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루, 매시간이 여름날의 구름처럼 흔적도 없이 가볍게 흘러갔다. 눈앞의 다채로운 이미지들과 갈 곳 잃은 감정들이 반짝거리다가 이내 꿈처럼 여운을 남기고 연기처럼 사라졌다.”
12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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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의 절반ㅡ휴가는 늘 처음 절반이 더 긴 법이다ㅡ이 벌써 지났다. 심한 폭풍우가 물러가고 여름도 나이를 먹으며 사려 깊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세상에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는 듯, 사랑의 깃발을 펄럭이며 소리 없이 사라져가는 나날을 항해했다. 하루하루를 황금빛 희망으로 채우고는 다가왔다가 반짝하고 가버리는 날들을 그저 들뜬 기분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붙잡으려고도 안타까워하지도 않았다.”
13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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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귀중한 모든 것이 덧없고 끝이 오게 마련이듯 내 청춘의 끝으로 기억될 이 여름도 하루하루 지나갔다. 내가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마침내 마지막 날이 다가왔다. 오랫동안 두려워했으면서도 막상 닥치니 실감이 나지 않았다. 맑고 푸른 늦여름날이었다.”
13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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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갈 때쯤 좁은 숲 골짜기에 이른 저녁 어스름이 퍼졌다. 하지만 우리는 서둘러 산마루에 올라서서 떨어지는 저녁해를 따라잡았다. 도시로 내려와 눈앞에서 해가 사라지기 전까지, 한 시간 동안 더 그 따뜻한 빛 속을 걸었다. 검은 전나무 수관 사이로 커다랗고 붉게 지는 노을을 바라보면서 내일은 멀리 낯선 곳에서 저 해를 보게 되겠구나 생각했다.
저녁에는 온 집안 식구들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로테와 안나가 역까지 배웅 나와 내가 탄 기차가 어둠 속을 달리기 시작하자 손을 흔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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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차창에 기대 가로등과 창문에 벌써 불을 밝힌 도시를 내다보았다. 우리집 정원 근처에서 커다랗고 피처럼 붉은 불꽃이 보였다. 동생 프리츠가 양손에 뱅골 꽃불을 들고 서 있다가 내가 그 옆을 지나가며 손을 흔드는 순간 커다란 로켓 폭죽을 수직으로 쏘아올렸다. 나는 창밖으로 몸을 내밀고 지켜보았다. 솟아오른 불꽃이 공중에 한참 머물다가 다시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붉은 불꽃비로 사라지는 모습을.“ 146p, 청춘은 아름다워, 헤르만 헤세. 문학동네.
나는 세상에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는 듯 사랑의 깃발을 펄럭이며 소리 없이 사라져가는 나날을 항해했다. 하루하루를 황금빛 희망으로 채우고는 다가왔다가 반짝하고 가버리는 날들을 그저 들뜬 기분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이 문장을 읽으면 나는, 나의 흐릿했던 스무 살, 여름이 곧장 떠오른다. 그때 내가 한 일이라고는 그런 것들밖에 없었다. '사랑의 깃발을 펄럭이며' 목적 없이 항해하는 것. 막연한 희망으로 하루를 시작한 뒤에, 하릴 없는 낮을 보내고, 밤이 오면 발이 아프도록 시내를 돌아다니거나 잔뜩 술에 취해 의미 없이, 하루를 마무리하기를 반복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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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 함께 동네를 걷곤 했던 ‘친구’가 있었다. 친구라기엔 친하지도 않은 사이였지만. 기억에도 없는 유치원 동창이라는 얄궃은 연결고리를 찾아낸 우리는 기어이 친구가 되기로 했다.
미리 약속같은 건 하지도 않으면서, 해가 저물어갈 무렵이 되면 만나자는 연락이 오기를 기다렸다. 나올래? 내가 먼저 물어보는 날도 있었다.
만나면, 여름 밤 거리를 그저 걷는 것이 전부였다.
나도 걷는 게 좋았다.
'친구'는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학을 앞둔 여름방학 중이었다. 유학을 떠나던 중학생 무렵까지 쭉 목동에 살았고, 동네에 남아 있던 오랜 죽마고우와 홍대에, 그 시절엔 홍대에 들르는 누구라도 들를 법한 그 노래방에 온 거였다.
