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타기

고급 기술인가 비양심의 표상인가

by 심내음

‘물타기’


서퍼는 아니지만 생존에 있어서 요즘 가장 핫하게 요구되는 기술. 회사에서도 정치에서도 정말 많이 쓰인다.


민재는 아침에 회의가 많아 정신없이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메신저가 울린다. 민재의 상사들 중 한 명으로부터 연락이라는 뜻이다. 메신저 홍수인 요즘 상사들에게만 알림을 설정해놓고 동료 후배들의 메신저는 알람을 꺼놓고 나중에 짬이 날 때 한꺼번에 확인한다. 동료, 후배들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민재도 살아야 하니까. 물론 급한일이어서 메신저 후에 전화를 거는 경우는 당연히 받는다. 민재도 나중에 급한 일로 그들의 도움이 필요한 경우가 있을 것이므로.


- 메신저 방-

“민재”

“넵, 팀장님.”

“그 ABC 진행건 어떻게 되어가는지 본부장님에게 좀 물어봐라”

“네? 그때 본부장님께서 조금 기다리라고 하셨는데 지금 또 여쭈어보면 싫어하시지 않을까요?”

“그래도 물어봐. 본부장님도 일 시켜야지. 그런 걸로는 괴롭혀 드려도 된다”

“네, 알겠습니다”


사실 ABC 건은 그리 급한 일은 아니다. 그런데 팀장은 자신과 관련이 있어서 그런지 과도하게 궁금해한다. 민재는 너무 바빴지만 팀장의 말을 그냥 넘길 수 없어 본부장에게 연락을 한다. 민재의 본부장은 비교적 젊은 편으로 필요한 내용은 메신저로 연락을 하라고 부서원들에게 강조를 한다. 본부장 자신이 회의 등으로 자리에 없을 때도 많고 바쁜 일정 때문에 자신이 메신저를 보고 필요하면 당사자를 자리에 불러서 회의를 하는 것을 선호 하기 때문이다


-다른 메신저 방(본부장과의)-

“본부장님, 고 팀장이 ABC 진행건 언제 결론이 날지 본부장님께 여쭤봐 달라고 하는데 어떻게 답을 해줄까요?”

“둘이 나에게 같이 와라. 너네는 왜 따로따로 물어보냐”

“네? 따로따로요? 저는 조금 전 고 팀장에게 연락을 받고 여쭈어 본 것 입니다만”

“내 일정 보고 빈 시간으로 잡고 오도록”

“넵 알겠습니다”


본부장의 대답을 보면 아마 민재가 물어보기 전에 고 팀장이 본부장에게 먼저 물어본 것 같았다. 민재는 조금 짜증이 났다. 고 팀장 때문에 자신이 이렇게 억울하게 혼이 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시 다른 메신저 방(고 팀장)-

“민재 이게 뭐냐? ‘(민재가 본부장에게 보낸 메신저 대화의 캡처본)”

“네?”

“왜 나를 팔아서 상황을 이렇게 만들어”

“무슨 말씀이신지. 팀장님이 물어보라고 아침에 하셨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팀장님 언급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으면 제가 그랬을 텐데 특별히 그런 말씀 없으셔서 있는 그대로 본부장님께 여쭈어 본 건데요?”

“본부장님 미팅 시간 목요일로 잡고 ABC 관련해서는 보고 체계에 따라서 팀장인 나와 같이 보고하라는 명령이시니 독자적으로 하지 말고 나를 거쳐서 하세요”

“네? 네(독자적은커녕 팀장님인 당신께서 물어보라고 하지 않았으면 물어보지도 않았을 거예요. 그리고 독자적으로 물어본 적도 과거에 없고요)”


-목요일, 고 팀장과의 메신저 방-

“본부장님께서 팀장인 나와 상의할 것이 있으면 먼저 상의를 하라고 하시니 그 후에 본부장님께 말씀드리도록 합시다”

“(갑자기 밑도 끝도 없이 무슨 말이지?)넵, 그럼 오늘 14시 미팅은 어떻게 할까요? 그때 목요일에 잡으라고 하신 건입니다만 지금 본부장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는 내용 보니 14시 미팅은 우선 취소해야 할 것 같아서요”

“나랑 상의가 먼저요”

“네 알겠습니다. 금일 미팅은 취소하겠습니다”

“14시 미팅이 나도 참석하게 되어 있었나요?”

“네. 월요일에 메신저로 말씀하셔서 목요일로 잡았고 팀장님 일정표에도 들어가 있습니다.”

“미팅 잡으면 나한테 별도로 얘기를 해야지

“네? 팀장님께서도 본부장님처럼 통상 일정표만 보시고 별도 말씀은 안 드렸는데요(왜 갑자기 유체이탈 화법을.... 다른 사람들도 별도 말은 안 하는데 갑자기 기억상실증 환자처럼 왜 이러는 걸까). 팀장님께서 예전 ‘내가 일정 보고 참석이 필요할 것 같은 미팅만 담당들하고 협의하면 되니까 미팅 일정은 시스템에 등록하고 나서 별도로 다시 말 안 해줘도 된다 효율적으로 일하자’라고 하셨는데요. 그리고 이제까지 일정표 보시고 본부장님이나 팀장님이 필요하면 참석/불참석 정해주셨는데 갑자기 별도로 얘기를 안 했다고 말씀하시는 게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지금 감정적으로 대하는 건가요?”

“아닙니다. (무슨 말이지? 감정적인 건 내가 아닌 것 같은데) 앞으로는 별도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냥 자신에게 불리하게 되면 하루 전이건 1분 전이건 자신의 말한 것을 뒤집는다. 그리고 절대 기억이 안나는 것처럼 얘기한다. 심하면 네가 잘못 알아들은 거지로 몰고 간다. 물타기는 이렇게 오늘도 여기저기서 벌어진다. 얼마 전 한 정치인이 말실수를 하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언론에서 내가 말한 의도와 본질을 호도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가’라고 말을 했지만 ‘가’라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가’라고 말해놓고 비난이 거세지자 사실 ‘가’라는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 사람들이 손쉽게 배우고 의사소통하라고 만들어진 한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은 너무 기분이 언짢으실 것 같다.


프로 서퍼 뺨치게 물을 타고 다니시는 분들, 정말 물은 바다에서만 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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