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소위 "좌빨"이 되었는가

새벽길을 걸으며 회고하는 나의 청소년기

by 진성민

나는 왜 소위 "좌빨"이 되었는가?


요즘 페북에서 내게 뻐겅이 새끼라는 등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온갖 욕설과 저주를 퍼붓던 몇몇을 보면서 오늘 마침 조용한 시간에 내 과거와, 앞으로의 걸음걸이를 생각해본다.


시작은 내가 농민, 노동자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 북한산 자락에서 땅 한 평없이 몸뚱이만으로 다섯 자식을 먹여 살려야 했던 가난한 농민이자 노동자가 내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나도 행복할 때가 많았다. 두 남동생들과 집 앞 개울에서 수영하고 물고기잡을 때도, 한겨울이면 리어카에 싣고 온 동네를 돌아다니던 동태 장수에게서 두어 마리 사서 어머니께서 끓여 주시던 동태찌게를 모두 둘러앉아 먹을 때도, 부엌 아궁이 앞에 앉아 고구마가 익기를 기다리며 누나와 빨간 불꽃을 바라보던 것도 행복했다. 친구들과 늦게까지 공차다 휘영청 백운대위로 떠오르던 달을 한참 바라보다, 새소년 같은 잡지에서 광고하던 천체망원경을 사고 싶다고 어머니를 조르기도 하고, 밤이면 누나가 듣던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를 들으며 그 음악에 스스르 잠들기도 하던, 그저 책읽고 일기쓰기 좋아하고, 그 덕분에 백일장같은데서 상도 가끔 타던 시골 순박한 어린애였다.


중학교 올라오니 많은 게 바뀌었다. 내가 다닌 중고등학교는 지금 생각해보니 중산층과 서민 자녀가 많은 곳이었지만 부유층 자녀도 많았고 그에 비해 나는 그들에 비하면 빈민이었던 것. 나는 그때는 전혀 그런 걸 몰랐다. 경제기획원 총리의 손자, 효성그룹 임원 아들, 농림부 차관 아들 등 친구집에 놀러가면 TV에서나 나오는 집들이 실제로 그 친구들 집이었다. 나는 감탄하고 부러웠지만 내 현실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쟤네들 만큼은 못해도 열심히 살아보자 라고.


그러나 친구들이 독서실에서 시험공부할 때 나는 못줄잡고, 피뽑고, 풀베고, 추수하는 것 도와드리고, 지게질도 하고, 겨울에는 아버지 옆에 서서 새끼줄 꼬으시는데 짚 집어드리며 서서 생각하곤 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공부는 해야 하는데. 나는 잠부터 줄였다. (고딩 친구들아, 니들이 나를 잠스라고 별명을 붙이게 된 건 다 이런 속사정이 있었다구.^^)


어느 날, 제사가 있어서 아버지와 두 남동생과 나란히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음식을 어머니께 받아서 날라주던 큰 누나가 갑자기 코피를 흘리기 시작했다. 그래봐야 누나도 열 대여섯 쯤 되었을까. 없는 집 맏이들이 당시 많이 그랬듯이 큰 누나도 중학교 안가고 삼립식품에서 일하고 기숙사에서 지내고 있었는데,그날 제사라고 특별히 남은 빵을 집에 바리바리 싸들고 온 터였다. 제사상 옆에 급히 뉘이고 코피를 막아 보았지만, 목구멍으로 계속 꿀꺽꿀꺽 코피가 넘어가는 소리가 내 귀에도 들렸다. 누운채 코피를 마시던 어린 누나의 하얗게 여윈 얼굴. 나는 지금도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리고 누나를 애써 외면하며 제사상을 응시하던 초로의 아버지의 옆 얼굴 표정을 잊지 못한다...


저녁에 아버지를 등목시켜 드릴 때마다 그 굳은 살 투성이인 어깨와 등을 보며 속으로 많이 울었다. 가을걷이 끝나면 다 정산하고도 빚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반복되는 현실에 답답했다. 나는 이 상황을 개선하고 싶었고 부모님께 도움이 되고 싶었으나,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안되는 제도와 사회적 합의들에 부당함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책도 많이 읽었다. 방법을 찾고 싶었다. 고3이 되어 생각했다. 실질적 힘을 갖고 사회를 개선할 수 있어야 하니 사회학 정치학 이런 것 대신 경제학과를 가자. 재경부문에서 일하면서 경제정책의 수립과 집행을 통해 실질적 개선을 해보자.


나는 어찌어찌 힘든 고3을 마치고 점수에 맞춰 경제학과에 진학했다. 막상 행시 재경 파트를 준비하려면 내 경제상황과 집안 여건으로는 턱없는 일이었음을 곧 깨달았고, 시위와 편집부 활동, 과외를 병행하던 나의 학점도 좋지 않았다. 나는 방향을 수정했다. 그럼 통화정책을 통해서라도 해보자. 그렇지만 한국은행 입사원서는 서강대에는 서울대의 반의 반도 안되는 열 다섯 장 뿐. 내가 다니던 단과대인 경상대 학부 대학원 합쳐서 600여명 넘는 졸업예정자 중 내 학점으로는 원서조차 받을 수 없었다.


나는 다시 방향을 수정해야 했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라는 말을 나는 너무 싫어했지만, 내가 못 치울거라면 나는 사람들이 똥을 밟지 않도록 길을 넓히거나 새 길을 내는데 기여하자.

