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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일걸즈 Oct 22. 2020

인도행 야간열차

Part 1. 레벨 1의 여행자

우다이푸르는 분명 신혼 여행지로 유명하다고 했는데. 여름만 되면 온 도시가 날파리로 뒤덮인다는 걸 신혼부부들은 알까. 시야를 덮은 날파리 떼에 눈을 겨우 뜨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추울 때 쓰려고 가져온 스카프로 코와 입을 꽁꽁 싸맨 채 거리를 걷는 중이었다. 내 노란 배낭은 파리로 덮여 색깔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지나가는 인도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내 가방을 가리켰다. 날파리가 제일 좋아하는 색깔이 노란색인 거 몰라? 주위를 빠르게 둘러보니 거리의 노란색이라곤 내 배낭 밖에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울상을 지으며 대답했다. 몰랐지, 그걸 내가 알 리가 있나.


하얀 호수의 도시 우다이푸르는 어딘가로 사라지고 잿빛 도시만 남았다. 여행자들은 물론이거니와 현지인들도 손을 이리저리 휘저으며 걷고 있었다. 나는 날파리떼가 등장한 첫날 사색이 되어 숙소로 꽁지 빠지게 도망치던 내 모습을 떠올렸다. 10초에 한 번씩 속눈썹에 파리가 달라붙을 때마다 등 뒤로 소름이 오싹 돋았지만, 호들갑 떠지 않는 나 자신을 대견하게 여기기로 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성지윤



GERMAN BAKERY


German Bakery. 인도의 이곳저곳에는 이런 식의 ‘독일 빵집’이 있었다. 커피를 파는 빵집을 찾기 힘든 이곳에서 초코 크림이나 잼이 들어간 빵을 먹을 수 있는 ‘독일 빵집’은 내 여행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곤 했다. 비록 인도의 ‘German Bakery’와 후에 가게 된 독일의 진짜 ‘German’ 베이커리의 공통점을 찾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빵집은 좁은 골목 사이에 있었다. 우다이푸르의 흰 건물들은 해가 내리쬘 때 가장 예쁘게 반짝였는데, 그 골목 역시 그랬다. 나는 'ice' 글자가 앞에 붙은 음료와 초코볼을 시키고 소파가 있는 안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창문이 있어야 할 곳들은 모두 뻥 뚫려 있어 오토바이 엔진 소리가 수시로 들려왔다. 창문 없는 창가 자리에 앉아서 거리의 사람들을 생생히 관찰할 수도 있었다. 야외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는 키가 큰 백발의 노부부가 앉아있었고 내 오른쪽 자리엔 헤드폰을 낀 곱슬머리 청년이 책을 읽고 있었다. 나는 음료가 나오길 기다리며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카페 내부에서는 온갖 언어로 뭉쳐진 대화가 오갔다. 그곳에 있는 인도 사람이라고는 빵과 커피를 파는 직원뿐이었다.


포크로 초코볼을 살짝 쪼개 입에 넣었다. 초코파이를 꾸덕하게 뭉친 맛이 났다. 한국에서 가끔 가던 도넛 가게의 부드러운 초코볼을 생각했는데. 나는 퍽퍽한 초코볼을 입에서 열심히 으깨며 음료를 마셨다. 음료 역시 미적지근했다. 인도의 아이스 음료는 차갑지 않다는 게 막 생각난 참이었다.


가방에서 공작새, 코끼리, 낙타가 화려하게 그려진 엽서를 꺼냈다. 호스텔 앞에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에게서 산 엽서이자, 한국의 이들에게 보내질 엽서이기도 했다. 나는 이어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꺼냈다. 여행에 챙겨 온 세 권의 책 중 가장 두껍고 무거웠다. 몇 번이고 다시 읽을 만큼 소중한 책이었지만 날갯죽지 근육통의 대표적 원인이기도 해, 길바닥에 버리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는 접어둔 페이지를 펼치고 밑줄 친 부분을 찾아내 조용히 소리 내어 읽어보았다.



