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ep Calm and Carry on
영국 런던서 지낸 지 어느새 다섯 달이 다 돼간다. 첫 며칠 ‘허니문’ 기간 동안 고풍스러운 석조 건물 사이를 오가는 빨간 2층 버스, 그 사이를 비집고 달리는 자전거 출퇴근자들을 흥미롭게 지켜보긴 했지만, 어느 낯선 곳에서나 느낄 만큼의 감흥이었다. 이 마저 오래가지 않았다. 런던의 모습이 여느 서구 선진국 도시와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세계화(라고 하지만 사실상 ‘서구화’) 의 영향으로 전 세계 도시, 특히 수도의 외양과 기능이 점차 비슷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학 시절 호주 시드니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캐나다 밴쿠버에서 교환학생 신분으로 각각 반년 정도 살아본 경험도 이 밋밋한 느낌에 기여했다. (공교롭게도 호주와 캐나다는 모두 영연방 국가다.) 더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도시가 오래된 만큼 교통, 수도, 건물 등 인프라가 무척 낡았고, 청결도, 안전함에서도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다. 일단 전 세계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졌다는 런던의 튜브(tube. 지하철)는 작고, 붐빈다. 계단을 이용한다면 한참을 걸어 내려가야 한다. 깔끔함을 기대하는 것은 물론 무리다. 서울의 지옥철에 익숙한 사람도 출퇴근 시간 여러 인종의 사람이 뒤엉킨 좁은 튜브 안에서 숨이 막힐 수 있다. 길에서건, 건물 안에서건 종종 생쥐를 마주치는 것은 일상이다. 가끔 숙소 인터넷이 끊기고, 수도에서는 석회 물이 나온다. 길거리서 재수가 없으면 소매치기나 핸드폰 날치기의 표적이 되기도 한다. 런던 주요 업무/관광 지구에 좀도둑이 득실거리기 때문이다. 일대 카페나 식당, 심지어 학교 건물에서도 ‘소매치기에 주의하시오’와 같은 문구를 쉽게 볼 수 있다. 더구나 날씨는 또 어떤가. 하루 걸러 비가 오고,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뀌는 날씨에 익숙해지고 나면 영국 사람들이 왜 소위 말하는 ‘small talk(잡담)’에서 날씨 이야기에 집착하는지 이해하게 된다.
물론 많은 유럽 주요 도시가 그렇듯, ‘최신식’ 서울과는 다른 런던, 영국의 모습이 많은 관광객을 불러 모으는 이유겠지만, 영국의 진짜 매력은 보이지 않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바쁜 와중에도 이곳 사람들이 놓치지 않는, 차분함과 여유를 우선으로 꼽고 싶다. 이를테면, 줄이 길게 늘어선 커피숍에서 바리스타가 기다리는 손님들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이 생각한 온전한 커피 한 잔을 내는 것. 런던 어느 카페에서 직접 겪은 일이다. 바리스타는 주문을 마치고 대기 중인 손님이 무척 많았는데도 내가 주문한 라테에 온 집중을 다해 예쁜 라테 아트까지 만들어 냈다. 그의 느긋함에 성격 급한 내가 오히려 길게 늘어선 손님들의 편의를 걱정했달까. 또 한 번은 크리스마스 연휴 때 기차를 타고 영국 남서부 지방 콘월(Cornwall) 여행을 다녀왔을 때다. 때마침 철도 직원들의 파업으로 각 노선들이 단축 운영을 하는 바람에 갈 때 네 번이나 기차를 갈아탔는데, 더 ‘웃픈’ 일은 런던으로 되돌아올 때 일어났다. 한 역에서 기차가 정차를 했는데 좀처럼 출발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목소리 작은 이방인인 데다, 어찌할 도리도 없어 세월아 네월아 기다리는데 거의 20분이 지나서야 안내 방송이 나왔다. “승객 여러분, 열차 운전자가 아직 도착하질 않아서 출발을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오고 있는 중이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조용하던 승객들은 그제야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지연에 항의하는 사람은 없었고, 당연히 고성도 오가지 않았다. 열차는 10분가량 더 기다렸다 출발했다. 이쯤 되고 나니 영국에서 왜 ‘Keep Calm and Carry On’이라는 말이 탄생했는지도 이해가 됐다. 1939년 영국 정부가 세계 2차 대전의 두려움에 떠는 국민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제작한 포스터 문구인데, 대규모 폭격이 코 앞인데 일단 진정하고 하던 일을 계속하라니. 영국을 조금 알고 보니 참 영국스러운 표현이지 싶다.
어쨌거나 런던은 영국에서 가장 바쁜 도시지만, 그 안에서도 사람들의 여유와 침착함을 느낀다. 내가 모든 것이 효율적이고, 그러려다 보니 모든 사람/사물들이 신속하게 움직여야만 하는 곳에서 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 역시 그랬었고. 그 모든 것들로부터 잠시나마 멀리 떨어져 온 지금은, 아마도 인간의 속도를 찾아가는 중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