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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나 Feb 29. 2024

만약 너라면 어떻게 할 거야?

105만 원짜리 양심

   “이거 내 친구 얘긴데 한번 들어볼래?”

   “그래, 좋아.”

수아는 접시와 수저를 식기 세척기에 하나하나 열 맞춰 넣으며 대답했다. 연희는 크게 심호흡한 후 이야기를 시작한다.

   “지난 주말에 내 친구가 급한 일이 생겨서 지하철 타고 강남으로 가던 중이었어. 내리려고 출입문 앞에 서 있었는데 갑자기 뒷사람이 자기 뒤꿈치를 밟아버려서 신고 있던 슬리퍼가 플랫폼 사이로 쏙 빠져버린 거야. 지하철에 맨날 ‘발 빠짐 주의- 발 빠짐 주의-’라고 방송 나오는 거 알지. 내 친구가 그 방송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거야. 얼른 약속 장소로 가야 했는데 신발 한 짝이 없어져 버려서 당황스럽고 화가 나더래. 그나마 다행인 건 발 밟았던 뒷사람이 미안해하면서 임시방편으로 지하상가에 파는 슬리퍼도 사 오고 먼저 전화번호 교환까지 했다는 거야. 내 친구는 일단 그날 새벽에 다시 역으로 가서 슬리퍼를 되찾았대. 역무원 말로는 운행이 완전히 종료된 후에 찾을 수 있다나. 근데 지난주 날씨 기억나? 일주일 내내 비가 미친 듯이 내렸던 거. 슬리퍼는 되찾았는데 빗물 때문에 새까맣게 물들고 얼룩져서 난리가 난 거야. 그래서 친구가 그 사람한테 사진 보내주면서 신발이 결국 이렇게 됐다고 어떻게 할 건지 물어봤대.”

연희는 살짝 상기된 얼굴의 온도를 낮추려 말을 잠시 멈추었다.

   “듣고 있어, 계속 얘기해 봐. 너 아이스로 먹을 거지?”

수아는 연희가 사 온 구움 과자를 수수한 무늬의 새하얀 접시 위에 세팅하며 물어보았다. 캡슐 커피 특유의 향이 수아의 집을 살포시 채운다.

   “응, 아이스로. 여기서 핵심은 내 친구가 신고 있었던 슬리퍼가 고가의 명품이었던 거지. 105만 원 정도 한다는 거야.”

연희는 105라는 숫자에 힘을 주며 이어 말했다.

   “그럼 여기서 하나 물어볼게. 수아 네가 만약 내 친구라면 어떻게 할 거야? 심지어 그 슬리퍼 산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거래.”

장대한 연설을 끝낸 사람처럼 연희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벌컥벌컥 들이키며 수아의 반응을 지켜보았다.

   “뭐? 한 달도 안 됐다고? 나라면 우선 다 보상해 달라고 했을 거야, 105만 원 전부.”

수아는 마치 본인한테 겪은 일인 것처럼 미간을 찌푸리며 연희와 똑같이 105라는 숫자에 힘을 주며 대답했다. 아몬드 사블레를 오도독 씹으며 되묻는다.

   “그 사람은 결국 어떻게 했대? 네 친구는 어떻게 하고?”

   “일단 죄송하다고 사과는 받긴 받았는데 전부는 무리고 절반 정도만 줄 수 있다고 하는 거야.”

   “미친 거 아니니? 막말로 사람 죽여놓고 미안하다고 사과하면 끝이야? 보상을 제대로 해줘야지. 그 사람 대체 왜 그런데?”

   “그렇지? 그런데 수아야. 사실 그 발 밟은 사람이 나야.”

 순간 수아의 동공이 흔들렸다.

   “잠깐만. 이거 네 친구 얘기가 아니라 너 얘기구나?”

   “맞아. 나한테 일어난 일이야. 내가 지하철에서 내리다가 실수로 앞사람 뒤꿈치를 밟았고 그 사람의 슬리퍼가 승강장 사이로 빠졌어. 나보고 105만 원 전부 보상하고 안 그럼 이거 변호사 선임해서 법원까지 충분히 갈 수 있는 일이라고 으름장을 놓더라.”

