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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쭌스토리 Feb 23. 2019

001. 쓸쓸함에 대하여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2016년 9월 11일 동해항


눈에서 수도꼭지를 튼 것 마냥 눈물이 흘러넘쳐 쓰나미처럼 얼굴을 덮쳤다. 시야가 흐려지더니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잡은 두 손의 온기로 아직 그가 옆에 있는 걸 느꼈다. 



‘혼자여도 괜찮아, 괜찮아. 다 괜찮을 거야.’



씩씩하게 잘 다녀오겠노라 몇 번이나 다짐을 했건만 이별의 순간에서 나 자신이 솔직하지 못한 것을 깨달았다. 전혀 괜찮지 않았다. 따뜻한 이 손을 놓기가 싫었다. 세계 일주가 뭐라고, 이렇게 그와 떨어지면서까지 떠나야 하는 걸까. 늪에 빠진 것 마냥 발이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가지 않았다. 나아갈 수 없었다.



“잘 다녀와. 기다리고 있을게.”



그래. 그의 당부대로 잘 다녀오면 되는 것인데...그의 모습이 작아지고, 목소리가 아득해지고, 손에 남은 온기가 식어갔다. 어떻게 블라디보스토크행 배 위에 올랐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정해진 객실에 가방을 두고, 멍하니 2층 침대 하얀 시트에 얼굴을 처박고 있었다. 



'아니야. 이럴 때가 아니지.' 

말라붙은 눈물자국을 엄지와 검지 손가락에 침을 묻혀 문질러댔다.


2층 침대에서 내려와서 이제 막 시작될 여정으로 안내할, 러시아로 데려다 줄 페리 안을 둘러보기로 했다. 

배 안에는 블라디보스토크를 가기 위한 한국인 단체 관광객들이 보였다. 의외였다. 


나에게 블라디보스토크란 도시는 아주 낯설고 이번 여행이 아니었더라면, 그곳에 간다는 것을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도시였는데 말이다. 그랬던 내가 러시아의 동쪽 끝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횡단 열차를 타고 러시아를 여행한다는 생각을 했다니, 어쩌면 시작부터 내면에서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정작 그 당시의 나는 깨닫지 못하고 찔끔 찔금 눈물만 훔쳤을 뿐이었지만 말이다. 



갑판에 올라 바다를 바라본다. 

지금은 북한 어디쯤을 지나고 있겠지. 북한이라니... 단어를 떠올리는 것 만으로, 

기분이 이상해진다. 죽을 때까지 가볼 수 있을까. 저기는 북한 바다인가?  여기는 공공의 바다 인가? 영해, 공해라는 개념이 있지만, 바다가 주인이 있다니, 아이러니했다. 그 속에 사는 생명들의 이동은 여권 도장, 비자 없이 이리도 자유로운데 인간의 욕심이 이 넓은 바다를 보이지도 않는 선으로 구분 짓고, 물에 닿으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종이 한 장에 도장을 찍게 했구나. 지나가던 물고기가 사람 말을 알아 들었다면 콧방귀를 뀔지도 모르겠다. 


아직 블라디보스토크까지는 꼬박 24시간이 더 남았는데, 여행 시작 전부터,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이제부터 많은 이동을 할꺼고, 그럴때마다 나는 이런 말도 안되는 백 만가지 별의별 생각들을 하게될까...?! 뭐 어때. 이런 생각한다고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닌데... 적당히 자기 합리화를 하고 다시 배안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이상하게 입맛이 하나도 없었다. 

배 안의 매점에서 컵라면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돌아다녀보니, 새빨간 우체통이 보인다. 이 곳에 편지를 넣으면 주소지로 발송된다고 하는 직원을 설명을 듣고서는, 바로 가방 안에서 종이와 펜을 꺼내어 떨어진 지 24시간도 채 되지 않은 그에게 보내는 편지를,  숨도 쉬지 않고 써내려 갔다. 

외로움과 쓸쓸함. 그리움에 대하여...


‘당신이 벌써 그리운데.. 앞으로 어쩌지..?’



***

다음날, 아침이라고 생각된 시간에 눈을 떴는데도 어두웠다. 언제  닦았을지 모를 창문의 한쪽면 마냥 뿌연 시야에 눈을 재차 감았다가 떴다. 안 되겠군. 밖으로 나가 배 갑판 위에 올라서서야, 구름이 온 하늘을 덮어 한 줌 빛조차 허락하지 않고 막을 쳐버려서 아침이 와도 어두운 것을 알았다.


‘하….’ 

입술을 비집고 한숨이 새어 나왔다.

송두리째 뭔가 바뀌어버릴 것 같은 역사적인 그 날인데, 인생 2막이니 거창한 표현은 다 가져다 붙였는데도, 어두운 하늘을 보니, 희망으로 부풀었던 첫 걸음은 어느새 다음  한 걸음을 뗄 수나 있을지, 주저함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분명 내가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결정한 여행이었음에도, 설렘과 희망은 다 어디로 가고 이렇게 망설이고 있는가.


‘하….’

두 번째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했다. 

배는 출발했고, 이제 곧 새로운 나라, 새로운 도시에 도착할 것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다른 세계로 통하는 문이 열렸다. 되돌아가기엔 마음먹고 열어버린 문 뒤 세상이, 그 문으로 들여다볼 다른 세계가 궁금하지 않은가. 발을 내디뎠다가 아니면 언제든 돌아가면 된다. 


