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희의 배우자가 아닌 '감독 장항준'의 완벽한 증명
주말에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보고 왔다.
OTT의 홍수 속에서 극장을 찾는 일이 적다 보니, 이런 영화를 상영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한동안 스크린보다는 알고리즘이 추천해 주는 콘텐츠에 익숙해 있었던 탓일까. 함께 보자는 제안이 아니었다면 아마 그냥 흘려보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막상 보고 나니,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개봉한 지 어느덧 2주가 넘었고(26년 2월 4일 개봉), 21일 기준 누적 관객 수 500만 명을 돌파했다니 꽤나 화제다. 무엇보다 '유령', '시그널', '킹덤', '악귀' 등으로 유명한 '스타 작가 김은희 작가의 배우자' 혹은 '예능감 좋은 감독'으로 소비되던 장항준 감독이 드디어 자신의 이름 석 자를 각인시킬 명확한 대표작을 내놓았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사극으로 조선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인물 중 하나인 단종(본명 이홍위)의 이야기를 다룬다. 역사는 그를 짧게 기록했지만, 영화는 그 기록의 여백을 촘촘한 상상력으로 메운다.
단종은 아버지 문종이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면서 11세의 나이로 조선의 6대 왕이 되었다. 그러나 대비도, 어머니도 없는 상황에서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며 유배길에 오른다. 그렇게 16세의 소년은 영월의 차가운 공기 속으로 보내진다.
그곳에서 단종을 감시하는 인물, 엄흥도(유해진)가 등장한다. 죄인을 관리해야 하는 냉정한 임무와 한 인간으로서 느끼는 연민 사이의 균열을 유해진은 절묘하게 표현한다.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이 영화의 중심에는 ‘왕’보다 ‘왕과 함께 사는 남자’가 있다. 초반부 카메라는 단종이 아닌 엄흥도의 발걸음을 따라가며, 낯선 영월의 풍경을 보여준다. 왕과 백성의 수직적 관계가 ‘삶을 함께 살아가는 인간 대 인간’의 수평적 관계로 변해가는 지점이 이 영화의 핵심이다.
단종의 죽음 이후, 강에 버려진 시신을 몰래 수습해 장사 지내준 인물로 엄흥도가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그 장면이 영화에도 짧게 담겼다. 모두가 피하는 자리에서 단종의 시신을 건져 올리는 그의 모습은 단순한 ‘관리자’를 넘어, 인간의 다정함과 용기의 정수를 보여준다. 유해진이야말로 이 영화의 제목이 된 이유가 명확해진다.
물론 유해진의 연기가 빛날 수 있었던 건 단종 역의 박지훈 덕분이기도 하다. 그룹 워너원 출신이라는 타이틀로 유명하지만, 이번엔 아역 시절부터 쌓아온 밀도 있는 연기가 돋보인다. <약한 영웅>에서 보여준 ‘독기 서린 눈빛’이 이번엔 세상의 거센 풍파를 감당하는 어린 왕의 눈빛으로 바뀌었다. 캐릭터를 위해 15kg을 감량했다는 노력까지 더해져, 유배지의 고단함이 화면 너머로 전해진다.
조연들의 활약도 빼놓을 수 없다. 유지태, 전미도, 안재홍 등 쟁쟁한 배우들이 적재적소에서 등장해 극의 결을 정교하게 이어준다. 덕분에 주연이 미처 채우지 못한 작은 감정선까지 풍성해진다.
요즘 콘텐츠 시장은 점점 더 자극적으로 변하고 있다. 피가 튀고 칼이 춤추는 장면들 속에서, <왕과 사는 남자>는 오히려 고요하게 마음을 파고든다. 화려한 CG나 폭발적인 사운드 대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기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나서는데, 한참 동안 여운이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이런 영화가 흥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반갑다. 스펙터클한 볼거리는 없지만, 스크린 속 어둠에 몸을 맡기면 누구나 박지훈이 그려낸 고독한 왕의 눈물에 마음껏 공감하며 남몰래 눈물 훔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 순간, 아마도 나 역시 마음 한켠이 젖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