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으면 뭐라도 써지듯이
여긴 완전 동네다. 소도시에 있는 한적한 동네를 걷는 기분이다. 옛날 분위기를 느끼게 해주는 시장초입과 낮고 클래식한 디자인의 저층 건물들 그리고 특유의 분위기가 풍긴다. 냄새도 한몫한다. 이곳을 더 느끼기 위해 에어팟을 빼고 천천히 걷는다. 야채가게, 해산물 가게, 꽈배기, 한약방, 그 사이에 껴있는 붕어빵 파는 할머니, 떡방앗간 등등 시장의 필수요소를 다 품고 있는 완벽한 골목이다.
집에서 마음에 드는 책을 읽다 몇 장 남지 않아서 찜해놨던 카페로 향했다. 읽으면서 애착이 많이 갔던 책은 무언가의 의식처럼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싶어 진다. 가본 적 없는 동네의 어느 고요한 카페에 도달했다. 문을 열자 커튼 뒤로 감추어놓았던 공간으로 인해 동네 분위기와는 또 다른 이곳만의 분위기, 디저트, 그리고 커피가 있다. 그래서 나는 그냥 이곳을 온전히 즐기자는 자세로 들고 온 책을 가방에서 꺼내지 않았다.
일부러 해 지는 시간에 맞추어 도착했다. 요즘 석양을 마주하기 힘드니까. 5시만 되어도 태양이 건물들 사이로 쏙 빠져버린다. 그러고 순식간에 사라지면서 바통 터치하듯 가로등이 팟- 하고 켜지는 걸 목격할 수 있다. 겨울은 겨울인가 보다. 때마침 하루가 짧은 것 같다고 카페 사장님도 한 말씀하신다. 소중한 겨울 빛을 더 탐하기 위해 핸드폰을 내려둔 채 창밖을 응시한다. 어차피 내 눈에 보이는 건 카메라에 그대로 담기기 어렵다. 그러다 옆 사람의 작업물을 곁눈질로 쳐다본다. 80%의 확률로 작가님인 것이 틀림없는 게 노트에 목차가 일목정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마감을 앞둔 사람처럼 살짝 지저분한 자리. 진행이 더딘지 잔뜩 인상을 쓰더니 이윽고 술도 주문하신다. 뭔가 어른스러웠다. 왜냐면 난 아직 카페에서 술도 주문하지 못하는 애송이이기 때문이다. (24년 버킷으로 카페에서 알코올 주문하기를 추가해도 좋다는 생각이 방금 떠올랐다)
바빴던 11월이 끝나고 다시 한적했던 10월로 돌아간 기분이다. 또 언제 바빠질지 모르니까 지금의 여유를 즐겨야 된다는 걸 알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초조해지는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종일 집에만 있으면 잡생각이 들기 십상이라 하루에 한 번씩 외출을 꼭 감행한다. 멀든 가깝든 간에 (살짝 과할 정도로) 예쁜 옷을 입고 화장을 하고 나를 사회적 지위에 맞게 꾸며 나오면 기분이 왠지 들뜬다. 나 자신을 아껴주는 기분이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랄까.
어제도 카페에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타러 내려가는데 때마침 퇴근시간이었다. 수많은 인파가 계단을 올라오는데 나만 반대로 내려갔다. 마치 스무 살 밤을 꼬박 새우면서까지 술 마시고 차가운 새벽공기를 맞으며 나 홀로 집으로 돌아갈 때, 일찍이 출근하는 사람들을 역방향으로 지나치는 느낌이 들었다. 기분이 묘했다. 나는 살짝 다른 삶을 살고 있구나 -라는 걸 살갗에 닿았다. 물론 나 같은 환경에 있는 사람들은 또 각자만의 바운더리에 있을 테니 그렇게 유별난 건 아닐 테다. 그냥 단순히 기분이 묘했다고. 그뿐이다.
옆 사람도 글을 쓰고, 나도 글을 쓰고, 여기 카페 사장님도 글을 쓰는 것 같다. 카페 한 켠에는 큐레이션 된 책들이 나열되어 있다. 나도 내가 읽고 있는 책의 작가님처럼 쓰고 싶다.. 는 생각이 내내 들었다. 생각나는 대로 쓰면 되지 않을까 했는데 또 그렇지만은 않다. 주제를 정하고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야 한다. 작가란 여러 물 웅덩이를 연결시키고자 길을 잘 들여서 파고 삽질을 해야 한다. 그러니까 독자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길을 잘 터주는 것. 그것이 나의 역할이다. 누군가의 일기는 한두 번 보면 재밌겠지만 계속 보면 질리기 마련이니까.
그러다 문득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걸어왔던 시장 길을 되돌아갔다. 이 세계로 올 땐 해가 뜬 낮이었는데 지금은 푸른빛의 밤이 되었다. 실제로는 한 시간 남짓밖에 흐르지 않았는데도. 어디선가 그런 글을 보았다. 하루는 길고, 일 년은 짧다고. 겨울엔 해가 더 짧아지니까 연말이 되면 벌써 1년이 지났다고 느끼는 거다. 실제로 해의 시작인 1월도 겨울이고 12월도 겨울이니까. 이러나저러나 1년은 찰나이고 시간이 빠르다고 느껴진다면 이렇게 별 볼일 없이 스쳐 지나가는 하루일지라도,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담아내고 마음으로 소화시켜 손끝으로 표현해 내는 이 글쓰기의 과정을 더더욱 좇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늘도 무언가의 발견을 머리카락 휘날리며 밖으로 나온다. 나오면 어떤 일은 벌어지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