‘겁내지 마. 겁내지 말자’

세 번째는 한숨이 아닌, 큰 숨을 쉬기 위해 어깨를 펴고 가슴 안으로 깊이깊이 숨을 들여 마셨다.


‘후….’

블라디보스토크라는 방송이 들려왔다. 

갑판 위로 올라가 벤치에 앉아서 시시각각 시야에 들어오는  항구 주변 경치를 바라보았다. 블록처럼 쌓여 있는 컨테이너들, 물 위를 잇는 가교, 어쩐지 오래되어 보이는 건물들. 


‘정말 와버렸어. 도착해버렸다고!!’

미리 예약해둔 포트 근처 15분 거리의 숙소로 향했다. 앞 뒤로 멘 가방의 무게를 느끼며 이제 정말 여정이 시작되는 것을 실감했다. 


‘가방, 나의 무게.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할 나의 무게.’


첫 유럽 땅을 밟은 소감이랄까. 거리의 간판들, 길 표지판들, 어쩐지 읽을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럴 수 없는 낯선 문자들의 향연, 큰 대문이 있는, 낡은 부조 벽면과 일부가 떨어져 나가 온전하지 않은 조각품이 장식된 건물 외벽, 세월을 품은 오래된 큰 건물들 사이사이를 지났다. 잿빛 구름이 하늘을 가득 채웠고, 어쩐지 건물들이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쓸쓸했다...


확실히 그간 다녀본 동남아 여러 국가들과는 다른 건물 형태였다. 지나가는 이들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크고 덩치가 큰 남자들이 지나갈 때마다 경계의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고작 오후 4시밖에 되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렇게 블라디보스토크의 짧은 인상을 뒤로하고 도착한 여행 첫 게스트 하우스의 출입문 역시 과히 3미터는 넘어 보였다. 여긴 왜 이렇게 다 큰거야... 가장 저렴한 도미토리 2층 베드를 배정받았는데도, 2층 침대 매트리스 위에 서도 될 만큼, 천장 공간에 여유가 있었다. 일층과 이층 베드 사이의 사다리도 어찌나 긴지, 발을 잘못 헛디디면 큰일 날 것 같은 아찔한 높이였다. 조심스레 사다리에서 내려와 기본이 될 유심카드 구입과 시베리아 열차를 타기 위한 기차역, 그리고 마트 구경을 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내렸던 항구로 되돌아가, 유심카드를 사려고 하는데, 영어가 통하지 않았다. 손짓과 그림을 그려가며 ‘러시아 전역’이라는 뜻을 전달하려고 애를 쓰다가 핸드폰 번역기로 소통하려고 했으나, 파란 두 눈은 몹시 곤란한 것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에잇! 그래. 일단 사고 보자. 어차피 다음 행선지는 울란우데니까, 안되어도 어쩔 수 없지.’

크게 고민하지 않고 ‘어쩌면 될 대로 돼라. 그것 또한 신의 뜻!’라는 식의 사고방식은 여행 첫날부터 그대로 적용되었다. 


“ 그래도 쓰파쉬파.” (고마워요) 


항구 옆 멀지 않은 곳에 바로 넓은 러시아를 횡단하는 열차의 시작점인 기차역으로 갔다.

며칠 뒤면 저 기차를 타고, 종착역인 모스크바까지 약 4분의 1 지점인 울란우데로 가서 몽골로 내려간다. 아직 기차 티켓도 구하진 않았지만, 겁낼 건 없다. 

나는 괜스레 주먹을 한번 불끈 쥐었다가 손에 힘을 풀었다. 


‘더 어두워 지기전에 마트에서 필요한 걸 사지 않으면...’

서둘러 기차역 건너 마트로 향했다. 시원하게 목을 축여줄 현지 맥주 한 병과, 익숙한 그러나 익숙하지 않은 한국에서 보기 드문 네모난 모양의 "도시락" 컵라면을 플라스틱 바구니에 담았다. 간단한 주전부리까지 사서 숙소로 돌아오는데 허전한 기분이 들어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사지 않은 물건이 있나.?’

고개를 갸웃거리다 허전함의 이유에 대해 생각하면서 낙엽이 떨어진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터벅터벅.

여행지에서 혼자 걷는 길이 이렇게 쓸쓸했던가.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 허전함이 ‘그’라고 불리는 존재의 부재로 인함을 알았다.

‘어쩔 수 없지. 내가 선택한 길이잖아. 쓸쓸해도 후회는 하지 말자.’



2층 침대에 누워 시원한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내일 아침엔 블라디보스토크 시내 쪽을 가슴이 시리게 달려봐야지. 어느덧 방안은 사연을 품은 여행자들의 설레는 웃음소리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오늘은 첫날이니까... 이만 쉴까?’ 

'아냐. 그래도, 오늘은 첫날인데... 이렇게 쉬어도 되나?'


내려갈까 잠시 망설였지만, 정의하기 어려운 허전함과 쓸쓸함으로 피로가 몰려오는 것 같았다. 나는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그대로 두기로 했다. 웃음소리들이 귓가에서 아득히 멀어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꿈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세계일주의 첫날 치고는, 갖다 붙인 수식어가 멋쩍게 평범한 보통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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