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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은 빛나는 것이 아니라 타오르는 것, 엔칸토 : 마법의 세계 (Encanto, 2021)
애니메이션을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조금 지친 상태였고, 머릿속의 생각들이 과열되어 터지기 전에 단순화시킬 필요를 느껴 노래와 춤이 있는 판타지적인 요소가 들어간 영화를 보고 싶었다. 뮤지컬 영화들과 디즈니 영화들 사이에서 찾은 엔칸토의 예고편과 포스터를 보니 찾고 있는 요소가 다 들어 있고, 색감도 알록달록해 보이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아마, 가족이 어쩌고 사랑보다 더 큰 것은 없어로 끝날 이야기겠지만 당시의 나에게는 이런 게 필요했다. 신나는 노래의 리듬, 춤, 알록달록한 색감 같은, 정신을 혼동시켜 뇌 속에 화학작용을 팡팡 일으켜 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영화의 초반부에 특별한 능력을 가진 마드리갈의 많은 가족 구성원에 대한 소개를 친절하게 노래로 만들어 미라벨이 부르는데 치유, 강력한 힘, 꽃 피우기 등등 각각의 능력자 가족들 사이에 미라벨만 능력이 없다. 초인들 속에 평범함은 평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특이하거나 별종처럼 느껴진다. 심지어 마을 어른 한 분은 미라벨에게 안 특별해서 특별하다고 말한다.
미라벨은 능력이 없는 자신도 특별하고, 이 특별한 가족이 자랑스럽고 사랑한다고 했지만 소외감을 느끼고 있었고, 능력을 가지고 싶어 한다. 겉으로는 완벽해 보이는 다른 가족들도 크고 작은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 미라벨의 큰언니인 이사벨라는 언제나 완벽해야 하고, 그렇게 보여야 한다는 압박감에 눌리고 있으며 가족을 위해 하고 싶지 않은 결혼을 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고, 둘째인 루이사 역시,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까 봐 늘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고, 마드리갈 가문의 가장 큰 어른인 아부엘라 역시 항상 완벽해야 하며 가족과 마을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녀의 강박이 가족들을 정서적으로 학대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미라벨의 이모인 페타는 기분에 따라 날씨를 변하게 하는데 그 때문에 항상 좋은 생각을 해야 하고 예민해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기에 더 감정 조절에 문제가 있어 보였다. 조금만 예민해져도 자신의 감정을 온 마을 주민들이 다 알게 될 테니 너무 괴로울 것 같고, 감정을 누르고 조절해야 하니 어후... 감정을 건강하게 풀어야 하는데, 쉽지 않은 인생이다. 이것이 기프트 인지 저주인지 잠시 고민이 되었다. 물론, 사용만 잘한다면 분명 대단한 능력이다.
연예인이나 스포츠 선수처럼 완벽해 보이는 스타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이나, 한 분야에 뛰어난 천재라 추앙받는 사람들과 이들이 겹쳐 보인다는 의견도 보았는데 동의한다. 하지만 평범하다고 분류되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비슷한 가면을 쓰고, 불안과 강박 속에서 살고 있다.
고등학생 때 얼굴도 예쁘고 착하고 말도 나긋이 하는 친구가 있었다. 저 친구처럼 나도 말을 나긋이 해야지 하며 볼 때마다 참 예쁘다~라고 생각한 친구가 였는데 성인이 된 후에 너의 어떤 어떤 점이 참 부럽고 질투가 났었어.라는 고백에 한 번 놀라고, 자신이 예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에 두 번 놀랬고, 착한 게 아니라 그저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소심한 아이였다는 사실에 세 번 놀란 적이 있었다. 원래도 별로 없던 질투나 시기심이 아예 소멸된 게 그 시점이었다. 어쩌면 특별하단 건 다른 사람들이 특별하게 봐줘서도 있겠지만 본인 스스로 특별해져야 하는 것은 아닐까?
안경을 쓰고 곱실거리는 짧은 머리카락을 지닌 미라벨의 모습에 디즈니에 이런 캐릭터가 있었나? 하며 좋은 변화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마법의 힘을 지닌 까시타라고 불리는 그들의 집에 금이 가고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다른 가족들은 인지하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으려 할 때 문제를 직시하고 정면으로 마주하며 고쳐나가려 하는 캐릭터라는 생각이 들었다.
