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모든 것을 미리 배웠더라면, 조금이라도 더 일찍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THL 습작노트'를 준비하며 예전에 노트에 묵혀두었던 글들을 꺼내어 다듬다가 문득 생각난 단상을 적어본다.
분명 필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며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 봤던, 가끔씩 우리들 누구에게나 불현듯 찾아오는, 아린 통증이 수반되는 '회한'의 일종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후회'만 하기엔 우리 모두는 아직 너무나도 젊지 않은가? 저마다의 "학교"는 이미 떠났지만, 이제 모든 것을 혼자 판단하고 혼자 행동하고 혼자 감내하고 책임져야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미리 배웠더라면, 조금이라도 더 일찍 알았더라면, 아니면 이러한 것들을 미리 가르쳐줄 사람을 일찍 만날 수 있었더라면…(시 아님 주의)
길을 가다가 어디서 누구를 갑자기 맞닥뜨리게 될 때
차를 운전하고 갈 때
좀 살짝 양보해 줘도 지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또 '져주어도' 된다는 것을
한번 져도 평생 패자로 살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길'을 걷다가 좀 넘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그리고 넘어진 김에 쉬어가는 것이 아니라
발걸음이 너무 빠르면 쉬어가자고 먼저 말할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다는 것을
좀 힘들면 '좀 힘들다'라고 말해도 된다는 것을
앞뒤 옆을 잘 보고 조심해서 운전해도
누구 다른 차가 내 차에 추돌할 수 있다는 것을
내가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아도
내 의지와 상관없이도
세상에는 슬프고 억울하거나 고통스러운 일들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나중에' 꼭 한번 연락할게!라는 것은
지금 당장 면전에서 혹은 통화 중에는 약속 잡기 싫다는 뜻이라는 것을
삶은 도달해야만 하는 목표의 크고 작음이나 중대성보다는 '살아가는 방식'이 더 문제라는 것을
모든 사람이 다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하고 사회에 나가도
모두 다 성공하지는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딱히 표 나게 논 적이 없어도 나 자신도 그 부류에 속할 수도 있다는 것을
하지만 그것이 결코 나만의 잘못만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수 십 명이나 되는 한 반 학생들이 모두 다 열심히 공부해도 다 명문대를 갈 수 없고
모두 다 판검사, 의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오히려 그 반 학생들이 모두 다 한꺼번에 '판검사, 의사'만 되어도 안된다는 것을
우리에겐 '소방관'이 제일 멋있는 직업일 수 있다는 것을
학교에서 '하지 마라, 하면 안 된다'는 것만큼만 이라도 '해도 된다'는 것을 많이 배웠더라면...
세상에는 살다 보면 두 갈래 이상의 길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항상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만 따라가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는 생각을,
그리하여 다수를 기다리지만 않고 스스로 느낀 대로 행동할 수도 있다는 것을
또 '길'에는 '사람'이 다니는 길이 있고
산 짐승들은 그들대로 산속 깊이 그들만이 아는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여우, 늑대, 토끼, 들쥐 그리고 개미, 지렁이조차도
사람들을 피해 그들만이 다니는 '길'이 따로 있다는 것을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원하는 삶을 자유롭게 살려면
남이 가지 않는 길도 가야 한다는 것을...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고 그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까지 하면 다들 제일 좋다고 하지만
그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경제생활을 위한 돈도 벌게 되면
그 좋아하는 일은 이제 더 이상 - 형식이나 시간, 그 성과에 구애받지 않던 - 나의 취미나 여가 생활이 아니라
새로운 본 직업이 되어 매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숙제' 같은 일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그 매일의 부담감이 주는 압박으로 더 이상 '좋아하는' 일이 아니라 한 때 '좋아했었던'일로 쉽게 변질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리하여 그 '좋아했었던' - 지금의 새로운 본업이 되어버린 - 그 일에 더 이상 '매력'을 느끼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예전의 직업이 그러했듯 이 '새로운 직업' 또한 나에게 더 이상의 즐거움과 자유를 주지 못하며 다시금 일상의 새로운 스트레스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학교 같다 집에 오니 맛있는 음식이 있어
정신없이 먹다가 '엄마는 왜 안 먹어?'하고 물어보니
난 너 오기 전에 벌써 먹었다는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그냥 자식새끼 더 먹이기 위해
부모님은 그냥 안 먹고 마는 것이라는 것을
짐짓 그냥 배가 아프다고 말하는 것뿐이라는 것을
어릴 때 부모님은 나보다 몸집도 커고 맛있는 것도 사주고 뭘 잘못하면 가끔씩은 좀 무서울 때도 있었지만 똑같이, 나처럼 연약한 '사람'이라는 것을
지금의 나처럼 난생처음 해보는 그저 서툴기 짝이 없는 그냥 '초보 엄마'이자, '초보 아빠'였다는 것을
그 부모님은 영원히 내 옆에 함께 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 부모님은 생각보다 훨씬 빨리 늙고 병들고 왜소해진다는 것을
그 부모님은 나보다 더 먼저 죽는다는 것을
생각보다 훨씬 더 일찍 더 빨리 이 세상을 떠나고 만다는 것을
그 부모님도 나처럼 '죽음'을 한없이 많이 두려워한다는 것을...
이 모든 것을 미리 배웠더라면, 조금이라도 더 일찍 알았더라면 우리의 삶이 어땠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