우리 역시 그 뻔한 노래방 코스를 막 마친 뒤였고, 동행이었던 나의 고등학교 동창 진아는 옆방 유리창 안을 유심히 들여다봄으로써ㅡ그리 친하지는 않았던ㅡ중학교 동창과 재회했다.
그길로 노래방을 나선 우리는 기억도 나지 않는 어느 주점에서 잡탕 같은 안주에 소주를 마시는 데 한창이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아까 잠깐 인사를 나누었던 그 동갑내기들로부터 연락이 왔다. 뭐하냐고, 이쪽으로 오겠다는 거였다.
이미 꽤 취해 있었던 나는 그애들이 언제 와서 앉아있었는지도 모를 정신으로 연신 건배만을 외쳤다. 곧 코가 삐뚤어지도록 취해 버렸다. 그애들은 오늘이 ‘클럽데이’라며 클럽에 갈 거라 했고, 나도 따라가고 싶었다. 우리 넷은 그렇게 클럽에 갔다.
뭐지? 줄까지 서서 클럽에 들어서니 눈이 부신 조명에, 음악에, 가득 찬 사람들에. 여태 꾹 참았던 술기운이 한꺼번에 올라와 토할 것만 같았다. 결국 입장한 지 오 분도 못 되어 뛰쳐나왔다. 그리곤 최악이지만 실제로 토했다.
일행들이 내 가방에서 휴대폰을 찾아 우리 엄마에게 연락을 했다. 그리고 인사불성이 된 나를 부축해 엄마를 접선키로 한 홍대 정문으로 향했다. 걸어가면서도 나는 계속해서 토했고 주정을 했다. 대학에 가고 처음 사귄 남자친구에게 실연을 당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였다. 솔직히 말하면 소주를 끝까지 마시고 이 꼴을 볼 작정으로 친구를 만난 날이었고 노래방에서부터, 같이 술을 마시고, 심지어 토까지 하면서도 내 꼴이 어떻든, 그애들이 누구던, 누구의 신상도 걱정할 여력은 없었다.
얼마 뒤 엄마가 홍대 거리 한복판에 새빨간 구식 아반떼를 끌고 나타났다. 나는 뒷자리에 환자처럼 눕혀진 채 집으로 실려갔다. 그게 우리들의 첫 만남이었다.
내 친구는 곧장 집으로 돌아갔다고 하고. 그애들은 아마 우리를 보내고 다시 클럽에 기어 들어갔든지, 잘 모르겠다.
다음 날 오후가 되어서야 잠에서 깬 나는 두 개의 문자를 받았다. 하나는 진아의 중학교 동창이라는 친구로부터, 또 하나는 그 친구의 '친구'로부터 온 거였다.
하긴. 그렇게 진상을 떨고 사라졌으니 연락이 올 법도 하지. 술이 깨 낯 뜨거운 기분으로 문자를 확인했다.
두 사람의 문자가 너무나 달랐다. 한 사람은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 주는 듯했고, 나머지 하나는 누가 봐도 어제 진 신세를 갚으라고 독촉하는 사람의 태도였다. 신세를 갚으라는 사람에게는 신세를 갚으러 나갔고 걱정해 준 사람을 만나서는 되려 밥을 얻어 먹었다. 기억난다. 가본 적도 없는 비싼 회전초밥집이었다. 그애는 집이 꽤 부자였다.
어제 본 얼굴들이 잘 기억나지 않아 만나는 데 애를 먹었다. 토까지 한 사이인데.
기억하는 건 내 친구의 친구의 '친구'라는 아이의 조금 과한 힙합 패션과 뽀글대는 아줌마 파마 정도였고, 굳이 평하자면 별로라고 생각했었다.
그렇게 한 번을 만나고, 또 한 번, 계속해서 여름 밤을 함께 걸었다. 그애의 둥근 옆모습에도 익숙해져 갔다. 촌스럽던 파마 머리가 점점 복스럽게 느껴졌고 특별할 것 없는 외모에서도 끝내 매력을 찾아내고 말았다. 무엇보다 그애는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미국에 여자친구도 있다며 사진을 보여주었다. 노란 머리. 미국 사람이었다. 전혀 어울리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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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끝이 날 것 같지 않던 그 해 여름도 끝나가고 있었다. '친구'가 떠날 날짜도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는 그런 헤어짐을 미리 아쉬워해서는 안 되는 쿨한 사이였다. 적어도 그애는 그랬고 나도 내색하지 않았다.