까시타에 금이 가고 무너질 것이라는 걸 미라벨보다 먼저 안 가족 구성원이 있었다. 삼촌인 브루노인데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문제는 그 능력을 통해 불행한 일들을 예언하곤 해서 미라벨 못지않게 가족들에게 소외되고 마을에서의 평판도 좋지 않다. 브루노의 이름을 말하면 안 된다고 온 마을 사람들이 함께 부르는 노래인 We Don't Talk About Bruno를 비롯해서 수록된 곡들이 팝 음악 같고, 디즈니스럽지 않아 신기하다고 생각했는데 빌보드에도 오르고 그랬다고 한다. A Miracle
음악 얘기를 좀 더 해보자면 다른 가족 구성원들이 부르는 노래는 대부분 4분의 4박자인데 미라벨이 부르는 ‘기적을 기다려(Waiting On A Miracle)'l는 콜롬비아 왈츠 리듬의 4분의 3박자라고 한다. 가족들 사이에서 미세하게 어울리지 못하는 미라벨의 심정을 보여주기 위해 이렇게 작곡되었다는 디테일에 소름이 돋으며 미라벨과 브루노에게 부족하거나 별나고, 별스러운 게 아니고 다른 거야~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다. 영화가 다 끝날 때쯤엔 그들도 깨닫겠지만 말이다.
브루노는 미래를 보는 자신의 능력을 통해 까시타에 금이 가고 그 중심에 미라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가족들이 알게 되면 미라벨에게 상처를 줄까 봐 그들을 떠나 숨어 살고 있었는데, 이 회피형 인간의 잘못된 따스한 마음이 가엽기도 하고 약간 무섭기도 했다. 회피형 인간은 어떤 압박이 가해지면 동굴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관계를 단절하지 않고 곁을 지키고 있다는 건 찐 사랑이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매우 공감했다. 갈등이 생기면 나는 안경을 쓰고 있음에도 바로 보거나 직진하지 않고 우회하거나 동굴로 들어가 일단 앉는데, 안경을 고쳐 쓰고 직진하는 미라벨의 용기가 새삼 대단하다.
까시타에 금이 가고 무너져 내리게 된 이유가 가족들 간의 갈등이 원인이었다면 미라벨이 언니들과 아부엘라와의 진솔한 대화를 통해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강박과 불안감을 이해하고 털어놓는 일들이 갈등을 해소하는 과정일 것이다.
화려한 색감의 영상과 음악의 갓벽함에 비해 서사가 약하다는 의견들을 보았다. 다른 영화들에 비해 그러니까 인류의 절반이 사라진다거나 물레 바늘에 찔려 영원히 잠들거나 생사가 걸린 문제는 아니다. 힘에 집착하는 선역들이 내게는 신선했지만 가족 구성원들의 갈등구조의 이야기가 약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충분히 알 것 같다.
게다가 인원이 꽤 많이 나오는데 이야기가 늘어질 것을 걱정해서 인지 아부엘라와 세 자매 외에 가족 구성원들의 갈등은 많이 축소되었다. 미라벨 다음 세대인 안토니오도 미라벨처럼 능력을 받지 못할까 봐 걱정하는 대사가 나온다. 이 아이가 받고 있었을 중압감이나 두려움도 표현된 것보다 훨씬 컸으리라 생각된다. 또, 마드리갈 가족과의 혼인관계로 인해 가족 구성원이 된 비 능력자들도 미라벨 정도는 아니지만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는데 까시타의 균열과 붕괴는 이런 사유들로부터 점철되어 왔을 것이다. 그런데 이 많은 인물들이 가지고 있는 갈등이 그리 궁금하지가 않다. 캐릭터들이 조금 더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면 각 캐릭터가 품고 있는 갈등과 서사가 궁금하고 파생되는 후속 작들을 기대해 볼 텐데 그냥 여기서 끝내는 것이 딱 좋을 것 같다. 엘칸토 2 : 벽속의 부르노 이런 게 나오면 엄청 재밌을 것 같지는 않다. 쥐들이랑 놀았겠지 뭐
이 영화엔 마녀나 새엄마 같은 빌런이 없다. 가족들 간의 갈등이 빌런이고, 미라벨이 가진 용기가 영웅쯤 될 것이다. 애초에 기적의 초는 미라벨의 할아버지인 페드로의 용기와 희생과 가족을 향한 사랑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미라벨이 가진 용기와 가족을 향한 사랑이 미라벨이 가진 전부다. 사실, 미라벨은 아부엘라와도 많이 닮아 보인다 방식은 다르지만 가족과 기적을 지키겠다는 열망이 둘 다 매우 크다.
생각한 대로 디즈니 영화라는 한계 속에서 충분히 예상되는 평범한 이야기다. 원스 어폰 어 타임에서 엄청난 대 변화가 일어나고 있지만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는 왕자가 공주에게 건네는 입맞춤이 저주를 푸는 세계관 속이지 않은가? 그런데도 이 영화를 되새김질하려 이 글을 쓰고 있다. 미라벨처럼 이게 이 영화의 능력인 것 같다. 평범할 수 있는 이야기에 눈 끝이 시큰했고 마음에 차오르는 따뜻함이 있었다.
