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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Happy Letter Jul 20. 2023

인간관계의 "이기적 딜레마" 탈출부터?(THL행복론2)

'내로남불' 시대 속 같이 살아가는 "관계"의 '불편한 진실'


앞선 글 '행복론 1편'에 해당하는 필자의 졸고, [THL 행복론 - "불행"해지지 않는 방법 먼저 배우기]에 이어서 - 이 복잡하고 다양한 시대에 - 행복하게 같이 살아가는 방법을 모색하기 위한 두 번째 행복론을 써보고자 한다.


비록 두 번째 이야기가 다소 짧더라도 결코 가볍지 않은 토픽(topic)이며 필자 개인적으로는 - 이러한 단상을 잊어버리기 전에 글로 남기고 - 두고두고 나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어쩌면 오늘의 이 글은 그저 앞날의 심도 깊은 사유를 위한 '화두'를 꺼내놓는 것에 그칠지도 모르지만 독자분들의 관심과 고견도 많이 기대한다.(다음[어학사전], 화두 : 마음에 중요하게 여겨 생각할 거리가 되는 말)




저마다 처한 상황이나 형편, 각자의 라이프스타일에 따라 많이 다르겠지만, 지금 우리는 나름대로 - 그 양이나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 유명한 사회 지도층 리더나 셀럽들이 쓴 책이며, 학계의 전문가, 지식인들이 쓴 교양서적도 읽고, 무슨 무슨 유명 동서양 철학자들의 삶의 지혜, 윤리에 관한 철학책들도 좀 읽고 그들의 에세이며 잠언록 등도 통독하고, 좋아하고 존경하는 종교지도자들의 마음을 다스리는 수양과 명상, 행복한 삶에 관한 책들 등도 많이 읽는다고 본다.


이러한 책들이 전하는 중대한 메시지와 주요 토픽들을 좀 거칠게나마 감히 압축(?)해서 들여다보면 몇 가지 중요한 물음으로 집약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개인적 견해임을 전제로 예를 들면,


'어떻게 살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는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고 죽는다는 것의 의미는? 죽은 뒤에는?',

'우리는 어떻게 하면 조화로운 공생과 상생을 실현할 수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하면 함께 살아가는 이 사회공동체 속에 보다 더 정의롭고 공정하며 평등하게 또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가?' 등등 일수 있으며,


이들은 다시 그대로 우리 삶의 의미, 삶의 지혜, 옳고 그름, 세상적 진리, 선과 악 등에 관한 물음과도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다른 범주의 주제도 많이 있겠지만, 어쩌면 이러한 다소 '무리한' 압축은 여기서 이 글이 이끌어가고자 하는 방향의 어떤 '축약' 정도로만 보는 편이 오히려 더 낫겠다.




우리는 그러한 물음에 대한 '답'을 스스로 미리 - 이런 책들을 읽기 훨씬 이전부터 - 정해두고 나서 자기 방식으로 정해놓은 그 '답'을 위한 합리화의 근거와 논리를 찾으려고만 하기도 하고, 또는 주변의 각자 처한 생활환경이 주는 - 이러한 독서를 통한 - 외부 지식 속에서 새로이 어떤 다른 '답'을 찾으려고 애써기도 하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결정적으로 명확한 '답', 최종적이면서도 절대 불변할, 세상 만인에게 진리가 될 만한 "모범 답안"은 확정 짓지 못하거나, 스스로의 지속적인 불확실성과 자기 의심을 거치며 여전히 그 '확정'을 미루고만 있는 형국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선과 악인지, 무엇이 진리인지를 분명히 답하지 못하고 늘 머뭇머뭇거리게 되고 - 여건이나 환경에 따라, 경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 조건부 '해답'이나 그런 유보적인 '답'만을 (자신 없게) 내놓게 된다.


여기에는 우리가 인정은 하더라도 스스로는 말하고 싶지 않은 - 우리 사회 속 인간관계 형성에 대한 태도와 가치 부여 관점하에서 - 어떤 '이기적' 딜레마(dilemma)라는 '불편한 진실'이 내재되어 있다고 필자는 본다.


