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북부 여행
게스트 하우스의 작은 방 침대에 누워있으면, 사이즈를 잰 듯, 두 발바닥이 벽에 닿았다. 천장의 색 바랜 벽지에 곰팡이가 핀 곳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치 시공간을 통과하는 블랙홀 처럼, 어느새 고비사막의 평원, 별이 쏟아져 내리는 그날의 밤으로 다시 돌아가 있었다. 그 곳엔 꼬리를 길게 빼고 떨어지는 유성을 바라보며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기뻐하던 내가 있었다.
고비사막 투어의 후유증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다시금 투어를 알아보기 위해, 인터넷 카페를 시간 단위로 들락거렸다. 그러다 운좋게도 북쪽에 있는 호수 홉스굴을, 투어가 아닌 개인적으로 여행한다는 글을 보고 당장에 메시지를 보냈다.
몽골.에서 코이카(봉사단체)로 활동한 경험이 있는 신애는 현지어를 제법 잘했다. 그녀와 고향 친구인 연진은 몽골에도 이미 몇 번 와본 적이 있다고 했다. 고향 친구인 이 둘과, 나이도, 성도 같아서, 으쌰 으쌰 의기투합하여 <최 자매>를 결성했다. 사회에 나와서 동갑내기 친구를 만나기가 여간 쉽지 않은데 이런 행운이 따르다니….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기 시작한 오후 5시. 울란바토르의 시외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그곳에서, 야간 버스를 타고, 홉스굴로 이동하기 위해 무릉이라는 도시로 향할 계획이었다.
한 시간쯤 지나고, 사람을 가득 싣고서야 버스는 출발했다. 미리 포장해온 햄버거를 먹으며, 14시간의 버스여행이 시작되었다. 머리만 닿으면 잠들어 버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나에게 야간 침대버스는 오히려 하루 숙박비를 아끼며 꿀 잠을 잘 수 있는 시간이었다.
다음날 오전 9시가 다 되어서 무릉에 도착한 우리는 터미널이라고 부르기엔 작은 공터에 하차했고, 그곳에 있던 승용차와 협상을 해서, 홉스골 호수 초입 마을인 하트갈로 약 세 시간가량 더 이동을 했다.
무릉을 벗어나니, 꿈에 그리던 대자연이 펼쳐졌다. 이렇게 쭉 뻗은 길을 마음껏 드라이브하고 싶었는데... 길 양쪽으로 펼쳐진 평원, 이제는 황금빛이 도는 풀들은, 여름에는 시원한 녹색빛을 띤다고 했다. 그리고 파란 하늘, 눈이 시릴만큼 파란 하늘.
중간중간 점점이 스쳐 지나가는 방목 중인 염소나 양을 찾는 것도 즐거움이었다.
호수 초입이라 그런지, 숙소 앞에는 폭이 넓지 않은 물길이 흐르고 있었다. 건너편의 언덕배기에는 노랗게 물든, 나무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몽골의 북부는 남부 지방에 비해 춥지만, 이렇게 호수가 있고, 나무들이 자라기 좋은 환경이라고 했다. 그래서, 나무를 베어 만든 통나무 집들을 많이 볼 수 있었고, 우리가 머문 숙소 또한 그랬다.
동화 속 백설공주와 난쟁이가 금방이라도 튀어 나올법한 외관이었다. 나무로 짜여진 노란색 문과 초록 지붕을 덮은 이 통나무 집은 5각 형태로 되어있고, 각 면에 5개의 싱글베드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유목민의 이동식 게르와 다르게 창문까지 있어서, 두 개의 창으로 밤에는 별빛이, 낮에는 햇볕이 잘 들어왔다.
중앙에는 나무땔감을 사용하는 보일러가 놓여 있어서, 어디에 있든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다만, 밤새 나무를 계속해서 넣어서 불씨를 꺼트리지 않는 것이 중요했는데, 깊게 잠이 들어버린 나는, 두 자매가 새벽에 돌아가며 일어나 나무를 넣어줬다는 사실을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알 수 있었다.
동네 한 바퀴를 둘러보고는, 늦은 오후 나무 보일러로 끓인 주전자의 뜨거운 물에 커피 한잔을 내렸다. 그리고는 의자를 가져다, 호숫가 앞에 앉았다.