세계로의 경제영토 확장을 주창하던 고 김우중 대우 회장의 기치에 공감이 갔다. 그럼 나는 제조업에서 해외영업을 해서 달러를 벌어들이자. 그게 내가 국가에 기여하는 일이 될 수 있겠다. 그렇게 해서 나는 대우에서 컬러TV를 수출하는 업무를 시작으로 근 30년 제조업 해외영업을 해왔는데.


그 사이 많은 것들을 놓친 것 같다. 내가 애초에 꿈꿨던 세상의 모습이 이뤄지고 있는지 가끔 돌아보고 방향수정하고, 필요한 사람들을 챙기고, 측면 지원하고, 이런 일들에 무심했던 것 같다. 나는 할만큼 했으니 이제는 당신들이 좀 해봐요...마치 이런 태도?

그러는 새 먹고 살 만한 사람들의 관심은 "부자 되세요~"라는 천박한 정치꾼에 속아 한없는 탐욕으로 변질됐고, 신자유주의의 고삐풀린 발굽이 전 세계를 휘저어 놓았고, 법기술자들의 부패한 카르텔이 길위에 놓인 똥 수준이 아니라 가슴을 겨눈 총구가 되어 부활해 버렸다.


나도 가만히 있으면 둘이서 30년 일했으니 늙어 죽을지언정 굶어죽지는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아직도 옆을 보면, 내 형제 자매들과 내 이웃들을 보면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지금의 현실은 분명 지속가능하지 않다고 느낀다. 애들한테 이 상황을 감내하라고 혹은 너희들이 개선하라고 말할 수는 없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행복을 꿈꾼다. 그건 당연히 존중받을 일이다.그러나 누구는 다같이 행복한 걸 행복이라고 느낀다. 후자의 사람들을 전자의 사람들이 억압하면 그것은 정글이 되고 지옥이 된다.


내가 이재명 대표의 이 소년공 사진을 본 건 몇년 전이었다. 그전까지는 그저 자수성가한 유능한 행정가, 옳은 일을 하는 변호사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이 사진을 보는 순간, 나는 옛날 큰누이가 누워서 목으로 넘기던 코피넘어가던 소리, 무거운 마늘자루와 기왓장을 지게에 싣고 원효암 산길을 오르던 내 소년 시절의 모습을 떠올렸다. 소년공의 삶과, 프레스에 눌려 영구장애를 입은 굽은 팔, 극우테러범의 습격에 쓰러졌을 때 모습까지 이 사진들은 내게는 남다른 생각을 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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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나는 이 분의 살아온 길을 자세히 살펴 보았고, 다른 이들이 이분에 대하여 하는 말들을 많이 들어보았고, 이분이 스스로 말하는 것들을 많이 들어 보았고, 이분이 겪는 현재의 일들을 다 지켜 보았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내가 제일 싫어하는 이 말에 동의하는 이 분, 목에 칼이 들어왔어도 제 갈길을 가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곧 하늘 무서운 줄 아는 사람, 나는 내 과거의 경험이 이분을 통하여 꿈으로 실현될 수 있다고 믿게 됐다. 그것이 내가 피 색깔과 같은 "좌빨"이 기꺼이 되기로 한 이유이다.

그럼 앞으로는? 무엇을 어떻게?


그냥 지금처럼 살자. 다만, 정의가, 공의가 반드시 내 살아 생전 이뤄지기를 기대하진 말 것. 그냥 69년 생 싸움닭으로 살다 가자. (첫 직장의 옆자리 선배님이시던) 박수정 선배님이 해주신 말씀입니다^^


註) 2024년 12월 30일자 내 페이스북에 썼던 글이다. (https://www.facebook.com/share/p/1D2V91T51i/) 어젯밤 자기 전에 술 취한 고등학교 친구 하나가 잠들려는 내게 귀가길에 전화를 해서는 한참을 이런 저런 얘기를 하는데, 그가 추억하는 나의 모습은, "절대로 허튼 소리는 안하던 애" 였다고 하네...그에게 기억되는 내 모습은, 그러나 불행하게도 일부 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출처도 알 수 없는 비속어, "뻐겅이" (아마도 빨갱이라고 욕하려고 하다가 오타가 난 듯 하다.) 혹은 "좌익빨갱이"를 뜻하는 "좌빨"로 불리기에 족한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청소년기에 이미 내 삶의 방향성을 설정하는데 큰 영향을 미친 것들을 아직도 조금씩 보완, 수정해 가면서 살고 있기 때문에, 그런 비난에도 결코 동요하지 않는다. 같이 사는 사회를 꿈꾸는 것이 빨갱이라면 그런 욕은 죽을 때까지 먹어도 괜찮다.


나는 표지사진처럼 지금도 길거리에서 리어카를 끌고 폐지를 주우시는 노인들을 보면 마음이 너무 안좋다. 내가 해드릴 수 있는 것도 없고, 그런 개인적 도움이 이런 문제들을 초래하는 구조적 모순들과, 경제적 불평등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이 쫌 살자" 라는 생각은 떠나지 않는다. 이런 나를 "좌빨" 이라고 비난한다면, 나는 안도현 시인의 싯구를 들려주고 싶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새벽길을 걸으며, 이 시간에도 붉게 타는 내 마음, 빛이 밝아오는 저 하늘을 우러러본다. (사진은 예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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