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레즈 라캥, 에밀 졸라, 1868
한 인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누군가 너는 누구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나는 이름과 나이 같은 신상에 대해 죽 나열할 것이다. 묻는 이가 그보다 더 깊은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른다면, 나는 나의 꿈과 이상에 대해서,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과 불행하게 하는 것에 대해서 논할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 진정한 너는 누구냐고 재차 묻는다면, 나는 어리둥절할 것이 분명하다. 꼭 대답해야 한다고 나를 압박하면, 아마도 나는 나름 선량하게 살려고 노력한다는 나의 도덕성이나, 불운했다고 단순하게 표현할 수 있는 나의 가정사와, 그럼에도 이런 성격의 사람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기질과 환경이 전부가 아닌가?
<<테레즈 라캥>>은 에밀 졸라의 대표적인 자연주의 작품이다. 불륜과 살인이라는 자극적인 소재를 담고 있어, 비슷한 소재를 가지고 곤혹을 치렀던 다른 작가들처럼 당대 비평가들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들었다. 2판의 서문에서 졸라는 이 글을 쓸 때 자신이 다룬 것은 도덕이 아니라 인간의 기질temperament이라고 말한다. 자기는 의사가 인간의 육체를 해부하듯 인간의 기질을 해부하며 글을 쓴 것이라고. 테레즈와 로랑은 인물이라기보다 기질 그 자체라고.
미국 문학 전공수업에서 미국의 대표적 자연주의 소설들을 몇 편 읽었기 때문에, 나는 방심했다. <<테레즈 라캥>>도 비슷하겠지, 으레 생각했기 때문이다.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왜 이 시대에 프랭크 노리스의 <<맥티그>>는 전공자들만 읽고, 에밀 졸라의 <<테레즈 라캥>>은 모두가 읽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졸라가 이 소설을 쓸 때의 목적이 어땠든지 간에, 이 소설은 단순히 기질과 환경이 한 인물에게 끼치는 영향을 해부하는 소설만은 아니다. 테레즈와 로랑은 말 그대로 소설 안에서 펄떡거리며 몸부림친다. 나는 새장에 갇혀서 조금씩 독약을 들이키는 작은 새 두 마리를 보는 것 같아 소설을 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테레즈는 어릴 때 고모의 손에 맡겨져서 자란다. 고모의 집에는 아픈 사촌 카미유가 있다. 카미유가 먹는 약들을 같이 먹어주고, 카미유가 앓아누워있는 침대맡을 지키면서 테레즈는 어린 시절을 보낸다. 그리고 그 사촌과 결혼을 한다. 이것만으로도 너무 끔찍한데, 파리로 이사를 가서 더럽고 좁은 아케이드에 위치한 작은 가게에 갇혀 지내게 된다. 테레즈의 삶은 이것으로 결정된 것 같다.
작가는 이런 극한 환경에서 어떠한 기질, 그러니까 테레즈가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불같은 욕망과 자유에 대한 갈망과 같은 기질이 어떻게 발현되는지를, 감정이 담기지 않은 것 같기에 더 차갑게 느껴지는 시선으로 그려나간다.
The cloistered life that she led and the debilitating regime to which she was subjected were not able to weaken her tough, resilient frame, but her face had taken on a pale, slightly yellowish complexion and when the light was low she could look almost ugly.
그녀가 살아온 고립된 삶과 그녀를 짓눌러온 억압적인 환경도 그녀의 강인한 육체를 꺾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고 약간 누르스름한 빛을 띠게 되었고, 빛이 낮을 때면 거의 추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녀는 자주 무덤에 갇힌 것 같이 느끼고, 얼어붙는다. 그리고 로랑을 만났을 때, 그녀는 피를 끓어오르게 하는 정욕 속에서 처음으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다.
졸라는 테레즈와 로랑의 동물적인 기질에만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 기질이 그들의 육체에서는 어떻게 발현이 되는지를 묘사했기 때문에, 그들의 파국은 자연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하지만 나는 자주 운명을 생각했다. 두 사람은 마치 처음부터 같은 파국을 향해 설계된 것처럼 운명적이다. 그들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두려움을 느끼고, 같은 의도를 갖는다. 그들이 서로에 대한 증오와 두려움으로 깊은 협곡을 사이에 두고 멀어질 때에조차 그들은 공동 운명체로,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이 서로에게 얽혀버린 채로 죽음에 이른다. 나는 심지어 낭만적이기까지 하다고 느꼈다. 내가 오래 꿈꿔왔던 이상적인 사랑과 성애의 가장 어둡고 추악한 버전이 아닐까. 이들에게 자유의지라고는 없다. 최소한의 인간성인 양심마저 이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유의지가 허락되지 않은 인간의 운명. 그 최악의 실험이 이 소설인 것 같았다.
이제 이 어두운 소설에서 눈을 떼고 나를 들여다보면, 우리를 돌아보면, 우리는 이들과 얼마나 다를까? 우리는 진정으로 기질과 환경이라는 운명을 우리의 의지로 이겨내고 있을까?
나는 나의 고통의 근원이자 영원한 숙제인 엄마를 떠올릴 때마다, 그녀에게 무한히 감사하는 마음을 동시에 느낀다. 엄마는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나를 가르쳤기 때문이다. 내가 더 좋은 교육을 받고, 더 좋은 환경에서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 과정에서 엄마와 나의 유대를 거의 끊을 뻔하면서까지, 정말 최선을 다해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생각할 수 있었다. 내게 벌어진 일들에 대해서,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에 대해서, 나라는 사람에 대해서 나는 끊임없이 생각할 수 있었다. 그 힘의 8할은 교육에서 온 것임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나에게 선천적인 의지가 있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나는 의지를 교육에서 배웠다. 테레즈와 로랑이 의지를 배울 수 있었더라면, 도덕과 윤리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었더라면, 그들은 이렇게 처참하게 죽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의 세상은 점점 작아지고 있다. 언제든, 어디서든,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다 알 수 있다는 것은 환상에 가깝다. 정작 우리의 하루를 채우는 것은 알고리즘이 선택해준 영상들과 사실처럼 포장된 의견들, 내 주변의 사람들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우리는 점점 더 많이 다른 어떤 힘에 의지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우리의 의지를 돌보고 가꾸지 않으면 말이다. 넋 놓고 있다가 어느 순간, 두 사람처럼 허옇게 질린 눈으로 카미유의 유령을 마주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