호수와 커피 한잔….
달달한 커피향이 물길을 따라 퍼져나가고,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다음날, 조금 더 호수 안쪽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숙소 주인아저씨의 차를 타고, 장하이 마을까지 이동했다. 도착한 마을 앞으로 펼쳐진 홉스굴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하늘과 호수의 경계가 없는 파란색으로만 칠해진 캔버스가 두 눈에 가득 들어왔다.
이것이 정녕 호수란 말인가. 거센 바람에 물결까지 일렁이니, 파도가 밀려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대륙의 바다, 어머니의 바다로 불리는 홉스굴. 왜 바다라고 불리우는지, 바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바람이 매서웠다. 10월의 홉스굴은 이미 겨울 준비를 끝낸 듯했다.
날이 따뜻한 여름에는 홉스굴에서도 승마체험이 가능하다고 했다. 거대한 호수를 끼고서 말을 타고 바람을 가르며 기마민족의 후예마냥 기세 좋게 달려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겠다. 하지만 오늘처럼 이렇게 북쪽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을 마주하고서, 두 팔 벌려 호수를 품어 보는는 것도 흔한 일은 아닐 것이다.
욕심. 욕망..
잡을 수 있을 거라 확신했지만,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가버린 움켜쥐었던 모래알처럼..
헛된 것. 부질없는 것.
대신 이제는 꽉 쥐었던 주먹을 펴서,
바람을 만져본다.
호숫가의 칼바람에, 둘러 맨 스카프가 나풀거렸다.
가슴을 후벼 판다.
오히려 더러운 것들이 도려내지는 듯하다.
홉스굴에서 일말의 정화된 마음을 가지고, 돌아섰다.
오늘도 이렇게 치유받았다.
아니, 스스로를 치유했다.
최 자매와 홉스굴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승마체험을 하지 않아도, 보트를 타지 않아도, 홉스굴은 마치 시간여행자의 특별한 옷장처럼, 십대로 돌아가, 바람이 불어와 얼굴에 엉켜 붙은 머리칼 한올에도 자지러지게 웃게 했다.
호수 뒤 여러 채의 게르가 있는 곳 중, 하나로 들어가서, 한 끼 식사를 따뜻하게 하고,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번에는 온통 노란 캔버스였다. 노랗다.
단지, YELLOW라고 단정 지어 말하기 힘든, 다양한 채도와 명도를 가진 노란색 캔버스 안에 들어가서 폭신폭신한 카펫 위를 걷는 느낌이었다. 대자연에서 정화된 아니, 순수함 그 자체인 공기를 폐 속 가득 들이키고, 자극적이지 않는 자연의 맛을 담은 흙과 나뭇잎을 밟는다는 것은, 어쩌면 인간의 DNA에 새겨진 회귀에 가까운 본능과도 같았다.
돌아가려는 길에, 우연히 방목 중인 야크(yak) 무리를 보았다.
이름도 생소한 야크는 솟과이지만, 다리가 짧고 몸 아래에 긴 털이 나있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이 동물이 신기해서 한참을 쳐다보았다. 뜨거운 시선에도 아랑곳 없이 열심히 풀을 뜯어 먹고 있었는데, 두꺼운 피부와 긴털덕분에 추위에 견딜수 있어 몽골 북부에서는 가축으로 많이 길러진다고 했다. 짐을 나르는 데도 용이하고, 젖,고기,가죽,털을 얻을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좋은가. 다만, 야생의 야크를 가죽화시켜서 순하다고는 하나, 그 동안 봐온 한국의 소와는 확연히 달라서, 선듯 다가가 만질 수 없는 첫인상을 가지고 있긴 했다.
홉스굴 호수는 고비사막에 이어 몽골의 대자연과 마주한, 값으로는 매길 수 없는 시간들이었다.
어느 때보다 진했지만, 짧게만 느껴졌다. 허나, 아무리 오랜 시간 있더라도 아쉬움은 계속해서 느껴지리라.
어쩌면 이 순간들이 인생이란 자서전에, 한 페이지 또는 한 단락, 그것도 아니면 단 몇 줄로 정리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쓰여졌다는 것이다.
발자국을 남겼다는 것이다.
한 뼘 성장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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