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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Happy Letter Jul 11. 2023

'풍요로운' 사회공동체에 관한 주관적 단상

가난의 왜곡에 따른 사회 계층 간, 세대 간 갈등 넘어서기

어떤 사적 경험과 그에 기초한 개념정리나 묘사는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체험 또는 체감하지 못한 사람들의 상상력 범위, 공감(empathy) 가능 여부나 방식은 가히 천차만별일 것 같다. 우리는 동시대 사람들을 서로 이해 못 하고, 젊은 신세대는 기성세대가 경험한 것을 공감하지 못하고 또 역으로 기성세대는 젊은 세대들이 '경험하고자 하는' 것을 이해 못 하는 형국이다. 그로 인해 세대 간의 갈등을 겪게 되며 이런 세대 간 갈등은 사회 속에서 뿐만 아니라 가족 내에서도 나타난다. 그래도 이 글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들대로의 자기 방어적 논리가 있을 것이기에 그대로 또 존중한다.




서로 추구하는 것이 얼마나 다른지 세대 간 갈등의 한 모습을 보여주는 일례로, 수년 전에 여기서 필자가 무슨 행사에 참석했을 때 경험한 것인데, 5G 등 정보통신 인프라 확충 관련 정부 예산을 여차여차해서 어느, 어느 정도의 금액은 투자하고 지출해야 한다 측과, 아니다, 그런 엄청난 예산을 그만큼씩이나 쓸 돈이 없다, 그건 인터넷이나 스마트 기기를 매일 사용하는 현재 젊은 세대에게만 좋지 그런 인터넷이나 스마트 기기를 사용할 줄 모르는 - 어쩌면 사용할 필요조차도 못 느끼는 - 노인층에겐 불필요한 예산이 될 수도 있다고 주장하는 측이 서로 맞서고 있었다. 오히려 그 예산을 노인복지 지원 정책에 더 많이 써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미래 사회나 미래 세대는 일단 제쳐두고서라도 동시대에 같은 사회에 함께 살면서도 이미 세대 간 갈등은 거의 일상이 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토대로 오늘날 사람들이 말하는 '가난'과 '풍요로움'에 대해 필자 개인의 짧은 소견을 적어보고자 하며, 우리 모두 다 함께 살아가는 사회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이 사회는 진정 풍요로운 사회인가 되물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면, 사랑하는 사람들조차 둘이서 서로 함께 보낸 시간들에 관한 기억을 다르게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우리는 동시대에 체험한 어떤 경험들이 시간이 많이 지난 훗날 전혀 "다른 빛깔과 향기"로 남아 있는 것을 종종 발견한다. 지난 시절의 일들이나 사건은 변함이 없는데 그 기억을 되새기며 해석하거나 바라보는 관점이 많이 달라진 것도 있겠지만 우리는 그 기억의 파편들을 아주 주관적인 편집을 통해 고통스러웠던 면들은 애써 지우거나 망각하려 하면서 그저 그때도 그런대로 괜찮았다고 생각하려는 습성이 있는 것 같다.


물론 인간이 모든 것을 다 기억하며 산다면 현재를 살아가기도 힘들고 한없이 복잡한 괴로움과 번민, 그런 고통과 회한으로 쉽게 병들어 버리고 말 것이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다', '세월이 약이다' 등으로 아팠던 시간은 떨쳐 버리려 애쓰지만 머리, 마음 한 구석에는 늘 잊힌 듯하면서도 결코 완전히 잊히지 않아, '연상 기억'처럼 어떤 계기가 주어지면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꾹꾹 눌러왔었던 그 모든 기억들이 한꺼번에 용수철 튀어 오르듯 기어이 그 적나라한 모습을 드러내고 말지도 모른다.

  

자기 자신의 '기억'에 대한 모습도 이 정도인데, 하물며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세계관과 관점이 다른 세대들의 사람들은 이 지난(다음 [어학사전] : '어떤 상황이나 입장이 굉장히 어려움')했었던 '가난'에 대한 상대의 처지와 불운했던 과거를 공감하기는 더욱 어려울 것이다. 완전히 서로 다른 방식의 삶을 살아오면서 타인의 가난은 나에게 무관한 그저 하나의 'just another sad story'일 뿐일까? 과연 우리 중 누가 타인의 현재의 가난이든, 과거의 가난이든 온전히 제대로 공감할 수 있을까?