이것이 필자가 제시하고자 하는 오늘의 '화두'이며, 앞으로도 되새기며 사유할 대상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언급된 이러한 주제와 소재에 관한 책들을 읽으면서 우리가 공통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 중 하나에는 - 이 또한 다분히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 다음과 같은 의미가 포함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고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하며 살고, 과거의 나와는 비교할지언정 다른 사람들과 절대 비교하지 말고, 춥고 배고픈 가난한 사람들, 소외된 사회적 약자들을 도우며 살고, 특히, 선하게 행동하고 착하게 살아라는 것들 말이다.


이 모든 것의 근본적인 의미를 부정하거나 그 설파의 취지와 중요성을 받아들이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문제는 '실천'이고, '실행'이다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앞서 언급한 이 모든 것을 실제 생활 속에서 그대로 '실천'하지 못하며 살기 때문에, 그리고 실행해야 하는지는 알면서도 실행 못함으로 인해 늘 우울하고 불만족스럽고 또 불안한 것이다. 이러한 감정상태와 기분의 지속은 "불행"을 표현하는 또 다른 말이 될 뿐이다.


일상생활 속에서 왜 우리가 그 바람직한 많은 이상적인 삶의 목표와 의미, 지혜, 덕목들을 실행 못하는지,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고 또 제대로 체득하지 못해 우리는 몹시 혼란스러울 때가 자주 있다.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것에서부터 오늘 그리고 앞으로 필자의 새로운 사유도 함께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도대체 왜, 무엇 때문에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너무나도 잘 알면서도 늘 불안하고 불만족스럽고 혼돈스러우며 '확신'이 없을 까?


대개 우리는 '어떤 게 선한 것인지'를 안다. 여기서 굳이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의 의무론적 윤리 법칙, "정언명법"(Kategorischer Imperativ)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주 1) 참조.


최소한 어떤 것이 하면 안 되는 '악'한 행동이라든지, 어떤 행위가 사회 구성원에 의해 합의된 사회적 규범과 윤리를 거스르는 반사회적인 것이다라는 것 정도는 우리 모두가 잘 안다고 생각한다.(안 그런 사람도 간혹 있겠지만)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고 행하고,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사람을 대하라"는 것도 잘 안다. 원래는 그래야 한다는 것을 너무 잘 안다.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사회 전체를 위한 '공공의 선과 이익'을 위한 공동의 노력 중 우리의 행복(그리고 또 우리가 "불행"해지는 데에도)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는 것은 함께 살아가는 사람과의 '관계'다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우리가 추구하는 이상적이고도 조화로운 인간관계 형성에 있어 딜레마는, 항상 '누가 먼저' 시작할 것인가이다. 누가 먼저 그 '선'을, '선한 행동'을 행할 것인가이다. "정언명법"도 좋고 '절대적 보편적 선'도 좋고, '누구나 선행을 베풀고 친절해야' 한다는 것도 다 좋다. 하지만 항상 부딪히는 '이기적' 딜레마는, 과연 "누가 먼저" 시작할 것인가?이다.


바로 "누가 먼저" 선하게 행할 것인가의 문제이며, 우리는 안타깝게도 아무도 이런 문제 제기로부터 쉽게 자유로울 수 없다고 생각한다!



 

네가 '먼저' 친절을 베풀면 나도 너에게 친절하겠다.
네가 '먼저' 이쁜 말을 하면 나도 너에게 이쁜 말을 하겠다.
네가 '먼저' 선한 행동을 하면 나도 너에게 선한 행동을 하겠다.






그렇다, 늘 이런 식이다.


하지만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누구에게든 "네가 먼저... 한다면..."이라고 말할 때마다 그 말의 진정한 의미와 내재된 의도를 다시금 스스로에게 묻고 생각하며 행해야 하지 않을까? 정말 예의를 갖추고 진심을 다 해 '선'한 마음가짐으로. 우리 모두의 행복한 '인간관계'의 새로운 출발을 위하여.






*주 1) 다음 [백과사전], 정언 명법 [定言命法] :

"칸트 철학에서, 행위의 결과에 구애됨이 없이 행위 그것 자체가 선(善)이기 때문에 무조건 그 수행이 요구되는 도덕적 명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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