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차례 패러다임이 변화했다. 1세대 아이돌들은 춤추는 인형돌로 불렸다. MR에 맞춰 그다지 어렵지 않은 댄스를 선보였다.
2세대 아이돌들은 노래와 퍼포먼스에 있어 완성형에 가까워졌다. 고난도의 퍼포먼스를 칼같이 수행하면서 흔들리지 않는 노래실력을 선보였다.
이제 3세대 아이돌들의 시대다. 3세대 아이돌은 재능 있는 젊은이들이 모인 프로젝트 그룹이다. 가장 노래 잘하는 젊은이, 프로듀싱 능력이 있는 젊은이, 작곡 능력이 뛰어난 젊은이, 퍼포먼스를 잘하는 젊은이들이 모여서 아이돌 그룹이 된다.
왜 굳이 아이돌 그룹에 작곡가, 프로듀서, 안무가가 다 있어야 하는가? 왜 그들은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자체돌로 인정받기 위해 애쓰는가?
일반 대중들은 ‘퍼포머(Performer)’ 보다 ‘크리에이터(Creator)’를 더 높게 평가하기 때문이다.
평범한 작곡 능력을 가진 뛰어난 보컬리스트보다, 뛰어난 작곡 능력을 지닌 평범한 보컬리스트를 더 높게 평가한다. 그래서 뛰어난 보컬리스트들도 새로운 앨범을 발표할 때 ‘자작곡 참여’를 강하게 어필한다.
문화평론가이자 연예부 기자인 서병기 님은, 신인들과 인터뷰를 해보면 스타가 될 수 있을지 없을지 예상이 된다고 말한 바 있다. 자신의 음악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가, 이것이 그의 기준이다. 나이가 어려도, 자신의 자작곡이 아니어도, 대본에 의지해야 하는 배우라도, 자신의 음악관과 연기관을 타인에게 설득력 있게 전달할 수 있어야만 스타로 성장할 수 있다는 얘기다.
사람들의 마음을 흔드는 것은 퍼포머의 결과가 아닌 크리에이터의 주장이다. 결과물을 좋아하는 사람이 팬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팬이 된다. 그래서 팬은 크리에이터를 향해 모인다. 훌륭한 퍼포머는 2류고, 훌륭한 크리에이터는 1류다.
“나는 단순히 물건을 만들고 싶은 게 아니었다. 디자인만 하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하드웨어나 기술을 이용해 내 안의 창의력을 표현하고 싶었다. 뮤지션에게 노래가 있듯이 완성한 제품을 통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도 있는 법이다. 마치 록 밴드 같은 브랜드. 나는 그런 회사를 만들고 싶었다". 테라오 겐 (발뮤다 창업자)
크리에이터와 퍼포머를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 자신의 주장이다. 세상에 전하고픈 자신의 생각이며 관점이다. 크리에이터에게 존재의 이유는 주장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 주장을 증명하는 수단이 결과물이다.
퍼포머에게 존재의 이유는 결과물이다. 결과물에게는 좋음과 나쁨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다음 결과물이 좋지 않다면 손쉽게 다른 결과물로 옮겨 간다.
동대문 쇼핑몰에 있는 작은 안경점을 방문했었다. 예쁜 인테리어, 독특한 제품들이 많았다. 안경점을 지키고 있던 주인은 그 브랜드의 오너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리고 젠틀몬스터는 중국에서 제품을 만들어오지만, 우리는 직접 제품을 만든다며 자랑을 시작했다. 가볍고 편한 안경, 안경에게 그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하냐고 되물었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세상 수만의 안경 브랜드들이 똑같이 ‘가볍고 편한 안경’을 내놓는다. 가볍고 편한 안경은 결과물이지 주장은 아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손으로 직접 안경을 만들지만, 퍼포머이지 크리에이터는 아니다.
크리에이터와 퍼포머의 차이점은 직접 결과물을 만드느냐 만들지 않느냐의 차이를 넘어선다. 크리에이터의 중심에는 세상에 전하고픈 자신만의 주장이 있어야 한다.