그애가 떠나기 전날 밤, 역시 약속은 하지 않고 집 앞으로 가 있었다. '너네 집 앞인데.' 다 와서 연락을 했다. 인싸 중의 인싸였던 아이가 전날 밤을 그냥 보낼 리 없었다. 집이 아니어서였는지 오는데 한참이 걸렸다. 우리는 어색한 작별 인사를 했다. 내가 갑자기 찾아왔기 때문에, 쿨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또 보자는 말을 하고 악수를 청하던 그애가 무심결에, 나를 끌어당겼다. 애매한 포옹인지, 그애가 좋아하던 힙합 제스추어인지 모를, 마지막 인사였다. 물론 그 때의 나는 그 애매한 인사를 또 만나고 싶다는 마음의 표현이라 믿었다. 애당초 서로 다른 종류의 사람이었다.
9월, 그애가 떠나고 한 달이 지나 나도 미국 땅을 밟았다. 카톡도 없던 시절, 82가 아닌 1로 시작하는 휴대폰을 개통한다는 것은 그애와 다시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걸 의미했다. 한국어 자판이 없어 고심한 영어로 문자를 보냈다. 답장은 거의 단 한 번도 곧장 날아온 적이 없었다. 내용도 시시했다. Sorry. I had a rough day. 늦은 답장의 이유였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거였다. 그 애는 무려 대학 첫 학기, 모든 것이 새롭고 신나는 날들을 보내고 있었겠고 나는, 이제 막 도착한 타국의 낯선 땅에서 고독만 씹고 있었으니까.
그 무렵 내게 회전초밥을 사주었던 친구는 한국에서 재수를 시작했고, 이따금 본인이 즐겨 듣던 mp3 확장자의 음악 파일을 메일로 보내주곤 했다.
딱 열 네 곡이 들어가던 128메가바이트 엠피쓰리에 앨범 하나를 용케 우겨 넣고 다녔다. 낯선 곳에서 그리운 고국의 팝송을 지겨워지도록 듣고 또 듣고, 걷고 또 걸으며 외로움을 달랬다. 고마웠다.
고마운 건 언제나 그쪽이었다. 설렘은 이 쪽. 서러움도 늘 이쪽이었다. 분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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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의 여름. 학기를 마치고 쉬고 있던 나는 그애가 다닌다는 학교가 있는 시카고로 무작정 날아갔다. 이번에도 미리 연락은 하지 않았다. 늦은 밤, 공항에 내려서야 문자를 보냈다. 왔다고.
늦은 답장이 도착했다. "왔다구?"
응. 왔다구.
시간이 있는지를 물었다. 너를 보러 왔다고는 하지 않았다. 그애의 대답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나는 시험기간이라 여자친구랑 같이 있어. 어쩌지? 재밌게 놀다 가!" 이번에는 한국인 여자친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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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행은 미국에서의 모든 여행 가운데 최악이었다. 6월이었는데도 10도를 밑도는 추운 날씨에, 반바지를 입고, 위에 걸칠 옷 한 벌도 챙겨가지 않은 채 작은 가방 하나만 매고 내렸으니 말이다. 공항에 도착해서야 지도를 하나 샀고, 카메라도 가져가지 않아 근처의 cvs에서 일회용 필름 카메라를 구입해 사용했다. 낡은 호스텔의 6인실 방에는 나오는 날까지 아무도 들어오지 않아 매일 밤 으스스 어둠이 무서웠고 무거운 창문은 잘 닫히지도 않아 덜덜 떨며 잠을 청했다. 예정에 없던 관광을, 계획한 것처럼 한다는 것부터 무리가 있었다.
묘한 것은 어쩌면 나는 그 애를 만나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크게 놀라지도 많이 슬프지도 않았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나는 그냥, 무작정 발길이 향하는 곳, 그 끝에 늘 서 있었을 뿐이었는지 몰랐다. 어디로 가야할 지를 몰라서. 누구라도 내가 가야할 곳을 정해주기를 바라며 늘 누군가를 애타게 의지했는지도 몰랐다.