흥겨운 리듬과 아름다운 영상과 풍성한 색감이 나를 들뜨게 했고, 특히, 이사벨라가 등장하는 장면마다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나는 꽃을 좋아하는데 살식마라서 꽃이나 식물을 키울 수가 없다. 정원을 만든다면 아마 나는 연쇄 살식마가 될 것이고 그것은 아름다운 꽃들에게 해서는 안 될 짓이지 않은가? 그래서 배양토도 물도 없이 꽃을 마구 피어대는 이사벨라가 나올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성격은 미라벨 한정으로 까칠하고 타인에겐 완벽한 아름다움의 대명사다. 마치, 장미와 같다. 아름답고 완벽한 꽃잎을 지키며 함부로 꺾여나가지 않게 바짝 가시를 세워둔다. 이 아름다운 꽃들의 향현이 내 정신의 절정을 최대치로 끌어올려주었다. 정신이 아프면 술 보다 뮤지컬이나 디즈니 느낌의 영화를 보는 편인데 둘 다 네다섯 시간쯤은 즐거움이 갈 것이다.
중간중간 까시타의 말을 알아듣는 것도 같았고, 기적의 초에 불을 붙이는 미라클을 시전 한 미라벨은 까시타 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 능력일까? 이제 미라벨은 엄청난 대 마법사가 되는 건가? 하는 생각도 해보았는데, 아마 까시타와 오래 함께 했으니 반려동물의 의중을 대충 눈치챌 수 있는 것과 비슷한 교감일 테고, 마법이 복원된 것은 할아버지와 같은 미라벨의 용기와 사랑으로 가족들의 갈등이 해소되어 기적을 부활시킨 것이지 미라벨은 여전히 마법 능력이 없는 가족 구성원으로 남아 있을 것 같다. 미라벨이 대문에 손잡이를 달 때 그녀만이 아닌 가족 구성원 전부가 대문에 새겨진 것만 보아도 그렇다.
영화에서 가장 좋았던 노랫말이 ‘All Of You’에서의 ‘별은 빛나는 것이 아닌, 타오르는 것’인데, 이과가 아니라 잘은 모르지만 별은 항성이다. 금성, 수성, 목성 같은 태양의 빛을 받아 빛나는 행성과 달리 항성은 스스로 빛과 열을 내는 천체이다. 항성은, 별은 자신의 내부에서 벌어지는 에너지의 힘으로 끊임없이 폭발하여 즉, 타오르며 빛을 낸다. 미라벨은 이과인 것인가? 아마, 미라벨이 말하고자 한 것은 분명 타고난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우리 모두 별이기에 스스로의 노력으로 충분히 타올라 빛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 같다.
그런데, 뭐... 평범하면 좀 어때? 빛나지 않으면 어때? 모두가 특별해질 필요가 있을까? 게다가 너무 빨리 타올라 터져버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지도! 모두가 빙판 위에서 달리고 춤을 출 수는 없다. 빙질이 좋아지게 닦고 가는 사람도 필요하고, 스케이트 날을 만드는 사람도 필요하다. 필요에 맞게 자신의 일을 잘하며 각자의 위치에서 사회를 이루는 구성원으로 앞가림 잘하며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 무너진 집을 복원한 것은 특별한 능력이 없는 평범한 마을의 주민들과 능력이 사라진 가족들이었다. 무거운 짐은 함께 들면 가볍고, 무너진 집은 함께 만들면 금세 뚝딱이다. 어쩌면 기적의 초에 다시 불이 붙게 된 것은 평범한 사람들이 함께 모여 스스로들의 힘으로 일궈낸 작은 기적들이 모인 덕분 일수도 있지 않을까?
다시 생각해보니 마을 주민 중에 미장의 달인이나 빙질의 신이 나 스케이트 날의 불량을 찾아내는 매의 눈이나 우리 집 제빵 왕, 우리 부서 엑셀의 퀸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런 평범함 속의 특별함들 때문에 사랑과 용기를 가득 담은 빛나는 마음을 가진 미라벨은 모두가 별이라고 노래했나 보다.
디즈니의 50년대 90년 2010년대 그리고 근래의 작품들을 보면 엄청난 격동이 느껴진다. 공주들은 주체적으로 변했고 음악 역시 많은 변화들이 있고, 최근에는 여러 인종을 캐스팅하여 실사 영화를 만드는 시도도 하고 있다. 이렇게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시대와 세대가 변하고 오랜 세월이 흐름에도 디즈니의 영화들이 오래도록 사랑받는 이유가 아닐까 한다.
꽃은 완벽한 대칭을 이루고 있지만 인간은 완벽할 수 없다. 짝눈이거나, 왼쪽 두 번째 발가락이 제일 길 수도 있다. 그런 불완전한 불안 속에서 인간은 노력과 열정으로 스스로를 태우며 발전하고 변화하며 자신도 모르는 새에 여러 가지 색으로 활활 타오르며 빛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