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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용한 불꽃 Oct 10. 2020

닳고 닳은 내 마음의 끈이 끊어질까 두려워서

#3. 우리는 각자의 방식대로 애쓰며 살고 있었다

그 해 당신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이라고 누군가 내게 질문한다면 나는 주저없이 이렇게 말하겠다.

"욕받이가 된 것 같았다" 라고...




엄마의 공황장애로 인한 호흡곤란이 시시때때 계속 되자, 나도 엄마도 우리는 서로의 컨디션을 살피며 긴장을 이어갔다. 엄마는 내게 늘 미안해 하시면서도 증상이 나타날 때는 이성을 잃고 모든것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다다랐다.


일터에 나가 있을때 걸려오는 엄마의 전화가 점점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퇴근 후 현관문을 열고 들어올 때 엄마가 방에 누워 계신지, 거실에 앉아 계신지에 따라 나의 퇴근 후 일상이 달라졌다.

더 이상 나의 스케줄은 내 것이 아니었다.

"오늘 늦니"라는 엄마의 한마디는 "컨디션이 많이 안 좋으니 최대한 일찍 와라" 라는 말이었고,

"여보세요~" 라는 나의 첫 마디에 내 이름을 부르실때면 호흡 곤란으로 이미 응급실로 이동중이거나 병원에 가셔야 할만큼 위중한 상태였다.

하필 출장중이거나 야근으로 퇴근이 늦는날 컨디션이 좋지 않다는 엄마의 연락은 내 몸과 영혼을 분리시키는 기분이었다. 몸은 회사에 있지만 마음은 초조하기 그지없었으니...

반복되는 일상에 그때마다 회사일을 소홀히 할 수도 없는터, 어떤날은 신랑에게 부탁하고, 또 어떤날은 엄마가 최대한 버텨보겠다며 그렇게 스스로와의 고된 싸움을 하며 우리는 하루하루 살아갔다.  

한번 증상이 나타나면 짧게는 1시간, 길게는 2시간이 넘게 지속되니 마치 여진에서 시작된 내 몸의 진동이 긴장과 흔들림으로 끝날지, 무엇하나 부숴야 멈출지, 우리는 집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지진의 강도를 느껴가며 피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하며 병원행 여부를 결정하고 있었다.


응급실에 가면 동일증상이라 할지라도 맥박을 확인하기 위한 심전도 검사와 피검사는 언제나 기본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신경안정제 소량과 수액을 투여했다.


때로 간호사가 혈관을 찾지 못하거나 어설프게 바늘을 찌를때면 엄마의 팔에 시퍼런 멍자국이 들었고, 수차례 지속된 피검사에 특별한 증상이 없자 이제는 환자가 먼저 피검사를 생략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럴때면 의사의 표정에도 변화가 생기곤 했는데 환자가 먼저 나서 처방을 하고 있으니, 자존심이 상한 것일까 아니면 그런 환자의 태도가 못마땅한 것이었을까 의사의 무성의한 태도에 엄마는 더러 병원에 다녀오셔서 불편한 감정에 더 화를 내시기도 했다.   


누군가는 TV만 틀면 쉽게 접하는 연예인 공황장애 이야기에 현대인들이라면 흔히들 겪는 병 아니나며, 왜 이렇게 유난이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실제 공황장애는 컨디션이 좋거나 증상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병명을 의심할 수 없을 만큼 일상적인 생활을 하지만, 조금이라도 불안, 답답, 긴장상태가 되면 맥박이 빨라지고 (엄마의 경우)실제 혈압은 170~180까지 오르며, 정상적인 혈액순환이 되지 않으니 신체 일부의 감각이 무뎌지고, 호흡 곤란으로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 증상이 동반된다. 심장박동이 빨라져 수축 현상이 육안으로도 확인 될 만큼 더 이상 몸은 엄마의 것이 아닌 통제 영역을 벗어나게 된다.


이 모든것이 순차적으로 매우 빠르게 나타나기에 맥박이 빨라지는 것을 느끼면 엄마는 그 다음 증상이 나타나기도 전에 이미 극도의 긴장상태에 자신을 놓아버리고 식은땀을 흘리며 불안 상태로 그 모든 것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참 거짓말 같기도 하지.

엄마가 늘 그런 것은 아니다. 맥주 애호가인 엄마는 가족과 함께 치맥하며 소소한 일상을 나누는 것을 좋아하고, 트롯트 음악에 젖어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며 한껏 감성에 취하기도 한다. 음악에 몸을 맡겨 흔들 흔들 춤추며 분위기를 즐기고 매력 넘치는 애교도 한껏 뽐내신다.   

주말에 나와 함께 동네 마실이라도 나갈때면 언제 그랬냐는 듯 엄마는 즐겁게 일상을 누리셨다.

엄마의 컨디션이 좋은 날은 내게도 꿀맛 같은 시간이었다.


엄마가 이미 이곳 병원에 의지하여 다시 친정집으로 가는 것을 불안해 하신다면 근처에 작은 방이라도 구해 살림을 분리하는 것이 더 나은 것일까, 가사 도우미를 고용해 엄마의 말벗과 집안 살림으로부터 엄마의 스트레스가 조금이라도 해소되도록 해볼까?


집안 살림은 하지 마시라고 그렇게 부탁드렸건만, 엄마의 대답은 늘 한결같았다.

"눈에 보이는데 어떻게 안하니"

"내 살림을 어떻게 다른사람 손에 맡기니"

.....


그럴 때 마다 답답한 마음은 더욱 커지고, 엄마께 집안 살림을 하지 말아달라고 말씀 드리는 진짜 이유를 나에게 되묻곤 했다.

