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 정성껏 슬퍼하고 그리워하자. 그래야 걷는 혼자 걷는 그 길이 그나마 덜 외로울 테니.
잘 입던 바지가 있었는데 무릎이 헤져 버리게 되었다. 너무 아쉬웠다. 그 때의 감정으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그 바지가 뭐라고. 심지어 지금은 그 바지가 어떤 바지였는지 생각 나지도 않는다. 하지만 매번 입을 때 마다 잘 맞아 내 기분을 좋게 만들어 줬던 것 같다.
"호상이라 하지 마라." 오랫동안 가슴에 품고 있던 문구였다. 한 장례식장에서 호상이라는 단어를 처음 듣게 되었는데 꽤 충격을 받았다. "좋음"과 "죽음"은 함께 공존 할 수 있는 단어였던가. 병상에 오래 누워있던 부모가 돌아가시게 되었고 오랫동안 부모를 돌보던 자식이 있었을 것이다. 그 기간이 길수록 아마 자식들은 더힘들었을것이고장례식장에서 위로차 건넨말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좋은 죽음이라니. 세상을 먼저 뜬 부모가 그 말을 들으면 얼마나 서운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부모도 어린 아이들과 같고, 청소년과 같으며, 현재를 살아가는 젊은 우리들과 같다. 나이가 들고 몸이 약해진, 스냅샷으로 찍은 현재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누군가의 소중한 자식에서 부모가 되기까지 파노라마처럼 긴 삶 자체가 우리 부모들의 현재이다.
우리를 낳고 세상에서 제일 기뻤을 것이고, 입에 먹을 것을 넣지 않아도 배고프지 않았을 것이다. 자연스레 자신보다 우리가 먼저 였을 것이고, 그것이 가장 큰 기쁨이라는 핑계로 자신의 삶은 자식의 그림자에 우겨 넣었을 것이다. 열이 많이 난 밤 힘 없이 눈만 겨우 뜨고 있는 우리보다 더 힘들었을 것이고, 나에게 해가 되는 무엇가의 앞에서는 이 세상 가장 용맹한 전사로 나를 지켰을 것이다.
얼마나 무서우실까. 죽음의 터널을 혼자 걸어간다는 것은 얼마나 쓸쓸한 일일까.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을 제쳐 두고 오롯히 나 혼자여야 한다는 사실은 얼마나 받아들이기 힘들까. 인터넷의 정보로 인공위성도 만들 수 있는 시대지만, 그 방대한 인터넷에도 없는 '죽음'은 얼마나 당신을 불안하게 만들까.
그러니 정성껏 슬퍼하고 그리워하자. 그래야 혼자 걷는 그 길이 그나마 덜 외로울 테니.
<당신의 삶은 몇 인분 입니까>는 과거에 제가 썼던 짧은 글들을 현재의 생각으로 재해석하여독자분들과 공유하고, 공감하는 매거진입니다. 생각을 나누고자 하는 의미도 큽니다. 하지만 더 큰 목적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명칭 하는 '보통 사람'이라는 타이틀을 떼어내고 '삶의 주인'이 되어 가는 과정을 만들고 싶습니다.
어릴 적부터 제 이름으로 책 한 권 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과거 어느 시점에 글을 차곡차곡 썼지만 계절이 지나고 글의 색이 바래지니 유치하고 부끄러웠습니다. 지금에 와서 다시 들춰보니 부족하지만 탑탑한 글 냄새가 나는 글이 몇 편 있었고, 이름 뒤에 '작가'라는 타이틀을 달 수 있을 때까지 글쓰기를 계속하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