   “그래서 어떻게 했어? 무슨 그깟 일로 변호사야. 그 여잔 시간도 많은가 봐?”

방금 전까지만이라도 그 사람 편을 들던 수아는 곧장 포지션을 바꾸어 내 편이 되었다. 단 한 마디에 흐름이 바뀌었기에 연희는 허탈함에 쓴웃음이 났지만 수아의 걱정 어린 표정을 보고 목소리를 뒤로 삼켰다.

   “사실 그 이후에도 많은 실랑이가 있었는데 결론만 짧게 얘기하자면 105만 원 보내줬어.”

   “그 사람도 대단한데 너도 대단하다, 연희야.”

   “막상 주고 나니까 속이 정말 후련했어. 그동안 절반만 주니 마니 하며 실랑이했던 게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말야.“ 연희는 자신의 통장잔고도 마찬가지로 후련해졌지만 이미 떠나간 돈이라 아깝지 않다고 했다. 사실 많이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머리로는 보상해줘야 한다는 걸 알지만 그건 교과서적으로 제삼자의 입장에 있을 때의 일이다. 정작 그 상황 안에 있다 보면 사람은 객관적이기 참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러 처음부터 입장 바꿔서 말했다고 한다. 그 여자 말대로 남 물건에 해를 끼쳤으면 그것이 100원 짜리든 100만 원 짜리든 간에 보상해 주는 게 옳은 것 같다고, 그렇게 생각하면 참 간단한 일이었다고 하소연했다. 그 당시 연희는 자기 내면 속 작은 괴물을 마주한 거나 진배없었다. 어차피 복잡하고 정신없는 지하철인데 모른채하고 그냥 튈 걸 그랬나, 연락처 차단하고 이참에 번호를 바꿔버릴까 - 하고 끝없이 합리화하는 자신의 소름 돋는 모습에 어느 순간 질려버렸다. 연희는 그동안 꾹 눌러왔던 자신의 어두운 내면을 가감 없이 수아에게 보여주었다. 연희에게 수아는 자기 내장까지 까발라 보여주어도 함부로 판단하지 않을 것임이 분명했으니까.

   “너 그동안 마음고생 많았겠다. 왜 다 끝나고 얘기해 주는 거니. 너는 매번 그러더라.”

수아는 내 손을 꼭 붙잡으며 이어 말했다.

   “그리고 아까 내가 너무 심한 말 한 거 같아. 사람 죽여놓고 미안해하면 전부냐니….”

   “아냐, 수아야. 나 그런 거 신경 안 쓰는 거 너도 알잖아. 나는 합리화에 찌든 나 자신을 경계해야 해. 시간이 흘렀지만 계속해서 반성하고 싶어.”

하얀 접시 위 과자는 어느새 하나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수아는 자신을 위로하는 연희를 보고 피식 웃으며 남은 쿠키 하나를 입 속에다 쏙 넣어주었다. 마지막 쿠키는 달콤하면서도 어딘가 씁쓸했다. 시간이 되어 이제 가봐야겠다며 연희는 수아네 집을 나섰다. 한결 가벼워진 몸을 지하철에 싣고 집으로 돌아와 이날 하루를 되짚어보았다. 본인이 했던 말, 행동, 눈빛 그리고 제스처까지 과했다거나 실수한 건 없는지 샅샅이 리플레이했다. 그리고서 두 눈을 살며시 감으며 다짐했다. 다른 친구들에게도 수아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시나리오로 얘기해 줘야겠다고. 이건 깊은 내면 안에 살고 있는 괴물의 모습을 희석하기 위해서라고. 어째서인지 여러 번 되풀이할수록 그 괴물의 실루엣이 옅어질 것 같은 명징한 예감이 들었다.

   [발 빠짐 주의- 발 빠짐 주의-]

크게 울려 퍼지는 지하철 방송 소리에 연희는 급하게 내리고 타는 많은 사람들을 쳐다본다. 이제는 그 인파 속 괴물의 모습은 점차 흐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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