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이 아니라 꿈
2008년, 저는 미성년자에게는 허락되지 않던 갑자기 주어진 자유와 약간의 불안감을 즐기던 대학 신입생이었습니다. 0교시부터 8교시까지 주어진 시간표가 아닌 나의 선택대로 강의를 듣고(자체 휴강은 덤), 야자 대신 주어진 많은 밤들을 참이슬 후레시와 동기들과 보내던, 고삐 풀린 망아지였죠.
그러다가 6개월 간 미국에서 교환학생으로 지내게 되었습니다. 미국에서도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수업은 뒷전이고, 오늘은 어느 클럽을 갈까 하는 생각으로 시간을 보냈습니다.
숫자뿐이었던 토익 915점 덕이었는지 술을 마셔서 혀가 풀어진 덕인지 모르겠지만, 영어에 자신감이 붙었고 몇몇 현지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습니다.
그중 더 가까워지게 된 한 친구의 말은 저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내 꿈은 탐정이야.”
‘얘는 다섯 살짜리 꼬마 같은 소리를 하네’
자신감 있는 미소를 지으며 이 말을 뱉은 친구는 90년생. 그 당시 나이 24살이었습니다. 저는 매우 당황해서 탐정이 무슨 일을 하는지 물었고, 그 친구는 탐정이 하는 일이 뭔지, 왜 탐정이 되고 싶은지, 탐정이 되기 위해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 눈을 반짝이며 설명해주었습니다.
아직도 이 친구와 캠퍼스 계단에 걸터앉아 이 대화를 나누던 순간의 공기를 잊지 못합니다. 너무 충격이었거든요. 한국에 있는 대학생 친구들은 ‘꿈’이 아닌 ‘취업’을 말하며, 반짝이는 눈이 아닌 한숨과 함께 미래를 말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였고요.
나의 꿈은 무엇인지, 무엇으로 밥 벌어먹고 살아야 가슴이 뛸지에 대한 고민은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취업이나 해서 밥이나 굶지 않으면 다행이지.’
이게 현실이라는 생각은 변함없었고 잠시 made in USA 동화 속에 있었던 것 같은 인상을 받으며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복학 후, 전공과 전혀 상관없는 광고의 이해(사실 정확한 강의 명이 기억이 나지 않아요)라는 교양 수업을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이 우연이 이후 앞으로의 마케터로서의 인생 첫 단추가 될 것이라는 건 그 당시에는 전혀 몰랐습니다.
상당히 학문적인 관점에서 광고를 다루는 ‘광고학’ 강의였고, 별 감흥이 없는 여느 교양 수업 중 하나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다 그 강의의 과제를 위해 어느 대학연합 마케팅 동아리에서 주최하는 세미나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때 눈이 떠졌습니다. 아니, 가슴이 뛰었어요.
‘이거구나. 내가 평생 밥 벌어먹으며 하고 싶은 일이!!!’
사실 마케팅은 광고와 같은 개념이 아니라는 것도 그때 처음 알정도로 관심이 전무한 분야였습니다. (두 영역의 차이와 광고업이 아닌 마케팅에 뛰어들 게 된 이유는 다른 글에서 다루어 보겠습니다.)
마케팅의 매력에 빠져들게 된 이유는 그 당시에는 명확히 알지 못했지만 지금은 정리할 수 있습니다. 매우 주관적으로요.
첫 번째 이유는,
‘마케터는 뭇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가치를 먼저 캐치하고, 그 가치를 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알고 향유하게 해주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남들보다 세상을 더 빠르고 깊게 파악하고,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몰랐던 가치를 일깨워주어 그들의 라이프스타일에 영향을 주는 사람.
저는 태생이 관심종자라, 남들보다 앞선다는 약간의 우월감과 타인에게 건강한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업종이라는 부분이 저를 매료시키지 않았나 싶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저의 성향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뒷심이 매우 약합니다. 시작한 일을 오랫동안 묵묵히 하는 성격이 못되고, 재미를 느꼈던 일도 금방 싫증을 내거든요. 이런 저의 성격은 단점으로 치부될 수 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 캠페인을 해내고 리셋 후 다른 캠페인에 빠르게 몰입하며 넘어가는 패션업종의 마케팅 직무를 해내기엔, 이 성격은 단점이 아닌 강점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실제로 짧게는 한 달, 길게는 세 달 주기의 캠페인을 이어오며 6년이라는 시간을 보내오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이유로 꿈을 찾았습니다. 심지어 현업이 되었으니 꿈을 이뤘다고 할 수 있겠네요. 탐정이 꿈이었던 그 친구는 경찰이 되었고 저는 마케터가 되었습니다.
마케팅을 하고 싶다는 후배들을 종종 만나 이야기를 나눕니다. 프로페셔널한 스태프들과 함께 하는 촬영장에서의 모습이나, 행사를 마치고 연예인과 함께 찍은 사진, 매월 잡지를 챙겨 읽는 모습 등이 멋있다고들 합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화려함이 마케팅의 전부는 아니며 그것이 마케팅을 하고자 하는 동기가 되어서는 이 일을 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환상을 깨 줍니다. 제가 뭐라고.
물론 그것이 동기가 되어 마케팅에 재미를 붙여 잘해나갈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경우엔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다른 실상에 그만두는 경우를 많이 봐왔기 때문에 해줄 수밖에 없는 말입니다.
물론,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표면적인 모습만 보고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생각과 동기만이 고결하며 옳은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좀 더 내면적인 동기로 마케터를 꿈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행복하게 일할 수 있을 테니까요.
마케터가 뭐하는 사람인데? 저는 마케터가 되고 싶어요!라는 분들께 주관적으로나마 마케터의 현실을 공유하고 싶어 글을 이어나가려고 합니다.
어떤 동기를 가지고 어떤 꿈꾸는 이든, 나의 글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