여름. 채 식지 않은 밤 공기가 습하고 무더울 때면 나는 집을 나와 어디로든 걷지 않으면 안 되었다. 늘 가슴 속에 뜨거운 그 무엇이 있어, 아무리해도 담담해지지가 않았다. 피곤할 때까지 걷고 또 걷고, 정신을 잃을 때까지 마심으로써 어떻게든 그 밤을 넘겨야만 했다. 그 걸음 끝에 누군가 있어 나를 멈추고 맞아주기를 바랐지만 애써 누군가를 세워 둔 후에는 또 다른 방향으로만 걷고 싶어졌다.
일 년이 더 지난 여름, 한국에서 우리는 다시 만났다. 이번에는 나도 남아있던 감정을 깔끔하게 덜어낸 뒤였다. 성공적인 재수를 마치고 대학에 들어간 친구와 함께, 셋이서, 오목교에 있는 삼겹살 집에서 술과 고기를 먹었다.
나는 그 사이 또 한번의 치열한 실연을 했고 또 다시 주위 사람들을 의식할 여력도 없이 이번에도 인사불성이 되도록 취하고 말았다. 다행히 집은 가까워 걸어서 갔다.
또다시 일년이 지나고, 여름방학을 맞아 귀국한 친구는 그 해에 군대에 갔다.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도 아직 열기가 채 식지 않은, 여름밤이었다. 어느새 나는 꽤 안정되어 있었다.
만나자던 그애는 어김없이 나를 기다리게 했다. 헬스장에서 막 나오는 길이라 했다. 헬스장 다음 일정이라니. 그런 대접이 분하거나 서럽지는 않았다. 그 날 그애는 걷는 대신 운전을 해서 나를 데려다 주었다.
나는, 걷는 편이 좋았다. 여름밤은 더이상 설레지 않았다.
그애는 전방 중에서도 최전방인 강원도의 두메산골로 배치를 받았고 나는 초코파이와 수면 양말을 보내주었다.
군을 제대하고 미국으로 돌아간 친구는 학교를 마치고 뉴욕에서 직장을 얻어 꽤 오랜 시간 생활했고 더 이상 예전처럼 긴 여름방학을 얻어 꼬박꼬박 돌아올 수는 없었다. 일 년에 딱 한 번, 우리 엄마 생일과 붙어 있는 그애의 생일에 축하한다는 말을 전하는 것이 관계의 전부였다. 안부를 묻고, 어색한 몇 마디를 주고받으며 아주 가끔은, 스무 살의 여름에 남아 있는 서로의 기억을 공유한 적도 있었다. 그 애는 알고 있었을까? 쿨하지 못했던 나의 마음을.
그 친구가 작년 즈음 결혼을 했다. 나도 초대를 받았다. 무슨 자격인지 물으면 얄궃은 유치원 동창의 자격이 전부지만. 주원이와 남편까지 데리고 오라는 말에 정말로 가서 축하해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전날에 급한 일이 생겨 가지 못했고 그렇게, 길고 가늘게 나누었던 우정에 허무한 종지부를 찍었다. 쓸만한 결혼선물이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무려 유치원 동창이 보내는 선물이라니 모양이 이상한 것 같아 그마저도 그만두었다. 굳이 나까지 축하해주지 않아도 아마 무수히 많은 축복 속에서 잘 살고 있을 테다. 행복하기를 바란다.
이제 다시는, 살아가며 만날 수 없는 인연이라도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한다. 별 볼일 없던 내 흐릿한 청춘에, 아주 잠깐이라도 반짝이는 순간이 있었다면 누군가를 순수하게, 정말 순수하게 좋아할 수 있었던 그 마음이 아니었을까? 지금은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다.
스무 살의 여름을 함께 걸어 준 친구에게 감사한다. 즐거운 날들이었다.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클럽 구경을 시켜준 것도 감사한다. 그게 어디였는지 기억도 안 나지만.
청춘이라는 이유로 함부로 사랑하고 저버렸던 인연들에게도 사과를 전하고 싶다. 너무 바보같았다고. 너무 모르는 게 많았다고. 변명해도 달라지는 건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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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는 푸른 자연을 배경으로 청춘을 아름답게 그려냈지만 내 현실은 그만큼 아름답지 않았다. 기껏해야 술집이나 길거리를 배경으로 걷거나 마신 것이 내 청춘의 전부이다. 아름답지도, 치열하지도 못했던 의미 없는 젊음에 남아 있는 건, 오고 간 사람들과 주고 받은 마음 뿐. 그러니까 청춘은 그 자체로 큰 의미였다. 목적 없이 걷고 까닭없이 사랑할 수 있었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