기성세대 중 누구는 단칸방에 온 식구가 둘러앉아 찌개 그릇 하나를 함께 먹던 시절이 있었고, 또 어떤 날은 찌개를 끓일 돈마저도 없는 날, 밥공기에 간장만으로 밥을 비벼 먹기도 하곤 했다는데,  이렇게 '물 한 바가지'로 허기를 달래 왔던 부모세대를 지금의 젊은 세대는 얼마만큼이나 제대로 공감할 수 있을까?


귤을 처음 봤을 때 사과처럼 깎아먹는 줄 알고 과도를 먼저 손에 들었었고, 시간이 좀 지나 껍질 색깔이 좀 검무스럽게 변한 바나나를 난생처음 보고는 바나나는 '불에 구워서' 먹는 줄 알았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또 어느 누구는, 소고기든 돼지고기든 고기는 국물이 많이 있는 '국'으로만 요리할 수 있고 또 그렇게만 먹는 줄 알았는데 고기를 불에 직접 구워서 먹는 것을 처음보고는 태어나 처음 바다를 본 충격처럼 놀랐다고 한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 중 일부는 혹시 "그건, 무지의 소치 아닌가?"라고 할지도 모르겠다.(다음 [어학사전]에 따르면, '소치'는 ‘어떠한 까닭으로 빚어진 바’를 말함.)


그래도 가난해서 가진 게 없어서 그래서 '귤'과 '바나나' 조차도 먹는 방법(?)을 모르거나, 그리고 고기는 숯불 직화로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어쩌면 일부로 애써 부정해 온)" 그런 ‘무지’ 속에 살아왔다지만, 그건 꼭 소유하거나 직접 체험하지 않아도 간접 경험을 통해서라도 충분히 다 알 수 있는 사실들이다라고 치부하기엔 덧붙여야 할 말이 많은 것 같다.


 




우리는 흔히들 '동정'보다는 '공감'을 원한다고 한다. 하지만 일부 사람들은 정작 공감 노력보다는 동정하는 쪽을 쉽게 택한다.


아주 예전에 들은 얘기인데, 무슨 봉사단체 모임이 고아원을 방문하면서 라면 십 수 박스를 기부하고 기념행사와 사진 촬영 등을 성대히 한 후, 고아원에서 나와 돌아가는 길에 고급 가든 숯불갈비식당에서 같이 동행했던 봉사단체 모임 회원들과 조금 전 기부했던 라면값 몇 배나 되는 한우숯불갈비를 점심으로 먹고 식사값을 지불했다고 한다. 그들이 점심시간에 무얼 먹건 그건 전적으로 그 사람들의 자유다. 그 봉사단체에 기부하는 사람들은 과연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 고아원 아이들에게 기부하는 것일까? 아니면 봉사단체 회원의 고급 한우갈빗집 회식비를 지원하는 것일까?


물론 일부 지극히 극소수의 사람들이겠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 그저 문득 든 생각은 고아원엔 갈비를 갖다 주고 그 단체 회원들이 돌아가는 길에 '라면'을 먹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과연 그 사람들이 고아원 아이들의 '가난'을 - 과거의 가난이든 현재의 고통이든, 어쩌면 미래에 겪을지도 모를 고단한 여정까지 - 제대로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기는 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 사회는, 집에 쌀이 떨어져 밥을 못 먹었다고 하면, "왜?, '빵'먹으면 되지, 배달시켜 먹으면 되지, 나가서 외식하면 되지"라고 하는 사람들과도 뒤섞여 살아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는 - 개인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 우리가, 그리고 우리 사회가 어떠했었다는 것을 애써 잊으려 하기도 하고 앞서 언급한 '쌀이 없어 밥을 못 먹는 사람들'과도 지금 이 순간 한 시대에 함께 어울려 살아가고 있으며, 일부는 이런 현실도 애써 외면하고자 하는 계층과 세대의 "개인주의화"시대에 살고 있으며, 개인은 개인대로 자신의 개인사의 어두웠고 힘들었던 과거의 기억도 애써 감추려 하고 있으며 이 사회와 사회 구성원들은 이런 문제가 마치 처음부터 늘 그러했던 것처럼 보이게 하려 한다.


