다.


“에이, 하다 보면 늘어.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딨어.”

“따 두면 편해, 다 나중에 쓸모가 있어.”

“아냐, 너 잘할 거 같아.”


선배 언니들의 이런 조언은 조금도 간섭으로 느껴지지 않았고, 늘 본인들의 유쾌한 에피소드를 동반했다. 제 때 빠지지 못해서 같은 다리를 여섯 번 왕복한 이야기, 여러 번의 낙방 끝에 면허를 따던 날 시험관이 ‘웬만하면 장롱면허로 간직하라’는 충고(?)를 전한 이야기, 기나긴 세월 ‘제2의 민증’으로만 기능했던 면허를 들고 거리로 나서야 했던 육아맘의 사연 등. 그 언니들은 지금 다들 둘째가라면 서러울 베스트 드라이버들이다. 가끔 미팅 장소를 오가며 선배 언니들의 차를 타야 할 때가 종종 있다. 그들은 여유로운 모습으로 핸들에 손을 올리고 부드럽고 세심하게 차를 몰면서, 조수석에서 빳빳이 앉아있는 나를 향해 다양한 주제를 던지며 대화했다. 희한하게도 그녀들의 차 안에서 나누는 이야기들은 사무실이나 식당, 혹은 술자리에서 나오는 것들과는 또 다른 어떤 부드러움을 가지고 있었다. 도로 위 리듬에 맞춰지기라도 하는 듯 대화의 속도는 다소 느린 템포로 흐르고, 대화의 주제들도 평소보다는 순한 맛 혹은 깊은 맛으로 우러났다. 그리고 운전하는 그녀들은 평소보다 덜 이야기하는 대신 더 질문하고 더 들어주었다.


모 시상식 참가를 위해 LA 출장을 갔을 때의 일이었다. 미국 현지 법인의 직원 분이 일정 내내 업무 지원을 위해 동행해주셨다. 그분은 인턴을 갓 마치고 입사한 상황이었고, 나이는 나보다 서너 살 정도 어렸다. 갓 사회생활을 시작한 티가 물씬 나는, 앳되고 열정적인 분이었다. 하지만 유창한 영어실력은 물론이고 야무지고 꼼꼼하게 현장을 함께 체크해주는 모습을 보며 금세 뭐든 잘 해내시겠다는 생각을 (멋대로) 해보았다. 그녀에게 한층 더 반하게 된 이유는 또다시, 운전에 있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늘 운전을 하고 다녔다는 그녀는 커다란 자가용에 우리를 태우고 능숙하게 시내 여기저기를 누볐다. 조수석에 탄 나에게 회사 생활부터 업무 이야기까지 다양한 질문을 하고 들으면서도, 미국이 처음이라는 나를 위해 창밖의 여기저기와 간단한 지리를 설명해주기도 했다. 그녀가 차 안에서 짤막 짤막 보여준 LA는 생각보다 상냥했고, 예상했던 것만큼 발랄했다. 그 이후로 어쩌다 보니 2번이나 더 연달아 방문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그때 차 안에서의 차분하고도 한가로운 망중한의 공기는 아직도 참 다정하게 남아있다. 운전은 이렇게 누군가를 전혀 새로운 곳으로 데려가 줄 수도 있구나. 당연한 것들이 새삼스레 마음에 와 닿았다.


운전을 배우게 된다면, 나도 도로 위의 리듬을 익히며 달릴 수 있을까. 누군가를 조수석에 앉히고 그 사람의 안전과 편안함을 위해 정신을 집중하면서도, 다양한 것들을 질문하고 그 대답을 가만히 들어주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누군가를 전혀 새로운 곳으로 데려가 다정하게 바깥 풍경을 일러줄 수 있을까. 비단 회사 생활을 하며 만난 분들 뿐 아니라 그동안 나를 조수석 혹은 뒷좌석에 태웠던 모든 운전자들의 모습이 스쳐갔다. 그들이 만들어낸 차 안의 작은 질서 안에서 나는 음악을 듣기도, 까무룩 잠이 들기도, 생각에 잠기기도, 실컷 웃기도 했다. 기억이 안 날 만큼 어렸을 때부터 나를 아주 가까운 곳에서부터 풀냄새 폴폴 나는 먼 곳까지 데려가 줬던 아빠의 운전, 동네 곳곳을 즐겁게 함께 누볐던 엄마의 운전. 그리고 거의 매일 나를 안전하게 집 앞까지 데려다주고 주말엔 근교로 가끔은 멀고 아름다운 낯선 곳으로 태워주며, 운전을 하면 내 얼굴을 정면으로 볼 수 없다고 귀여운 투정을 부리곤 하는 내 사랑스러운 남자 친구의 운전. 그 소중한 사람들을 나도 안전하게 태우고 잊지 못할 날들을 선물해주고 싶었다.


그리하여 나는 완벽한 자율주행차의 출시만을 기다리며 버텨왔던 마음을 조금 고쳐먹고, 운전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입사 전후 즈음해서 연말마다 친구들과 정하곤 했던 '버킷리스트'에 꼭 빼놓지 않고 운전면허를 적었다... 아주 성실하게 거의 3년 연속 적기만 했다. ‘안 딴다’에서 ‘언젠가 따긴 따야지’ 정도로만 바뀐 내 생각이 실천까지 가는 데는 또다시 천리길이 남아있었다.


이 천리길을 단숨에 단축시켜버린 것이 바로 코 앞으로 닥쳐온 수술 날짜였다. 수술과 치료로 몸과 마음이 다치기 전에, 다양한 성취감과 자신감을 느끼는 것. 그 첫 번째 미션으로 정하게 된 것이 바로, 오래 묵혀뒀던 운전면허를 따는 일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마자 나는 그간 몇 개 찾아두고 메모장에만 고이 모셔뒀던 집 근처 학원 리스트들을 살펴보고, 제일 가까운 학원에 전화를 걸어 비용을 문의했다. 적지 않은 금액이었지만 더 이상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몸조심한다고 앞으로는 술도 끊기로 했으니까 술값으로 학원 등록했다고 생각하지 뭐.(?) 주말에 바로 학원을 찾아가 등록을 하고, 필수로 이수해야 하는 교육을 듣고, 그다음 주 평일 오후에 반차를 내고 면허시험장에서 필기시험을 봤다. 컴퓨터 앞에 앉아 후다닥 시험을 보고 나니 내 서류에는 ‘합격’이라는 마크가 찍혔다. 참 오랜만에 보는 글자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래, 일단 지금 나는 이런 게 필요해서 시작한 거야. 단숨에 합격해버리자!’


그리고 그때의 나는 그 다짐이... 나에게는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이었는지... 앞으로 얼마나 험난한 여정이 펼쳐질지... 아무것도 예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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