너무나 감사했지만 팔이 아프다는 엄마의 건강 걱정,

도대체 왜 우리 엄마만 이렇게 온갖 살림살이를 챙기며 손녀들까지 돌보는 고생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분노,

잘 나가다 어느날 마음이 삐끗하실때마다 꺼내는 듣기 싫은 말, "애 봐준 공은 없다더니" 이 말을 원천 봉쇄하고픈 방어기제까지.. 그 어디즈음에서 나는 진짜 이유를 찾고 있었다.

정말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그 말, "애 봐준 공은 없다더니"

지긋지긋 한 그 말..


빨래며 청소까지 살림을 하시는 건 내가 결코 원했던 것이 아니었는데...

왜 당신이 원해서, 엄마 성격에 빨랫감 쌓아 놓지 못하고 후딱 후딱 해 버렸던 그 모든 집안 일들을...

엄마가 원해서 해 놓고, 엄마 편하자고 해 놓고 나한테 무엇을 기대 하는 걸까..

당신의 모든 것을 '희생' 이라는 단어로 포장했지만 정작 자신의 감정이 알 수 없는 극적 상태에 달할때는 그것을 빌미로 항상 나의 숨통을 옥죄고 있었다.

모든것이 의문이었다. 그리고, 뒤늦게야 알았다.

엄마의 기대를 충족하는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엄마의 기대는 "너무 고생했어" 고마워~" 이 한마디 였을텐데..

살림을 하고 나서 아프다고 하시는 엄마를 보며 고맙다는 말 보다는 "도대체 왜 하시는건지? 내가 원하지 않는데 왜 자꾸 하시는 건지?"라며  오히려 윽박만 질렀다.


주 1,2회라도 가사 도우미를 고용하면 조금 더 낫지 않을까 싶었지만 예민한 엄마에게 내 살림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엄마의 대답은언제나  NO 였다.


출구를 찾지 못하는 미로속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도대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우리 가족의 마음은 지금 모두 건강한가?

언제나 그 중심에 나는 내 마음 세우기에 집중했다.

그 즈음 나는 내 마음 돌보기가 중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한없이 무너질 것 만 같았다. 아이들에게는 언제나 이성적이고  중심에 선 엄마가 아닌

감정적인 엄마가 될까 두려웠다.


우리가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돌보기 위해 내뱉은 말들은 서로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꽂혔고,

그 비수를 다시 빼내기 위해 각자 마음을 위로하고 있었다. 엄마는 엄마의 마음을, 나는 나의 마음을...




퇴근 후 돌아온 내가 아이들의 밥을 챙기느라 조금 늦게 밥을 먹고 있을 때면,

엄마는 늘 아이들에게 "엄마 힘들다. 옆에 떨어져 앉아라" 라고 하신다.

아이들이 늦게 잘때면 "왜 이렇게 잠을 안자니,  애들 교육을 잘못 시키고 있는거야" 라고 하신다.

커가는 아이들이 점점 할머니의 말을 듣지 않자 "너희가 나한테 그렇게 하니 애들도 나를 무시해"라며 화살이 돌아왔고,

편찮으실때 좋은 공기 마시며 좀 쉬다 오시라고 말씀 드릴때면 "이제 아프니 가라고 하는거 같아서 서운하다. 애 봐 준 공은 없다더니" 라는 말들로 나를 괴롭혔다.

이래도 문제, 저래도 문제, 엄마의 눈에는 집안의 모든 것들이 문제상황이었다.

메세지는 엄마에게 전달되는 순간 나의 의도와 전혀 다르게 해석되어 지고 있었다.


그토록 이성적이고 이상적인 삶이라 생각했던 집은 문제 투성이로 전락해 버렸고 나는 그런 엄마의 시각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였을까? 내 마음에 날카로운 날들이 하나둘 세워졌다.


엄마가 빨래며 청소를 한껏 하고 편찮으시다고 하실 때마다

"엄마 제발 하지마, 아무도 해달라고 하지 않았는데 대체 왜 자꾸 하는거야"

▷ 엄마의 도움을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 나의 말이었으리라, (엄마의 배려와 주체성을 기만한 말이었으리라!)


애들이 할머니를 무시한다며 자신의 존재와 자존감을 바닥으로 끌고 가실때마다

"우리 때랑은 달라 엄마, 마냥 애기들이 아니라 이제 자기 생각이 점점 생기는 시기이다 보니 잔소리 하지 말고 그냥 애들이 하기 싫다고 하면 그냥 둬"

아이들을 위한 엄마의 걱정을 세대차이로 정리하며 훈계하는 나의 말이었으리라,


아이들의 식사를 챙기느라 내 밥은 제대로 못 먹는다 걱정하는 엄마에게

"아이들이 종일 나랑 소통할 시간은 저녁 먹는 이 시간이 유일할테니, 나한테 스킨십도 하고 싶을거고,

나는 나대로 일하느라 못챙겨준거 이 시간에 챙겨주는 거니 정말 괜찮아, 내가 힘들면 안하지" 

지 새끼 중한 줄은 알면서 애미가 자기 챙기는 지 애미 마음은 몰라주는 야속한 나의 말이었으리라.


우리는 갈등의 늪으로 빠져 들었다.

그럴때마다 엄마는 서운함에 내게 폭풍같은 지난 시간들의 고생을 열거하면서 애봐준 공은 없다며, 나 없이 그냥 잘 살라는 한마디를 던진채 짐을 챙겨 내려갈 준비를 하셨다.  




그렇게 함께가 아닌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의 마음이 무너질까 달래기에 급급했던 우리는 소통을 가장한 불통 속에 내 마음의 끈을 놓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어느새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이유도, 서로의 마음을 돌봐 줄 여유도 잊고, 닳고 닳은 내 마음의 끈만 부여잡은 채 애쓰며 살아가고 있었다. 우리의 관계는 애정에서 애증으로 물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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