우리 중에 누가 '춥고 배고팠던' 옛 시절을 즐겨 기억하고 또 기억해 내려하겠는가? 사람들은 '모두 다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힘들어도 웃으며 옛날 이야기할 날이 올 거야, 이 악물고 열심히 노력하면 좋은 날 온다.'라고만 한다.


우리는 지금 이 시대가 가져다준 눈에 보이는 물질적 '풍요로움'에 도취되어 우리 모두가 자신이, 그리고 우리 부모세대가 원래 늘 이 정도 환경과 여건에서 살아온 사람들이라 착각하기도 한다. 그래서 지금 내 앞에 누릴 수 있는 '치맥'과 '모니터' 하나로 나는 모든 것을 얻은 양, 아니면 최소한 모든 것을 잃지는 않았다는 사실에 스스로를 위로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은 그래도 '중산층'은 된다라고 생각하며 살아간다.(그가 정말 '중산층'인지 여부는 별개의 일이다.)


최소한 나는 중산층 쯤에 속하고 나는 최소한 밥은 굶지 않고 - 해 먹던, 배달시켜 먹던 - 산다는 데 안도하며 나의 지금의 모습이 미래의 나에겐 한없이 가난하고 초라하고 회한이 남을 모습이 될 것임을 애써 외면하며 산다.


우리 사회에 취직도 못하고 혼자 사는 장기 구직자 미혼 1인 가구가 증가하고, 학교를 졸업한 지 한참이나 지났는데도 나이가 들어 부모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거나 여전히 함께 사는 젊은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다는 것은 걱정하지만, 독거노인 인구나, 노인중 극빈층의 인구는 전국적으로 얼마나 많은지 우리는 애써 찾아 읽어보려 하지 않는다. 자격요건을 갖춘 만 65세 이상이 신청할 수 있는 노인 기초연금 금액은 최대 월 얼마인지도 모른다. 내 구직과 웰빙은 급하고 중요해도 은퇴한 부모, 부모세대의 은퇴 후 취업 여건, 여가 생활, 웰다잉 등을 포함한 '삶의 질'에 대해선 거의 관심 없다.(관심 없을 수도 있다, 지금은? "아직은" 내게 닥친 문제들이 아니므로?)


우리는 매일 TV에서 접하는 화려한 라이프 스타일을 - 시각적 '풍요로움'을 - 접하면서 또 간접 체험하면서도 우리 사회가 직면한 극심한 빈부 양극화 심화, 노인 빈곤율, 독거사, 자살률 증가 등 불편한 사회 문제에는 애써 시선을 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는 과거에 양반, 상놈을 나누고 귀족과 평민과 노비로 신분을 나누던 '반상 계급제도'를 벗어나 모두가 평등하게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며 산다. 맞다. 하지만 땀 흘려 모으고 저축한 돈으로 해외여행을 가기 위해 비행기만 한번 타봐도 우린 아직 여전히 엄연한 '신분사회'("경제적 신분" 차이라 하더라도)에 살고 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대부분의 우리 중산층 사람들은 이코노미 클래스의 비좁은 비행기 좌석에서 팔걸이를 먼저 그리고 오래 차지하기 위해 서로의 팔꿈치를 부딪히며 무언의 경쟁을 하고 있고, 그 순간 같은 비행기 안 프리스티지 클래스에 탑승한 소수의 승객들은 '누워서' 여행한다.


그래서 우리 사회가 엄연히(다음 [어학사전] : '누구도 감히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명백히') - 경제적으로 - 계급, 계층 사회임을 자신의 아이에게 가르치고 싶다면, 그리고 왜 돈을 많이 벌어야 하는지 알려주고 싶다면 함께 국제선 비행기를 타보면 된다라는 말까지 나올 지경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많이 가진 자의 '승리‘다, 그만큼 가지지 못한 대다수는 그저 이 모든 것 앞에 '경외'하는 마음으로 살면 될 뿐 아닌가? 그나마 해외여행이라도 갈 수 있음에 들떠서 기뻐하며 프리스티지 승객들이 먼저 타는 것을, 또 먼저 내리는 것을 서서 묵묵히 지켜보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라고.


어쩌면 그래서 우리는 과거에 대한 회한보다는 현재에 대한 욕망과 욕구불만이 더 많고, 또 미래에 대한 불안이 더 많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수정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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