브랜드의 세계에는 아주 많은 퍼포머들이 있다. 그리고 매우 소수의 크리에이터가 있다. 앞서서 소개한 발뮤다의 창업자 테라오 겐은 애플, 버진그룹, 파타고니아를 자신의 멘토 브랜드로 꼽았다. 이 3개 브랜드의 공통점은 다음과 같다. ‘이루고자 하는 일을 우선으로 두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사업이라는 수단을 선택한 것’.
본래 뮤지션이었던 그는 이것을 음악으로도 비유했다.
“시장을 분석한 뒤에 어떤 사운드를 만들어낼지 고민하는 록 밴드는 어디에도 없다. 단지 음악을 하고 싶다는 이유로 멋대로 노래하고 연주한다. 이런 곡을 만들고 싶다, 노래하고 싶다는 충동이 먼저 앞서는 것이다. 그 충동을 충족하고, 실현하려는 노력과 과정을 나는 예술 활동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위대한 크리에이터는 애플이다. 1997년 스티브 잡스가 ‘Think Different’를 발표했던 프레젠테이션은 현대 브랜딩의 개념을 완벽히 설명한다.
애플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애플은 누구를 위한 브랜드인가, 애플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스티브 잡스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애플은 업무에 도움을 주는 박스를 만드는 브랜드가 아니라고. 네모난 구멍의 세상에 동그란 말뚝 같은 사람들, 열정으로 세상을 바꾸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 think different를 실천하는 사람들을 위한 브랜드라고. 역사 속에서 think different로 세상을 바꾸어 왔던 사람들, 그들의 세상에 컴퓨터가 있었다면 그들은 애플을 썼었을 거라고. 지금도 think different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미치광이들, 그들을 위한 애플이라고
이 위대한 의견이 think different를 꿈꾸는 모든 젊은 영혼을 사로잡는 씨앗이다. ‘업무를 도와주는 박스’ 일뿐이었던 애플을 존경하게 만드는 힘이고, 애플빠 일코해제를 두렵지 않게 만드는 힘이다. 왜 이 시장 다른 브랜드에게는 없는 팬덤을 애플은 갖고 있을까? 그의 주장이 있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을 동의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스티브 잡스가 이 역사적 프레젠테이션에서 찬양한 브랜드는 나이키다. 그저 생필품(Commodity)인 신발, 그러나 나이키는 결과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위대한 운동선수와 스포츠의 역사에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모든 이의 꿈을 응원하면서 ‘It’s crazy until you do it. Just do it!’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이 나이키를 존경하게 만들고 좋아하게 만든다.
다른 스포츠 브랜드에게 없는 공고한 팬덤을 왜 나이키만 갖고 있을까? 주장이 있기 때문에, 주장을 동의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크리에이터는 자신의 주장으로 남들에게 영향을 준다. 그리고 그 영향은 변화를 일으킨다. 사람의 영혼을 움직이는 것, 그래서 팬이 되게 하는 힘은 공감과 감동이 담긴 영향력 있는 주장이다. 이것이 퍼포머가 아닌 크리에이터에 팬덤이 생기는 이유다.
팬들은 결과물만을 지지하지 않는다. 결과물이 만들어지게 된 주장을 보고, 결과물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본다. 결과가 아닌 주장, 외양이 아닌 주장. 이것이 팬을 모으는 아주 단단한 시작이다.
김구 선생님의 백범일지에 한 구절을 소개한다. 100년 전 이야기지만, 오늘날을 사는 브랜드들이 각자의 주장과 철학, 관점을 왜 가져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기에.
“무릇 한 나라가 서서 한 민족이 국민 생활을 하려면 반드시 기초가 되는 철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니, 이것이 없으면 국민의 사상이 통일이 되지 못하야 더라는 이 나라의 철학에 쏠리고 더러는 저 민족의 철학에 끌리어 사상의 독립, 정신의 독립을 유지하지 못하고 남을 의뢰하고 저희끼리는 추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중략) 우리의 서울은 오직 우리의 서울이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철학을 찾고, 세우고, 주장하여야 한다. 이것을 깨닫는 날이 우리 동포가 진실로 독립정신을 가지는 날이요, 참으로 독립하는 날이다.”