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관계의 종결의식에 대한 사색
의례, 의식은 허무가 될 수도 있지만, 의식의 흐름을 위해 필요한 절차가 되기도 한다. 아이들이 입학식을 통해 이전과 다른 의연함을 보이게 되는 것이 예가 될 것이다. 속도와 편리함이 중요한 변인인 현대사회는 자기Self를 중요시 여기는 사회적 흐름에 덧입어 의례의식에 대한 태도나 방식도 매우 다양화되었다.
아직은 ‘의례의식’이라 하면 거창하고 호사스러움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지만 일상에서는 규칙이라 할 수 있겠고, 이는 나를 이어가기 위한 것도 있지만 공동체 사회를 위한 방안Skill이기도 하여 인간을 좀 더 의식이 있는 존재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도 한다.
폰이 일종의 신체 일부처럼 되어버렸다 하여 ‘포노사피엔스’라 불리기도 하는 우리네가 사회를 연결하는 방법으로 쓰는 폰은 누군가에게는 공포로 인식되기도 하여 ‘폰포비아’ 혹은 ‘콜포비아’로 불리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여러모로 있다고 한다. 키오스크도 휴대폰도 모두 인간을 위한 작품이며 편리함을 추구하기 위해 만들어졌는데 어찌하여 인간은 이를 공포로 느끼게 되었을까?
관계는 시작과 유지 그리고 종결로 나눌 수 있는데, 최근 이슈는 이 모든 절차에 있음에 짐짓 놀란다. 그러다 최근 웹대화창에서 ‘조용히 나가기’ 기능이 생기면서 많은 이들의 공감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게도 그냥 나가기가 불편한 대화창이 있다. 내 의견이 반영되지 않은 채 초대되었고, 원하지 않지만 그들의 일상을 체크하게 되어 읽지도 않고 넘어가게 되는 것도 있고, 분명 하나의 목적을 위해 여러 사람이 모였는데 목적 이외의 개인 이야기도 하는 곳이 되어버려 TMI가 불편해 자세히 읽지 않게 되는 대화창도 있다. 그러던 와중에 ‘조용히 나가기’의 소식을 듣게 되었고, 속으로 쾌재를 부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쉽게 ‘조용히 나가기’ 버튼이 눌러지지 않았다. 그렇게 쾌재를 불렀는데 어째서일까?
그간 공동대화창에서 나는 어떻게 나갔는지를 떠올려본다. 소식이나 대화내용이 불편한 창임을 밝히지는 않고 그간의 함께함에 고마움을 남기며 이번에는 대화창을 나가게 되어 미안함을 표현하였고 추후 기회가 닿으면 다시 뵙겠다는 미래를 기약했고, 다시 볼 날까지 모두의 건승을 바라며 ‘종결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나갔기에 그 후 남은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는 모른다. 어찌 되었던 나름의 종결의식을 치렀다. 물론 구구절절 이야기하는 것이 귀찮을 때도 있었고 속을 다 보인 것 같지 않아(불편감은 빼고 인사를 보내) 위선적인 느낌이 들 때도 있었지만 이것은 관계를 일단락하는 내 삶에 대한 태도였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고 나이가 들고 경험이 늘면서 내 삶의 가치와 방향을 생각하다 보니 다듬어진 것 같다.
웹상에서의 관계도 관계이기에 시작, 유지, 종결의 절차가 필요한 것인데, 종결의 장면에서 기회가 주어졌다. 사실 그간 애써 다듬은 내 태도를 유지하지 않아도 되는 편리한 선택지가 생겼다는 안도감과 동시에 그럼 나는 어떤 태도로 살아가야 하며 나는 관계에서 무엇을 원하는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다.
관계를 대하는 내 태도의 갈림길에서 나는 또 나에게 되묻는다. 의례의식은 무엇이고, 나는 어떤 태도와 방식으로 나다움을 반영한 인간이 되고 싶은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