_그레고리우스는 식당차에 앉아 창밖으로 펼쳐지는 환한 초봄을 내다보았다. 그때 갑자기, 자신이 진짜로 여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잠들지 못하는 밤에 생각해낸, 있을 법한 가능성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었다. 그가 지금 이 순간 경험하는 것들, 즉 기차가 움직이는 소리, 약한 기적 소리, 옆의 식탁에서 컵들이 열차의 진동에 따라 떨리는 소리, 부엌에서 나는 오래된 기름 냄새, 요리사가 이따금 뿜어내는 담배 냄새, 이것들은 모호한 가능성이라거나 현실화된 가능성이 아니라 실제였다.

그레고리우스는 빈 접시와 김이 올라오는 커피 잔을 앞에 두고 앉아 지금이 자기 인생에서 가장 확실하게 깨어 있는 순간임을 절감했다. 천천히 잠을 떨치고 의식이 완전히 들 때까지 조금씩 잠에서 깨어나는 그런 명료함이 아니었다. 지금 이 느낌은 아주 달랐다. 이제껏 몰랐던 세상에 있다는 각성, 전혀 이질적인 눈뜸이었다.



고개를 들어 창 밖을 바라보았다. 거리로 드나드는 햇빛을 보며 ‘깨어 있는 순간’이라는 주인공의 표현을 되뇌었다. 글자를 하나하나 곱씹어 생각하다 엽서를 쓰기 위해 펜을 쥐었다. 노트와 필통을 꺼내 자리를 한 번 정돈하고는 숨을 한 번 들이켰다. 그리고 엽서 끄트머리에 이름을 적었다.



르네에게


안녕 르네야. 여기 인도는 일요일 점심이야. 그곳 한국에서 너는 열심히 커피를 내리고 있겠다. 나는 지금 우다이푸르의 작은 골목 카페에 앉아있어. 밖으로는 사리를 입은 인도 여성들이 지나다니고 이 카페는 여행자들로 가득 차 새로운 목소리들과 언어가 한데 섞여 들려와.

나는 한국에서 했던 수많은 걱정보다는 여행을 잘하고 있는 것 같아. 길거리를 아무렇지 않게 걸어 다니는 소와, 호기심 가득 섞인 시선과, 바닥에 널브러진 들개들이 보다 익숙해진 걸 보면 말이야. 예전부터 난 늘 들뜨고 설레기만 하는 여행자였는데 이번엔 조금 다른 느낌이야. 조금 더 차분히 사람을 만나고 덤덤하게 헤어지고 있달까. (내가 얼마나 쉽게 마음을 주고 눈물 콧물로 헤어지는 사람인지 너는 알고 있지.) 이렇게 내가 조금씩 단단해지고 있는 거라면 좋겠다.



퍽퍽한 초코볼은 결국 다 먹지 못했다. 나는 남은 음료를 재빨리 들이키고 가방에 소지품을 챙겨 넣었다. 카페 안에서 보는 거리는 평화로워 보였지만 여전히 날파리로 뒤덮여 있을 것이 분명했다. 안타깝게도 벌레들이 좋아한다는 내 노란 가방을 가릴 만한 천 같은 건 갖고 있지 않았다. 빛바랜 스카프로 얼굴을 둘러싸고 비장하게 밖으로 나섰다. 우다이푸르의 여름 같은 겨울 햇살을 느낄 수 있다는 걸 행운이라 생각하기로 하며.


거리를 걸으며 주인공 그레고리우스가 말한 '이질적인 눈뜸'을 생각했다. 이곳에 도착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았음에도 계속해서 다시 돌아올 것 같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나는 인도에 있었지만 계속해서 인도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레고리우스가 어느 날 갑자기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탔던 것처럼, 그렇게.


©성지윤


글 옥의진(유랑), 사진 성지윤(찌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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